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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원효(元曉) 지음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해제
“무량수경종요”은 “무량수경”의 주석으로 “아미타경(阿彌陀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과 함께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이라고 한다.
원효는 “무량수경종요”외에도 많은 정토사상(淨土思想)이 담겨진 경전들을 주석했다.
현존하는 것으로도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과 “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과 그리고 본 종요(宗要)이다.
소실된 것까지는 10여 종이나 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정토사상에 대한 원효의 관심도와 신라시대에 있어서 정토사상의 유행 정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본 종요는 1) 대의(大意) 2) 종치(宗致) 3) 의혹중생(疑惑衆生) 4) 해석(解釋)으로 나누어 설명하여 원효의 정토사상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본 종요의 끝부분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토(淨土)와 예토(穢土)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효의 사상은 여기에서 일관되고 있다.
“무량수경”에 설해지고 있는 삼배인(三輩人)의 왕생인(往生因)을 행(行)과 원(願)의 화합으로 이해하고 다시 그 행을 정인(正因)과 조인(助因)으로 나누어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정인으로 하고 십념을 조인(助因)으로 삼았다.
이 십념에는 누구나 행하기 쉬운 명칭의 십념과 행하기 어려운 “미륵소문경(彌勒所問經)”의 십념 등 두 가지 내용을 설명한 것과 신라 정토사상의 독특한 기틀을 잡아 놓게 했다.
나아가서 일상생활의 여러 가지 선행(善行)도 또한 조인으로 본 것은 불교신앙의 생활화를 지향한 불교의 대중화를 전개한 원효의 입장을 알 수 있다.
한편 정성성문(定性聲聞)이라도 부처님의 본래의 원력에 의해서 왕생할 수 있다고 역설한 것은 그의 견해와 깊은 신심이 아닐 수 없다.
한결같이 중생의 심성은 만법의 근본으로서 융통무애(融通無碍)하여 허공과 같고 심오하기 거대한 바다와 같으며,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며 정토와 예토의 두 극단이 없다고 주장하여 새로운 정토관(淨土觀)을 수립하였다.
※ 아래는 퍼온글입니다. 출처를 밝혀야 되는데 어딘지 기억이 안납니다. 참고하시라고 붙였습니다.
무량수경종요는 전체 4단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첫째는 大意,
둘째는 宗致,
셋째는 人分別,
넷째는 文解釋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文解釋은 현재 포함되어 있지않는 것으로 보아서 無量壽經疏를 말하는 것 같다.
첫째 大意에서는 원효 특유의 一心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一心이란 起信論 의 一心二門을 말하고 있다.
즉 일심은 바로 衆生心이며, 이는 緣起法이며 如來藏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논리는 원효의 대부분의 저술에서 나타나고 있다.
서두에서 중생의 心性은 원통무애하여 큰 허공과 같고,
깊은 바다와 같아 그 체가 평등하여 분별할 상이 없으므로 따로이 정토와 예토를 구분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緣을 따라 거역하지 않으므로 동과 정이 있고,
번뇌에 의해 오탁악세에 빠져 고통스러운 사바세계를 오래도록 流轉 하기도 하며,
혹은 선근을 이어받아 四流를 끊어 돌아오지 않고 피안에 이르러 오래도록 寂靜에 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동과 적정은 모두 큰 꿈과 같은 것이다.
깨달음에는 此岸과 彼岸이 따로 없고 예토와 정토가 본래 一心이며,
생사와 열반이 결국 二際가 아니다.
그런데 大覺의 근원으로 돌아가려면 공덕을 쌓아야 하지만 流轉하여 긴 꿈을 따르고 있어서 갑자기 열기가 어렵다.
성인의 발자취를 따름에는 멀고 가까움이 있으며,
가르침을 설함에는 칭찬하고 폄하함이 있다.
석가여래께서는 사바세계에 오시어 오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하였으며,
아미타여래께서는 극락세계로 三輩衆生들을 인도하시니 이러한 방편의 자취는 이루 말로써 다할 수 없도다. 라고 한다.
이와 같은 서두는 원효의 저술에 있어서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논리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문제로 삼고 있는 극락세계의 존재나 혹은 왕생의 문제를 깨달은 입장에서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의 입장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는 깨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이 얼마나 믿고 따르느냐에 따라서 있고 없음을 말하고 있다.
