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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난 공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노래의 50%는 노력에 의해서 나온 것이니까요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 배우도 아니고, 팝 가수도 아니면서 코카콜라 만큼 유명하고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은?
더군다나 오페라 가수로서 세계 남녀노소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사람은?
바로 집채만한 몸집에 턱수염이 부글부글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1935년 10월 12일~2007년 9월 6일)
65세라는 나이에도 아름다운 음성을 자랑하던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지난 2000년 6월 30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평화 콘서트를 가졌다.
1장 노래 좋아하는 아버지 페르난도, 노래 잘하는 아들 루치아노
어린 시절 나만큼 많이 논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루치아노, 저녁 먹어야지.
금방 갈게요. 먼저 들고 계세요!
루치아노의 몸은 집이 아닌 축구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어요. 그러니 대답은 건성으로 한 것이지요.
그러면 언제나 인자한 할머니는 한 번 더 루치아노를 부른답니다.
루치아노, 엄마와 아빠가 너와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서 기다리잖니? 어서 오너라.
그제야 루치아노는 계단을 줄달음쳐 올라가 손은 씻는 둥 마는 둥 식탁에 앉아 식사를 했어요.
엄마 아빠가 루치아노에게 무슨 말인가를 할라치면, 루치아노는 어느 새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어요.
식사를 얼마나 빨리 했느냐고요? 루치아노의 기억으로는 아마 3분도 안 걸렸을 거라네요.
그러면 대체 루치아노는 뭐 하러 그렇게 급히 간 걸까요?
루치아노는 놀기를 굉장히 좋아하던 아이였어요. 축구는 동네 꼬맹이들과 어울려 거의 매일 하는 일이었구요,
도마뱀이나 개구리를 잡기 위해 온종일 숲과 마을을 돌아다녔어요.
뿐만 아니죠. 어린아이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루치아노는 아주 열심히 즐겼답니다.
그래서 루치아노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해요.
나만큼 오래, 그리고 열심히 논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루치아노의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담배 공장에서 저녁 늦도록 일했어요.
그리고 루치아노는 침대도 없어 낮 동안 식탁으로 쓰는 다리미판에서 잠을 자야 했죠.
이렇게 가난한 생활을 했지만, 루치아노는 자신이 한 번도 가난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답니다.
뿐만 아니라, 난 다른 집 애들에 비해서 너무나 가진 것이 없어.라고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해요.
루치아노는 선천적으로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거든요.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노래 속에서 보낸 어린 시절, 루치아노는 그 시절이 정말 행복하고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답니다.
열두 살 때 선언해 버렸어요. 난 프로 가수가 될 거야.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나 노래를 좋아하고 잘해요. 동네 이발사 아저씨도, 음식점 주인 아주머니도, 그리고 근사한 양복을 차려입은 멋쟁이 신사도 언제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곤 하죠.
루치아노의 아버지 페르난도 씨도 노래를 좋아하고 아주 잘 부르던 사람이었어요.
제빵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머리에 하얀 밀가루를 뒤집어쓰면서 반죽을 할 때나, 뜨거운 오븐에서 빵을 꺼낼 때나 언제나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물론 이탈리아 대중가요인 칸초네도 불렀지만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 교회 성가곡들을 자주 불렀답니다.
아버지가 오븐에서 빵을 꺼내며 멋진 아리아를 쭉~ 뽑아 낼 때면 식구들은 너무너무 행복해했대요.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1940년대 당대 최고의 테너 가수들인 카루소, 질리, 마르티넬리, 스키파 등의 음반을 집에 갖고 들어와 하루 종일 틀어놓곤 했어요. 그러니 집 안에서는 언제나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죠.
루치아노가 5살 때였어요.
집에 있던 만돌린을 들고 아파트 뒤편에 있는 분수대로 올라간 루치아노는 아파트 사람들을 향해 세레나데를 불렀답니다.
이른바 꼬마의 콘서트였죠.
와, 파바로티! 너 정말 노래를 아주 잘하는구나!
이웃들은 다섯 살짜리 동네 꼬마의 당돌한 콘서트를 다들 축하해 줬어요.
