술의 둠스데이 (외 2편)
 
   문정영
 
 
 
매일 술을 조금씩 먹고 자랐다
 
서른 마흔 나이 먹으면서, 좁은 이마에 띠를 두르고 달리기하면서
 
술병에 숨어 독작하였다
 
어떤 것이 사라질까 두렵지 않다, 술잔에 이야기하였다
 
폭음을 싫어한다는 말에 꽃잎이 혼자 웃었다
 
지구의 종말은 비둘기가 먼저 알 거야
 
뱉어놓은 술 찌꺼기를 가장 많이 먹는 짐승은 위대하니까
 
간에서 자라는 물혹들이 가끔 물었다
 
내가 자란 만큼 술은 사라졌는가, 아니 빙하가 녹는 속도를 묻는 게 더 빠를지 몰라
 
불안한 공기를 뱉으며 키가 줄었다
 
몸속에 들어와 숨쉬기 곤란한 질문이 이별이었을까
 
저녁을 감싸고 있는 술잔들이 따듯해졌다
 
좀 더 놓아버릴 것들을 찾아야겠다고 실언했다
 
더는 당신이라는 말을 술병에 담지 않겠다고
 
자정 지나 혼잣말하곤 했다
 
 
 
탄소발자국
 
 
스무 살부터 만지는 장난을 좋아했다
 
여름을 신나게 만지다가 가을을 놓치곤 했다
 
날마다 가지고 놀던 강의 종아리, 풀꽃의 입술, 느티나무의 가슴
 
마흔 넘어서는 만질 수 없는 순한 시간들이었다
 
그때 만지던 것이 나의 젊음이었는지, 불안이었는지
 
밖으로 끌려 나가던 욕망들을 보았다
 
어떤 눈물은 만지지 않아도 흘렀고 색깔이 검었다
 
눈동자를 잃어버린 저녁이 기침하곤 했다
 
그 후로 性이란 호기심 발자국이 탄소 가득한 거리를 맨발로 걸어 다녔다
 
사랑은 서로의 에너지를 연소하는 호기심
 
서로를 원할 때마다 불완전한 발자국을 몸에 남겼다
 
지금 지구의 눈물은 12시 5분 전
 
장난칠 여름이 보이지 않는다
 
 
 
바다 판각 기행
 
 
 
그녀에게 새긴 시간은 평면이었다
문자를 읽지 못하는 바다였다
 
깊어서 평면으로 눕고 평평하게 말하기를 바랐다
 
바다는 산소를 만드는 식물성 프랭크톤으로 산다고, 그녀는 붉은 입술로 아주 사소한 것들을 기억했다
 
눈으로 읽은 것들은 쉽게 사라지듯
바다의 눈꺼풀을 덮으면 수평선이 지워졌다
 
바다는 오래 살아 있는 것들을 밀물판화에 새겼다
그녀와 내가 함께한 어제는 짜디짠 판각이었다
 
누군가 들여다보아도 거둘 것이 없는
찍어도 찍혀 나올 것이 없는 탄소발자국같이
 
지금까지의 여행을 지워가고 있다
 
바다는 이제 먹을 갈 깊이가 없다
썰물이 밀려가야 할 이유를 새길 때까지 판각을 다듬는
 
눈꺼풀로 바다를 내렸다 올리는 우리는
이번 생의 초보자일 뿐이다
 
 
 
              ―시집 『술의 둠스데이』 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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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전남 장흥 출생.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낯선 금요일』 『잉크』 『그만큼』 『꽃들의 이별법』 『두 번째 농담』 『술의 둠스데이』. 계간 《시산맥》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