즉 본체론적인 입장에서는 사바와 극락,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으나 연기론적인 입장에서는 모두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能隨緣而不逆'이라고 하였다.
즉 능히 연을 따라서 거역하지 않는다고 함이다.
이는 바로 연기법을 따라서 법을 거역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大意에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있으며 이를 一心論으로 이해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一心이란 衆生心이므로 원효는 극락세계와 왕생에 대한 설명을 연기론적으로 전개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宗致에서는 총괄하여 정토의 果德과 因行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果德으로는 淨不淨門, 色無色門, 共不共門, 漏無漏門으로 나누면서 이를 네 가지의 相對로 설명하고 있다.
즉 因與果相對, 一向與不一向相對, 純與雜相對, 正定與非正定相對로 설하면서 이는 모두 중생의 自力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여래의 行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정토에 대한 견해를 自受用土와 他受用土로 밝히면서 無量壽經에서 설하는 정토는 正定與非正定相對의 淨土라고 한다.
淨土의 因行으로는 직접적인 正因과 보조적인 助因으로 나누고 정인은 發菩提心이며,
十念과 제공덕은 모두 助因으로 보고 있음이 특징이다.
그러면서 왕생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래의 本願力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즉 여래의 본원력을 믿는 것이 발보리심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의 본원력을 믿지 않으면 왕생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끝으로 人分別에서는 三聚衆生과 四疑衆生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삼취중생에 대해서는 『無量壽經』의 제11원에서 설하고 있다.
그런데 원효는 正定聚만이 왕생이 가능하며 이를 本性正定聚와 習成正定聚로 구분하고 있다.
또 본성정정취는 菩薩種性인데 반하여 習成正定聚는 不定聚衆生도 如來種性位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不定聚와 邪定聚도 신심을 성취하고 발심하면 정정취로 변화할 수 있다고 하여 정정취 이외의 중생들의 왕생도 가능함을 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정취의 지위를 初發心住 이상이라고 함으로써 신라 정토가들 중에서 왕생의 계위에 있어서는 최하위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많은 중생들의 왕생을 가능케 하기 위함일 것이다.
四疑衆生으로는 의혹경계를 말하면서 『無量壽經』의 佛五智를 인용하고 있다.
이 중 佛智와 四智로 구분하여 四智를 의혹하는 중생을 四種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佛本願力과 佛四智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본서에서 가장 믿음을 강조하는 부분이 이곳이며,
원효의 信觀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兩卷無量壽經宗要
원효(元曉) 지음
釋元曉選
경의 뜻을 밝히기 위하여 대략 사문(四門)으로 나누어 분별하면,
첫째는 교(敎)의 대의를 서술하는 것이요,
둘째는 경의 종치(宗致)를 분별하는 것이며,
셋째는 사람을 들어 분별하는 것이요,
넷째는 글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다.
將申兩卷經旨 略開四門分別 初述敎之大意 次簡經之宗致 三者擧人分別 四者就文解釋
1. 대의(大意)를 서술함
言大意者
중생들의 심성(心性)은 융통하여 걸림이 없어서 크기는 허공과 같고 깊기는 큰 바다와 같다.
허공과 같기 때문에 그 본체는 평등하여 차별의 모양을 얻을 수 없으니 어찌 깨끗하고 더러운 곳이 있겠으며, 큰 바다와 같기 때문에 그 본성은 윤활(潤滑)하여 인연을 따라 거스리지 않으니 어찌 움직이고 고요한 때가 없겠는가.
그러므로 혹은 티끌에 의해, 5탁(濁)에 빠져 그를 따라 헤매고 고통의 물결에 잠겨 길이 흐르며, 혹은 선근을 받들어 4류(流)를 끊어 돌아오지 않고 저 언덕에 이르러 영원히 고요하다.
만일 이 움직이고 고요함이 모두 큰 꿈이라면 깨닫고 나서는 피차(彼此)가 없을 것이며,
더럽고 깨끗한 국토가 본래 한 마음이라서 생사와 열반이 마침내 둘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근원으로 돌아가 크게 깨닫는다는 것은 많은 공을 쌓아야 비로소 얻을 수 있고,
흐름을 따르는 긴 꿈은 담박에 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으로서 자취를 드리우는 것은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며, 그 베푸신 가르침은 포상하기도 하고 혹은 혐하 하기도 하는 것이다.