루치아노가 벗어 놓은 모자에 땅콩이나 사탕을 던져 주면서 앵콜을 청하기까지 했거든요.
사람들은 그 때 루치아노가 지금처럼 프로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무튼 그로부터 7년 후인 열두 살 때 루치아노는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베냐미노 질리의 공연을 보고 넋을 잃고 보고 나서, 질리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어요.
나도 이 다음에 어른이 되면 당신과 같은 테너 가수가 될 거예요!
그런데, 이 날 루치아노는 평생 잊지 못할 자신의 인생 좌우명을 질리에게 듣는답니다.
당신은 몇 년 동안이나 성악 공부를 하셨죠?
루치아노가 질리에게 물었을 때, 웃음띤 얼굴로 대답했어요.
지금 넌 내가 노래 공부하는 것을 들은 거란다. 난 오늘 해야 할 공부를 지금 막 마친 거고 말야.
공부란 항상, 평생 해야 되는 일이거든.
루치아노는 그렇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도 매일 공부한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주 유명해져서도 자신의 발전을 위해 계속 공부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답니다.
2장 가수가 되기 위해 학교 보조 선생, 보험 외판원을 하는 청년 루치아노
아버지, 서른 살이 될 때까지만 돌봐 주세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루치아노는 고민에 빠졌어요. 정말 노래를 직업으로 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하나 하는 문제에 맞닥뜨린 거였죠.
수학을 잘했던 루치아노는 수학 교수가 될까도 생각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할 형편은 아니었어요.
또 운동을 좋아하고 잘해 체육 강사가 되어 돈을 벌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고향을 떠나는 일이었어요.
그러나 이런 것은 사실 핑계에 지나지 않았어요. 루치아노는 정말 노래를 부르고 싶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가수가 되어 가족을 부양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루치아노뿐만 아니라, 부모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어요.
노래를 부르는 수천 명의 사람 중에서 오직 한 명 정도만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다.
네 목소리가 아름답다고는 해도 네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버지는 루치아노가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어요. 아버지 역시 한때 가수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러나 인생이란 긴 길을 갈 때는 누구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가야 할 때가 있어요.
루치아노에겐 바로 이 때가 그런 순간이었죠.
아버지! 제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만 저를 부양해 주세요. 만약 그 때까지 가수로서 성공하지 못하면 그 때는 제가 무슨 일을 해서라도 가족을 책임지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받아들이셨어요. 어머니요? 어머니는 루치아노의 노래 소리를 너무너무 좋아했던 분이었어요.
루치아노, 난 네 노래가 너무 좋아. 다시 한 번 불러 주렴.
아들이 노래 부르기를 아들만큼 간절히 바라고 계셨던 어머니였죠.
그런데 이 어머니는 훗날 루치아노가 큰 가수가 되어 무대에 섰을 때 한번도 극장을 찾아간 적이 없대요.
왜냐고요? 너무너무 가슴이 떨려서 차마 아들의 노래를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정말 어머니의 마음은 너무나 따듯하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끔찍해, 차라리 보험 외판원이 더 낫겠어
가수가 되는 것을 뒤늦게 허락한 아버지는 일단 허락하고 나자 가장 적극적으로 아들을 지원하셨어요.
그래서 고향인 모데나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고 폴라(작곡가, 지휘자, 교수) 선생님에게 아들을 데리고 갔죠.
이 때부터 루치아노는 비로소 가수가 되기 위한 정식 레슨을 받기 시작한 거예요. 스무 살의 나이에 말이에요.
아, 에, 이, 오, 우, ~ 아, 에, 이, 오, 우, ~
루치아노는 하루 종일 아에이오우를 발성했죠. 그리고 음계 공부, 발음 공부 등을 끊임없이 했어요. 루치아노는 이 수업이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대단한 고음을 갖고 있던 루치아노는 자신이 목소리를 어떻게 내느냐에 따라 새로운 소리가 나온다는 것에 대해 매우 신기해했고, 열심히 했어요.
루치아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는가 하면, 폴라 선생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예요.
