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순 바오로 신부
연중 제4주간 수요일
히브리 12,4-7.11-15 마르코 6,1-6
마르코 복음서는 그 장엄한 시작을 다음과 같이 들려줍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
마르코 복음사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예수님의 참된 신원은 “하느님의 아드님”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각기 다른 시각이 언급됩니다.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 이것은 나자렛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시각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태도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상반된 두 관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과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의
긴장이 오늘 복음에서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께서는 그저 마리아의 아들이고 목수였을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는 다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마르 1,22 참조), 예수님을 훌륭한 분으로 인정합니다(마르 7,37 참조).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시각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만,
반대로 목수로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떠한 분으로 바라보고 있나요? 하느님의 아드님? 아니면,
나자렛 출신 목수?
그분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행위를 결정합니다.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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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4주간 수요일
히브리 12,4-7.11-15 마르코 6,1-6
‘집’이나 ‘고향’이라는 말은 많은 경우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고 애틋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당신의 고향으로 가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집(안)”이라는 표현이 무려 119번이나 나오는데, 이 표현이 늘 좋은 뜻으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전통’이라는 틀에 매여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거절하는 이들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서 11,17 ; 바룩 예언서 2,26 ; 에제키엘 예언서 3,7 참조).
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탈출기 20,2; 신명기 5,6)이라고 소개하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첫 말씀은 아브라함이 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창세기 12,1 참조).
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행복을 얻으려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집이나 고향,
곧 과거의 전통과 자기의 예전 생각에서 떠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배우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에서 첫 공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실 때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뽑으신 것이었는데(마르코 1,16-20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새 가족을
만들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만드신 이 가족을 교회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우고 만드신 새 가족이 나자렛의 옛 가족과 충돌하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곧잘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넘어집니다. 나자렛 주민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믿는 이는 과거의 전통과 생각과
신념으로 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 말씀을 믿고 자신의 옛 집과
고향(자기 생각, 신념, 전통, 문화 등)에서 끊임없이 나오려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느님을 자신보다 앞세우는지 아니면 하느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지에 따라
믿는 이의 삶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7)
라고 고백하시며 늘 당신보다 하느님 아버지를 앞세우셨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서 큰 걸림돌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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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4주간 수요일
히브리 12,4-7.11-15 마르코 6,1-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나와 고향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놀라워했습니다.’(마르 6,2)
그러나 받아들이지는 않고.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마르 6,3).
그런데 그들은 왜 예수님을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긴 것일까?
사실, 그들은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그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마르 6,2) 하고, “그분의 지혜와 기적의 힘”에는 놀라워했지만,
그 지혜와 힘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권위를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사실은 자신들의 ‘무지’, 곧 그분의 지혜와 힘의 원천을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동시에 자신들이 그분에 대해 알고 있는 ‘앎’을 내려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마르 6,3)
이처럼, 그들은 ‘그를 안다’는 자기 생각, 곧 자신들의 고정관념,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이 바로 완고함과 불신을 불러오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생각을 믿고 섬기고 따른 우상숭배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그렇습니다. 잘못된 믿음, 곧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을 믿게 되면,
참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금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의 표현은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줍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안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뛰어넘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의 인격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자신이 알고 있는 그러한 예수님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지외의 데레사 성녀는 말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위하여 저는 가장 낯선 생각들도 받아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앎’에 대한 완고함으로부터 벗어나고, 동시에 ‘자신의 무지’에 대한
어리석음을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고,
완고함은 불신의 씨라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르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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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못한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하는 저는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자입니다.
존경을 겸손의 표지로, 믿음을 응답의 표지로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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