더구나 석가세존께서는 이 사바세계에 나타나시어, 5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하셨으며, 미타여래께서는 저 안양(安養)을 다스리시어, 3배(輩)를 이끌고 중생을 인도하셨으니, 이런 방편의 자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 四流 - 사폭류(四瀑流) : 번뇌가 내심(內心)의 선(善)한 성질을 씻어 흘러버리는 것이 폭류와 같으므로 폭류를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쓴다.
따라서 네 가지 번뇌란 욕(欲), 유(有), 견(見), 무명번뇌(無明煩惱)이다.
* 安養 - 아미타불의 정토인 극락 세계의 이칭(異稱).
* 三輩 - 사람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무량수경에 아미타불의 정토(淨土)에 왕생하는 사람을 행(行)의 심천(深淺)에 따라 셋으로 나누고 있음.
1) 욕망을 버리고 사문이 되어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어 열심히 무량수불을 염하는 사람.
2) 크게 공덕을 닦을 수는 없으나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어 사문이 되어서 열심히 무량수불을 염하는 사람으로 다소 선을 닦는다.
3) 깨달음을 구하려는 마음을 내어 무량수불을 염하는 사람, 이는 사문이 아니다.
然夫衆生心性融通無? 泰若虛空 湛猶巨海
若虛空故其體平等無別相而可得 何有淨穢之處 猶巨海故其性潤滑能隨緣而不逆 豈無動靜之時
爾乃或因塵風淪五濁而隨轉 沈苦浪而長流 或承善根截四流而不還 至彼岸而永寂
若斯動寂皆是大夢 以覺言之無此無彼 穢土淨國本來一心 生死涅槃終無二際
然歸原大覺積功乃得 隨流長夢不可頓開
所以聖人垂跡有遐有邇 所設言敎或褒或貶
至如牟尼世尊現此娑婆誡五惡而勸善彌陀如來御彼安養引三輩而導生 斯等權跡不可具陳矣
지금의 이 경은 보살장(菩薩藏)의 가르침 가운데 모범된 말씀과 불토(佛土) 인과의 참된 말씀을 싣고 있고 비밀하고 깊은 원행을 밝히고 길고 먼 불과의 덕(德)을 나타내었으며,
열여덟 가지 원정(圓淨)은 삼계를 아득히 멀리 뛰어넘었으며, 5근(根)의 상호(相好)는 육욕천(六欲天)을 흉내내어 이어받을 수 없다.
보배로운 법의 맛으로 몸과 마음을 마음껏 기르는데, 어느 누가 아침에 주리고 밤에 목마른 고통이 있겠으며, 옥림(玉林)의 향기로운 바람은 따뜻하고 시원함이 항상 잘 맞추어 본래부터 겨울의 추위와 여름 더위의 번거로움이 없다.
뭇 신선이 함께 모여 때때로 여덟 가지 덕(德)을 갖춘 연못에 목욕하매 이로 말미암아 못내 얄미운 호추(皓皺)를 떠나고, 훌륭한 벗이 서로 좇아 시방의 불토에 자주 노닐므로, 거기서 위로하기 어려운 일을 멀리 보내거늘, 하물며 법의 메아리를 듣고 무상(無相)에 들어가고, 부처님의 광명을 보고 무생(無生)을 깨침이겠는가.
무생을 깨치기 때문에 나지 않는 곳이 없고 무상에 들어갔기 때문에 모양으로 나타내지 못할 것이 없다.
지극히 깨끗하고 지극히 즐거우매 마음으로 헤아릴 것이 아니요, 끝이 없고 한이 없거니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만 말할 수 있는 다섯 사람 가운데 부처님이 우두머리이시며 의, 정(依, 正)의 2보(報)안에서 오래 사는 주인이기 때문에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이라 한 것이다.
만일 한 권으로는 마음을 열기에 부족할 것이요,
만일 세 권이라면 양 손이 들고도 남는데, 지금 이 경은 상, 하 두 권이어서 모자라지도 않고 남지도 않아 손에 들고 소중히 간직하기에 알맞다.
또한 이것은 상권이기 때문에 불설무량수경 상권이라 하는 것이다.
* 皓皺 - 덧없이 늙어 얼굴에 주름살만 생긴 모양. 즉 세월을 허송하는 것에 비김.