난 루치아노를 처음 봤을 때부터 훌륭한 가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타고난 목소리가 훌륭했냐고요? 천만에요. 나는 루치아노처럼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물론 폴라 선생님도 각 음을 정확하게 내도록 맹훈련을 시키셨어요. 루치아노의 말에 따르면
미칠 것 같을 때까지지독하게 연습을 시켰다나요?
이즈음 루치아노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용돈은 1주일에 단돈 1달러밖에 되지 않았어요.
그러니 당연히 아르바이트를 했겠죠?
루치아노는 초등학교 보조 선생님으로 일을 했어요. 처음에는 학생들의 야외 활동을 돌봐 주는 일이었는데, 차츰 일이 늘어나 나중에는 국어(이탈리아어), 음악, 종교, 체육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쳐야 했죠. 이 중에서 특히 체육을 많이 가르쳤어요. 체육은 루치아노가 굉장히 좋아하는 과목인 거 다 알죠? 하루에 6시간씩 축구를 해도 지치지 않던 루치아노는 그나마 체육 수업이 가장 좋았다고 해요.
나는 애들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굉장히 거칠었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질러 댔어요.
정식 선생님이 아니었던 다른 선생님들처럼 권위있게 아이들을 야단치거나 할 수 없었어요.
제멋대로인 아이들…. 나는 때때로 그 작은 괴물들이 죽이고 싶을 만큼 밉기까지 했습니다. 하하하…. 하여간 2년간 그 일을 계속했는데 내겐 몸서리쳐지는 기억이에요.
우와, 정말 심하죠? 죽이고 싶을 정도라니! 하지만 난 짓궂은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정말 루치아노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나 봅니다.
자신의 용돈을 벌어서 써야 했던 루치아노는 다른 일거리를 찾았어요. 보험 영업을 하는 거였죠.
이 일은 루치아노가 일하던 학교에서 소개해 줘서 하게 됐는데, 루치아노는 의외로 이 일을 잘했어요.보험 영업이라는 것이 자기가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건데, 루치아노는 보조 선생님하고는 비교가 알 될 만큼 큰돈을 벌 수 있었어요.
하지만 루치아노는 돈을 많이 버는 그 일을 몇 달 하지 않고 그만뒀어요.
보험 증권을 팔려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목소리가 변해요. 그럼 노래를 할 수 없죠.
만약 20대의 루치아노가 보통 사람들처럼 가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접고 보험외판원으로 만족했다면 어땠을까요?
훗날 성공해서 큰 보험 회사 회장님이 되었다고 해도 루치아노는 두고두고 후회했겠죠? 아, 난 그 때 가수가 됐어야 했어.하고 말이에요.
3장 드디어 가수로 데뷔, 나 루치아노 파바로티예요
첫 오페라 무대에 설 때 난 미친 사람처럼 그 역에 빠져들었어
그냥 가수가 아닌 오페라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미친 듯 노래 공부에 열정을 쏟아붓던 루치아노가 드디어 가수로 데뷔했어요.
아낄레 페리콩쿠르. 이 대회에 나가 1등을 한 거예요.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포 역을 맡아 공연을 하게 됐어요. 1961년 27세 때였죠.
(아 참, 알아 두세요. <라 보엠>의 로돌포 역은 루치아노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에 아주 적합한 역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도 아주 좋아하는 역이랍니다. 물론 세계의 음악팬들도 그가 부르는 그대의 찬 손등을 최고로 생각하고 있죠.)
로돌포 역을 맡아 처음 오페라 무대에 서게 된 루치아노. 어땠을 거 같아요? 짐작이 가죠?
루치아노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그 일에 빠져들었대요. 공연은 정말 성공적이었어요. 그러나 무대 뒤에서 만난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어요.
루치아노, 정말 잘했어. 하지만 아직 질리나 스키파 같지는 않구나. 더 노력해야 돼. 알았지?
루치아노의 아버지 페르난도는 무조건 찬사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마땅한 비판과 격려를 해 주는 분이셨어요.
루치아노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963년 영국의 런던 코벤트 가든 왕립극장에서 <라 보엠>을 공연하면서부터였어요.
