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석 요셉 신부
연중 제4주간 화요일
히브리 12,1-4 마르코 5,21-43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마르코 복음 5장 21-43절)
예수님 만나기
사람들은 회당장의 딱한 사연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놀라운 행적을
기대하며 길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 길에서 어느 여인과 예수님만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군중도 제자들도 여인의 존재를 몰랐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제자들과 군중은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 화면에서 사라져버립니다.
당신에게서 치유의 힘이 빠져나간 것을 인지하셨던 예수님과 자신의 몸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느꼈던
여인만이 남아 있습니다. 군중에 휩싸인 제자들의 시선과 군중 속에서 여인을 찾던 예수님의 시선은
분명 다릅니다. 이 장면에서 교회의 신앙과 개인의 신앙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군중과 같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가운데 모시고 있으나 그분의 시선을 모두 따라잡지는 못합니다. 교회의 시선이
따라잡지 못하는 개인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과 그 사람만 아는 관계입니다.
군중이나 제자들의 호응은 직접 연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결국 교회에 몸담고 있으나 한 개인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치유의 기적은 교회를 통해 주어지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서울대교구 김효석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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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규 베네딕토 신부
연중 제4주간 화요일
히브리 12,1-4 마르코 5,21-43
오늘 우리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던 부인을 고쳐 주신 이야기를 듣습니다.
액자처럼 구성된 두 이야기는 모두 믿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하며 소개되는 인물은 ‘야이로’라고 불리는 회당장입니다.
야이로는 히브리 말로 ‘빛을 주신다’ 또는 ‘빛을 밝혀 주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민수 32,41 참조).
그의 이름은 오늘 복음에서 매우 상징적인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으로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을 되살려 주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 말씀은 두려울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 있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동시에 죽음도 넘어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의 이야기도 치유를 넘어 믿음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그에게 병이 낫는 것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두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온갖 노력을 하였지만 병을 고치지 못하고
더 나빠졌습니다. 병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던 회당장의 딸은 결국 죽습니다.
모두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는 여인과 결국 죽음에 이른 회당장의 딸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절망의 모습들입니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치유가 아니라 구원입니다. 야이로의 이름처럼 예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굳건한 믿음입니다.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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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연중 제4주간 화요일
히브리 12,1-4 마르코 5,21-43
완성에로 이끄시는 믿음의 영도자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오늘 히브리서는 주님을 믿음의 영도자요 완성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믿음의 여인 얘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며칠 전 믿음의 탄생과 완성에 대해 이미 얘기한 바 있지만
오늘도 믿음에 대해, 믿음의 길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데
주님이 바로 우리 믿음의 길잡이이시라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길이라고 하셨는데 보통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는 뜻에서 얘기하지만
오늘은 믿음의 길이라고 얘기해도 좋을 것입니다.
믿음의 영도자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믿음의 완성자라고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주님께서 영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면 우리 믿음이 완성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복음의 여인을 예로 들어 한 번 보겠습니다.
오늘 여인은 믿음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믿음이 처음부터
훌륭했을까요? 아마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은 결과일 것입니다.
병을 앓기 전에는 믿음이 없었을 것이고, 병을 앓기 시작한 후에도 한동안은 믿지 않았을 겁니다.
믿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원망했을 것이고,
주님을 만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믿음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마중물이셨습니다. 우리말에 믿음을 주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는데,
주님이야말로 믿음을 주시는 분이고 그래서 믿음의 마중물이셨습니다.
오늘도 그러셨지만,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고 주님은 늘 믿음을 북돋우시고,
겨자씨만한 믿음이어도 그것으로 산을 옮길 수 있다며 믿음을 북돋우시잖아요?
물론 왜 이리 믿음이 없냐고 나무라실 때도 있지만, 그것은 거의 언제나 제자들을 향한
나무람이고 제자라면 더 큰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아무튼, 주님은 믿음을 주시는 분이시어서 불신자를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인간을 믿는 사람에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심판자로 하느님을 믿던 사람을 구원자로 믿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믿음을 주시는 주님은 힘 또한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셨다고 하잖아요?
이처럼 주님은 힘주시는 분이시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힘이 전달되지 않지만
믿는 사람에게는 믿음만큼 그 힘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제 그 힘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죄를 지어도 절망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시는 힘을 받을 경우만 이겨낼 수 있고, 믿는 사람만이 그 힘을 받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듯 믿음은 개방이요,
믿는 사람이 주님께 자신을 개방할 것이고 힘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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