今此經者蓋是菩薩藏敎之格言 佛土因果之眞典也 明願行之密深 現果德之長遠 十八圓淨越三界而?絶 五根相好?六天而不嗣
珍著法味遂養身心 誰有朝餓夜渴之苦 玉林芳風溫?常適本無冬寒夏熱之煩
群仙共會時浴八德蓮池 由是長別偏可厭之皓皺 勝侶相從數遊十方佛土 於?遠送以難★之憂勞 況復聞法響入無相 見佛光悟無生
悟無生故無所不生 入無相故無所不相
極淨極樂 非心意之所度 無際無限 豈言說之能盡 但以能說五人之中佛爲上首 依正二報之內長命爲主 故言佛說無量壽經
設其一軸不足開心 若至其三有餘兩掌 今此經者有上有下 無缺無餘 適爲掌珍
言之卷上 故言道佛說無量壽經卷上
2. 종취(宗趣)를 분별함
第二簡宗致者
이 경은 바로 정토(淨土)의 인과를 그 종체(宗體)로 삼고, 중생을 거두어 왕생(往生)하는 것을 그 의치(意致)로 삼는데, 통틀어 말하면 그렇다 하더라도 따로 분별하면 먼저는 과덕(果德)을 밝히고 뒤에는 인행(因行)을 나타낸 것이다.
此經正以淨土因果爲其宗體 攝物往生以爲意致 總標雖然於中分別者 先明果德後顯因行
1) 과덕(果德)을 밝힘
과덕의 안에는 대략 사문(四門)이 있으니,
첫째는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은 문이요,
둘째는 색(色)이 있고 색이 없는 문이며,
셋째는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문이요,
넷째는 누(漏)가 있고 누가 없는 문이다.
果德之內略有四門 一淨不淨門 二色無色門 三共不共門 四漏無漏門
(1)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은 문을 밝힘.
第一明淨不淨門者
대략 4대(對)로써 그 등급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것은 인과 과가 상대하기 때문이요,
한결같고 한결같지 않은 것이 상대하기 때문이며, 순수함과 뒤섞임이 상대하기 때문이요,
정정(正定)과 정정 아닌 것이 상대하기 때문이다.
略以四對顯其階降 謂因與果相對故 一向與不一向相對故 純與雜相對故 正定與非正定相對故
첫째, 인과 과가 상대함이란 이른바 금강 이하 보살의 머무르는 곳을 과보토(果報土)라고 하고 정토(淨土)라고 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고제(苦諦)의 과환(果患)을 여의지 못했기 때문이며, 오직 부처님이 사는 곳만을 정토라고 하나니 그것은 일체의 수고와 근심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인왕경(仁王經)”에서 “삼현(三賢), 십성(十聖)은 과보에 머무르고 오직 부처님 혼자만이 정토에 사시며, 일체 중생은 잠깐 보토에 머무르다가 금강이 근원에 올라서야 정토에 산다”고 하였다.
* 三賢 - 수행의 계위(階位)로 소승과 대승으로 구분하여 소승에서는 열반의 증과(證課)를 얻지 못한 삼내범위(三內凡位)와 사내범위(四內凡位)를 일컬음. 대승에서는 십지(十地)에 이르기 전인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위를 일컬으며 십신(十信)이 외범위(外凡位)인 반면 이를 내범위(內凡位)라 함.
* 十聖 - “화엄경”, “인왕반야경”, “금강명경”등에서 말하는 보살의 수행과정에서 52위(位)와 법계(法階) 가운데 제41위에서 제50위까지에 이르는 십지(十地)보살을 가리키는 말. 보살이 이 위(位)에 이르러 비로소 무루지(無漏智)을 얻어 불성(佛性)을 사무쳐 보고 불지(佛地)를 갖추는 한편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을 성취하므로 이렇게 이름.
所言因與果相對門者 謂金剛以還菩薩所住名果報土不名淨土 未離苦諦之果患故 唯佛所居乃名淨土 一切勞患無餘滅故
依此義故仁王經云 三賢十聖住果報 唯佛一人居淨土 一切衆生暫住報 登金剛源居淨土
둘째, 한결같고 한결같지 않은 것의 상대하는 문이란,
이른바 8지(地) 이상 보살이 머무는 곳을 정토라고 하는 것이니 그것은 한결 같이 삼계의 일을 벗어났기 때문이며, 또 4구(句)의 한결같은 뜻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지 이하의 머무는 곳을 정토라고 하지 않나니, 그것은 한결같이 삼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혹은 원력(願力)을 타고 삼계를 벗어난 사람은 한결같은 4구,
즉 한결같은 깨끗함,
한결같은 즐거움,
한결같이 잃지 않음,
한결같은 자재함 등을 두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7지 이하의 보살이 관(觀)에서 나올 때에는 때로는 과보로서의 무기(無記)의 마음이 일어나고 말나(末那)의 4혹(惑)이 그 때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한결같은 깨끗함이 아니요 한결같은 잃지 않음이 아니다.