사실 오페라 가수가 유명해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 즉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 영국의 <코벤트 가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등 세계 주요 극장에 서야만 비로소 유명해질 수 있어요. 그러나 이 때 유명해진다는 것은 일부 오페라 관계자들과 팬들에게죠.
대중가수들처럼 텔레비전에 자주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대중적인 유명세와는 많이 다르답니다.
그런데 루치아노는 1965년 <라 스칼라>에서의 첫 출연 섭외는 거절했답니다. 루치아노가 얼마나 간절히 그 무대에 서고 싶어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런데 왜 거절했을까요?
그 때 내게 주어진 배역은 로시니의 <윌리엄 텔>이었어요. 그러나 그 역을 맡아 노래를 했다면 아마 난 다시는 테너로서 노래를 부르지 못했을 거예요.
저마다 자기에게 맞는 목소리가 있는데, 그 당시에는 제 목소리가 그 역을 소화해 낼 수 없었거든요.
주변의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권했지만, 루치아노는 스스로를 잘 알고 거절했지요.
노래를 잘 모르는 우리들로서는 좀 이해가 안 되죠? 아니, 그렇게 도전 정신이 없단 말야?하고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성악은 그렇게 모험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해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를 다치지 않을 정도에서 노래를 불러야 한답니다. 모험을 하다보면 자칫 진짜 아름다운 자신의 목소리가 파괴되기 때문이죠.
따라서 아무리 욕심이 나는 무대라고 해도 거절할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정확히 알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한 정말 큰 결단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어떻게 지치지 않고 노래를 할 수 있지? 동료인 소프라노 존 서덜랜드에게 한수 배웠어
1965년 <라 스칼라> 극장, 1968년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공연을 함으로써 루치아노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스타가 됐어요. 결국 그가 그토록 원하던 오페라 가수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세계 무대에 서는 가수가 됐다고 해서 그의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존 서덜랜드는 아마도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굉장히 어려운 음악들을 꽉 짜여진 틀 속에서 매일 밤 공연을 하는데도 지친 내색을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그 방법을 물어 봤어요.
서덜랜드는 평생 누구를 가르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서덜랜드의 노래 기법에 찬사를 보내고, 서덜랜드의 발성법이나 숩쉬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서덜랜드의 배에 손을 대 보는 등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서덜랜드가 감동을 받았어요. 이미 성공한 가수였지만 배우는 자세를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았던 거죠.
서덜랜드를 통해 아랫배를 올바로 사용하는 법, 건강하게 목소리를 유지하는 법 등을 익힌 루치아노는 다음 공연에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잘했답니다.
이때 루치아노가 얼마나 연습했는지 아세요? 그 스스로 죽음을 무릅쓴 노래 연습이라고 말해요. 그러니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짐작이 되죠.
내가 노래를 그만두기 전까지는 난 계속 공부하고 또 배우기를 원합니다. 전 지금도 배우려고 합니다. 물론 나는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그러나 재능은 50%이고, 나머지 50%는 철저한 노력에서 비롯됐습니다.
4장 비행기 사고로 죽을 뻔한 후 아, 그래! 다시 최선을 다하자!
5장 전쟁은 싫어요노래를 통한 평화의 사도 루치아노
루치아노는 1993년 이래 매년 고향인 이탈리아 모데나에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 콘서트>를 열고 있어요. 이 공연은 <파바로티와 친구들>이 함께 공연하는데, 이 <친구들>이란 스팅, 주케로, 에릭 클립튼 등 세계적인 팝 가수들이에요.
오페라 성악가와 팝 가수들과의 만남~. 연주회를 직접 보지 않아도 얼마나 멋진지 알 수 있겠죠. 루치아노는 오페라 가수지만, 이들과도 너무너무 친하게 지낸답니다. 만일클래식은 따분해.라고 루치아노의 노래를 듣기 부담스러운 친구들이라면 바로 이 파바로티와 치구들이란 음반을 들어 보세요.