그러나 8지 이상은 그렇지 않으니 이런 뜻에서 저 “섭대승론(攝大乘論)”에 말하기를 “출세(出世)의 선법(善法)을 벗어나는 것은 공능(功能)에서 생긴 것이다” 라고 하였으며, 그 해석에 “2승의 선법을 출세(出世)라 하고 8지에서 불지(佛地)까지를 출세간을 벗어난다 하나니 출세의 법을 세법과 대치(對治)하는 것이라 하며, 출세법을 벗어난 것을 출세법을 대치하는 것이라 한다.
공능은 4연(緣)으로 상(相)을 삼나니 출세의 선법을 뛰어난 공능으로부터 이 정토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은 집제(集諦)로 인을 삼지 않는다…(이하 생략)…” 하였다.
第二一向與不一向相對門者 謂八地以上菩薩住處 得名淨土 以一向出三界事故 亦具四句一向義故
七地以還一切住處 未名淨土 以非一向出三界故 或乘願力出三界者 一向四句不具足故 謂一向樂 一向無失 一向自在
七地以還出觀之時 或時生起報無記心 末那四惑于時現行 故非一向淨 非一向無失
八地以上卽不如是 依此義故 攝大乘云 出出世善法 功能所生起 釋曰 二乘善名出世 從八地以上 乃至佛地 名出出世 出世法 名世法對治 出出世法 爲出世法對治 功能以四緣爲相 從出出世善法功能 生起此淨土故 不以集諦爲因 乃至廣說故
셋째, 순수함과 뒤섞임이 상대하는 문이란, 이른바 범부와 2승이 섞여 사는 곳을 청정한 세계라고 하지 않고 오직 대지(大地)에 들어간 보살이 나는 곳만을 비로소 청정한 세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니, 저것은 순정(純淨)하지 못하고 이것은 순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뜻에서 저 “유가론”에, “세계는 무량한데 거기에는 청정한 것과 청정하지 않은 두 가지가 있다.
청정한 세계에는 나락가(那洛迦 : 지옥), 방생 (傍生 : 축생), 아귀가 없고 또 욕계, 색계, 무색계도 없이 순수하게 보살에만 머무르기 때문에 청정한 세계라 한다.
제3지에 들어간 보살은 원력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생을 받으며, 범부도 없고 범부가 아닌 성문, 독각도 없으며, 범부가 아닌 보살만이 거기서 난다”고 하였다.
그 해석에 “이 제3지는 곧 환희지(歡喜地)이니 일곱 가지 보살지의 문에서 제 3의 정승의락지(淨勝意樂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3위를 거두어 칠종의 지(地)를 세우는데 자세한 것은 저 논에서 말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第三純與雜相對門者 凡夫二乘雜居之處 不得名爲淸淨世界 唯入大地菩薩生處 乃得名爲淸淨世界 彼非純淨 此純淨故
依此義故 瑜伽論言 世界無量 有其二種 謂淨不淨 淸淨世界中 無那落迦 傍生餓鬼 亦無欲界色無色界 純菩薩衆於中止住 是故說名淸淨世界 已入第三地菩薩 由願力故 於彼受生 無有異生及非異生聲聞獨覺 若非異生菩薩得生於彼
解云 此第三地是歡喜地 以就七種菩薩地門 第三淨勝意樂地故 攝十三位 立七種地 具如彼論之所說故
넷째, 정정과 정정 아닌 것이 상대하는 문이란, 이른바 3취(趣) 중생들이 괴롭게 나는 곳을 예토(穢土)라고 하고 오직 정정취(正定趣)만이 사는 곳을 정토라고 한다.
그러나 거기에도 4과(果) 성문이 있고 나아가서는 또 4의(疑) 범부도 있지만 오직 사정(邪定)과 부정취(不正聚)만은 없다.
지금 이 경에서 말하는 무량수국(無量壽國)은 제4문의 정토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대소(大小)를 두루 용납하고 범부와 성인을 아울러 인도하여, 모두 훌륭한 곳에 나고 다 같이 대도(大道)로 나아가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아래의 글에서 “설사 내가 부처가 되더라도 이 나라의 인민들이 정정취에 머물러 반드시 멸도(滅度)에 이르지 않는다면 나는 정각(正覺)을 취하지 않으리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말하기를 “설사 내가 부처가 되더라도 이 나라 성문들을 세어 그 수를 다 알 수 있다면 나는 정각을 취하지 않으리라…(이하 생략)…”고 한 것과 같다.
또, “관경(觀經)”에서 말하기를 “그 나라에 태어나서는 아라한과 등을 얻는다” 라고 하였으며,
저 논에서는 “여자와 불구자와 2승의 종성은 거기 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은, 결정된 종성의 2승을 말한 것이요 결정 되지 않은 근성의 성문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2승의 종성이라 한 것이니, 이런 이치로 그것은 서로 틀리는 것이 아니다.
또 여자와 불구자라 한 것은 그를 낳을 때에 여자도 아니고 불구자도 아님을 말했을 뿐이요,
그런 여자들은 왕생(往生)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니, 그것은 저 위제희(韋提希) 부인이 왕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음왕다라니경(鼓音王陀羅尼經)”에는 “아미타불의 아버지의 이름은 월상전륜성왕(月上轉輪聖王)이요, 그 어머니의 이름은 수승묘안(殊勝妙眼)이다…(이하 생략)…” 하였으니, 이것은 화불(化佛)이 사는 화토(化土)를 말한 것이며,
논에서 말한 것은 곧 수용토(受用土)이다. 이런 이치로 그것은 서로 틀리는 것이 아니다.
* 四果 - 소승에 있어서 깨달음의 결과를 넷으로 나누는데 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무학과(無學果)이다.
* 韋提希 - 석존 당시 마갈타국 빈바사라(頻婆沙羅)왕의 왕후. 사유(思惟), 승묘신(勝妙身)이라 번역.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중심인물로 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을 보고 확연히 깨달아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이루었음.
* 化佛 - 불타의 참모습은 중생이 볼 수 없으므로 변화하여 나타내 보이는 변화신(變化身). 수행이 높은 이를 위해 나타나는 몸을 응신(應身), 수행이 낮은 이를 위해 나타나는 몸을 화신(化身)이라 함.
第四正定與非正定相對門者 三聚衆生苦生之地 是爲穢土 唯正定聚所居之處 名爲淨土
於中亦有四果聲聞 乃至復有四疑凡夫 唯無邪定及不定聚耳
今此經說無量壽國 就第四門說爲淨土
所以然者 爲欲普容大小 兼引凡聖 ?生勝處 同趣大道故
如下文言 設我得佛 國中人民 不住正定聚必至滅度者 不取正覺
又言 設我得佛 國中聲聞 有能計量知其數者 不取正覺 乃至廣說
又觀經中說 生彼國已 得羅漢果等 乃至廣說故
論說云 女人及根缺 二乘種不生者 是說決定種性二乘 非謂不定根性聲聞
爲簡此故 名二乘種 由是義故 不相違也
又言女人及根缺者 謂生彼時 非女非根缺耳 非此女等不得往生 如韋提希而得生故
然鼓音王陀羅尼經云 阿彌陀佛 父名月上轉輪聖王 其母名曰殊勝妙眼等 乃至廣說者 是說化佛所居化土 論所說者 是受用土 由是道理 故不相違
위의 네 문에서 말한 정토는 다 여래의 원행(願行)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곳에 왕생한 이의 자력(自力)으로 마련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저 예토의 외기(外器) 세계가 오직 중생들의 공업(共業)으로 이루어진 것과는 같지 않으니, 그러므로 통틀어 청정 국토라고 한다.
上來四門 所說淨土 皆是如來願行所成 非生彼者自力所辨
不如穢土外器世界 唯由衆生共業所成 是故通名淸淨土也
(2) 색이 있고 색이 없는 문을 밝힘
次第二 明有色無色門者
앞에서 말한 네 문 가운데서 앞의 1문은 자수용토(自受用土)를 나타내고 뒤의 3문은 타수용토(他受用土)를 말한 것이다.
3문에 색이 있는 것을 말한 것이 틀림 없지만 자수용토에 대해서는 해설한 이들의 말이 같지 않다.