<파바로티와 친구들> 콘서트의 수익금은 전부 전쟁고아재단에 보낸답니다. 뿐만 아니라, 1997년에는 아예 <파바로티 음악원>을 설립해 전쟁 고아들을 위한 복지사업을 펼치고 있어요.
이처럼 파바로티가 평화의 사도로 나서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전쟁의 상처 때문이었어요. 그가 태어난 1935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였고,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 전쟁은 끝나지 않았거든요.
나는 매일 밤마다 총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어야 했어요.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체, 그리고 독일군에게 끌려가 며칠간 돌아오지 않던 아버지…. 그 구역질나도록 끔찍한 전쟁을 통해 난 금세 어른이 되어 버린 기분이었죠.
그러나 지금도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루치아노는 이 전쟁이 수많은 전쟁 고아들을 만들어 내고, 그들에게 더없이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이것이 루치아노가 전쟁 고아들을 위한 콘서트를 열고, 평화의 사도가 된 계기예요.
지난 2000년 6월 30일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루치아노의 <평화의 콘서트>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열렸어요. 남북한 정상회담도 이루어지고, 이제 이산가족도 오고 간다고 하니 루치아노의 아름다운 평화의 노래처럼 우리나라에도 평화가 오길 기다려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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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때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못 부르겠죠?
평생 노래를 하고, 그 노래를 이제 세계 평화를 위해 바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노래도 세계 캡, 마음 씀씀이도 세계 캡! 파바로티 할아버지,
박스 1
녹음은 정말 안 하고 싶어
노래를 듣는 사람이 있어야 노래할 맛이 나요
내겐 노래할 때 청중이 필요합니다. 노래를 듣는 사람이 있어야 신이 나죠. 나는 박수 없이 살아갈 수 없어요. 갈채야말로 내가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내가 객석이 없는 스튜디오에서 혼자 노래를 할 때는 흥이 나겠어요?
그래서 녹음할 때면 조명을 모두 끈 채 나에게만 조명을 비추게 해요. 마치 무대에서 노래하듯 말입니다. 어둠 속이 객석이라고 생각하면 무대에 있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잘 된다고 볼 수는 없어요. 아무튼 나는 무대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박스2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이상한 습관
1. 하얀 손수건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해
이젠 루치아노 파바로티 하면 하얀 손수건을 떠올릴 만큼 손수건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그는 공연 도중 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기도 하고,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기도 한다. 루치아노는 공연을 하기 직전 항상 잘 다려진 흰 손수건을 꼭 챙긴다. 만일 손수건이 없다면? 그야 그때부터 안절부절못하지!
근데 다른 사람들은 손수건 없이도 노래를 잘만 부르는데 왜 루치아노는 노래 부를 때 손수건이 꼭 필요한 것일까?
오래 전 일입니다만 친구의 콘서트에 간 적이 있었어요. 근데 내 친구가 아리아를 부르면서 동작을 지나치게 크게 하면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보였어요. 나도 무대에 서면 저럴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까,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해야만 했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손수건이었습니다. 손수건을 갖고 있다면 적당히 포즈를 취한 채 여유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루치아노는 흰 손수건이 있어야 무대에서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한다. 흰 손수건은 콘서트 무대에서 그를 지켜 주는 수호신이라고나 할까?
2. 무대로 나가기 직전 못을 찾아 두리번두리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무대에 나가기 전 부러지거나 구부러진 못을 찾아 무대 뒤를 두리번거린다. 구부러지거나 부러진 못은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이탈리아 미신 때문이다. (우와~! 루치아노 같은 대성악가가 미신을 믿는단 말이에요?)
사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아무리 세계적인 가수라고 해도 항상 떨린다고 한다. 루치아노는 무대 앞으로 나가기 직전내가 이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고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나가야 하다니…하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자칫해서 고음처리를 잘못해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면 이내 비난이 쏟아질 테니까.
그러나 언제부턴가 루치아노는 더 이상 못을 찾아 헤매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 글쎄, 그 습관이 알려지면서 일부러 무대에 못을 떨어뜨려 놓는다거나, 세계 각국의 팬들이 금으로 만든 못 등 수많은 못을 보내오는 바람에 더는 못에 대한 미신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
박스 3
루치아노의 지상 레슨/가수의 성공 조건 3
1. 체력과 호흡 : 좋은 목소리는 훌륭한 신체에서 나온다. 따라서 건강한 신체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횡격막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자연스런 소리, 그 소리를 적절한 호흡법을 통해 낼 때 절묘한 아름다운 소리가 나온다.
2. 집중력 : 자신이 맡은 역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노래해야 한다. 노래를 부르면서 내 음색이 괜찮을까, 청중들은 지금 내 노래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면서 노래를 부른다면, 제아무리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가수라고 해도 감동적인 노래를 부를 수 없다.
3. 발음 : 노래를 듣는 사람은 그 노래의 가사를 듣는 것이다. 따라서 가수는 가사를 정확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발음에 대해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아도 될 때까지 계속해서.
박스 3
오페라 이야기
자코모 푸치니의 <라 보엠>
음악을 듣는 것은 맨처음에는 음율이 좋아서 듣게 됩니다. 그런데, 음율을 듣다보면 대체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래서 가사를 새겨듣게 되죠. 오페라는 아름다운 아리아만으로 듣기에는 조금 무리입니다. 한편의 노래극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어떤 이야기인지 들으면 이해가 훨씬 더 쉽답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가장 좋아하는 오페라 중 하나인 <라 보엠> 이야기를 해볼까요? 아주 간단하게 말예요. ^-^
가난한 시인 로돌프와 옆집의 아름다운 재봉사 미미가 사랑에 빠지지만, 사소한 오해로 두 사람은 헤어지죠. 그런데 미미가 폐병으로 죽어 가면서 로돌프를 찾아요. 뒤늦게 사랑하는 미미에게로 달려온 미미. 그러나 잠시 잠든 줄만 알았던 미미는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답니다. 죽은 미미를 끌어안고 절규하는 로돌프의 노래를 들을 때는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몰라요.
로돌프가 미미를 처음 만나 첫눈에 반해 부르는 그대의 찬 손은 가난하지만 마음은백만장자라고 큰소리치는 내용인데요, 정말정말 아름다운 곡이랍니다. 바로 파바로티가 가장 좋아하고 잘 한다는 곡이죠.
박스 4
공연 뒷이야기
공연장에서의 에티켓은 지킵시다!
잠실 주경기장 루치아노 파바로티 공연장에는 무려 5만여 명의 관중이 모였답니다. 6월30일 더운 날이었죠. 6시쯤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공연이 시작된 것은 8시 30분이습니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된 후에도 어떤 사람들은 운동장을 마치 아파트 뒷길 걷듯 어슬렁 거렸고요, 핸드폰 소리가 울리고 심지어는 통화까지 했답니다. 뿐만 아니에요.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앵콜송을 할 때 갑자기 박수를 치면서 장단을 맞추는 바람에 파바로티가 장단을 맞추지 말라고 표시를 했답니다.
그런데, 객석에 앉아 있던 기자 누나가 정말 머리 뚜껑이 열리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세상에! 양복을 쏙 빼입은 아저씨가 파바로티가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지 뭐에요. 공연장에서의 예절. 꼭 일일이 말해 줘야 아나요? 쨍이 친구들은 절대 이런 일 없겠죠?
박스 5 파바로티의 음반들
파바로티 노래를 듣고 싶어요!
1. 전쟁고아재단이 옛 유고슬라비아의 모스타르 시에 세우는 음악센터를 돕기 위한 공연 앨범으로 1996년 녹음됐다. 쨍이 친구들, 파바로티 노래도 듣고, 전쟁 고아도 돕고 싶다면 이 음반을 들어보세요~!
2. 파바로티를 대표하는 주옥 같은 오페라 아리아들이 그의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담겨져 있는 대표적인 앨범. 1967년부터 1969년 사이에 그의 어릴 적 친구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나와 함께 한 공연 녹음을 2000년 BMG에서 다시 엮어 내놓았다
3. <파바로티와 친구들> 제2집. 함께 노래하는 팝 가수 브라이언 아담스는 이 음반에서 오페라 아리아를 너무나 멋지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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