如前所說四種門中 初一門顯 自受用土 後三門 說他受用土
三門有色 不待言論 自受用土 說者不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자수용신(自受用身)은 색형(色形)을 멀리 떠나 법성(法性)의 정토를 그 사는 곳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거기는 어떤 색상(色相)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마치, 저 “본업경(本業經)”에서 “불자야, 과체(果體)는 원만하여 갖추지 않은 덕이 없고 두루하지 않은 이치가 없으며,
중도 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에 있다. 청정한 국토는 끝도 없고 이름도 모양도 없어서 어떤 법도 있을 수 없으며 몸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몸이 없는 것도 아니다…(이하 생략)…”고 한 것과 같다.
或有說者 自受用身 遠離色形 法性淨土 爲所住處 是故都無色相可得
如本業經說 佛子果體圓滿 無德不備 理無不周 居中道第一義諦 淸淨國土 無極無名無相 非一切法可得 非有體 非無體 乃至廣說
“기신론”에는 “모든 부처님은 오직 법신과 지상(智相)의 몸이 있을 뿐이며,
제일의제에는 세제(世諦)의 경계가 없고 아무 작용도 없지만, 다만 중생들이 그것을 보고 들음을 따라 이익을 얻기 때문에 그것을 작용이라 한다.
이 작용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범부와 2승이 마음으로 보는 것으로 그것을 응신(應身)이라 하며,
둘째는 보살이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보살의 구경지(究竟地)에 이르기까지 마음으로 보는 것이니 그것을 보신(報身)이라 한다” 하였으니,
이런 글에 의하여 볼 수 있는 색상(色相) 따위는 다 타수용신으로서 자수용신에는 색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 智相 - 부처의 광명(光明)을 말함. 부처님의 지혜가 밖으로 나타난 모양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함.
起信論云 諸佛如來 唯是法身智相之身 第一義諦 無有世諦境界 離於施作 但隨衆生見聞皆得益 故說爲用
此用有二種 一者凡夫二乘心所見者 名爲應身 二者諸菩薩從初發意 乃至菩薩究竟地 心所見者 名爲報身
依此等文 當知所見有色相等 皆得他受用身 說自受用中 無色無相也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자수용신에는 장애가 없는 미묘한 색이 있고 그것이 의지한 국토에는 육진(六塵)의 뛰어나고 훌륭한 경계가 갖추어 있다”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살차니건자경(薩遮尼乾子經)”에,
구담(瞿曇)의 법성(法性)의 몸은 그 묘한 색이 항상 고요하나니
이와 같은 법성의 몸이 중생과 같아 그 끝이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或有說者 自受用身 有無障?微妙之色 其所依土 具有六塵殊勝境界 如薩遮尼乾子經云
瞿曇法性身 妙色常湛然 如是法性身 衆生等無邊
또 “화엄경”에는 “여래 정각(正覺)께서 보리를 이루었을 때에는 일체 중생과 같은 몸을 얻었고, 일체의 법과 같은 몸을 얻었으며, 나아가 일체의 행계(行界)와 같은 몸을 얻었고,
고요한 열반계와 같은 몸을 얻었다.
불자여, 여래는 그 얻은 몸을 따라 그 음성과 걸림이 없는 마음도 그와 같은 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여래는 이런 무량한 세 가지 청정함을 두루 갖추었느니라”하였다.
華嚴經云 如來正覺成菩提時 得一切衆生等身 得一切法等身 乃至得一切行界等身 得寂靜涅槃界等身 佛子 隨如來所得身 當知音聲及無?心 亦復如是 如來具足如是三種淸淨無量
“섭대승론”에는 “만일 정토에 아무 두려움이 없으면 육근(六根)이 수용하는 법을 다 두루 갖추어 있다” 하였고,
또 “오직 이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수용거리[受用具]가 가장 훌륭하여 동등할 리가 없나니, 이것은 여래의 복덕과 지혜로 인과 행[因行]이 원만하여 여래의 훌륭한 과보가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런 글에 의하여 원만한 인과 행으로 이루어진 자수용신은 육진을 의지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攝大乘云 若淨土中 無諸怖畏 六根所受用法悉具有 又非唯是有 一切所受用具 最勝無等 是如來福德智慧 行圓滿因 感如來勝報依止處 是故最勝 依此等文 當知圓滿因之所感 自受用身 依止六塵也
또 어떤 이는 말한다.
“그 두 스승의 말에는 다 일리가 있으니 그것이 다 경론에서 말한 것과 틀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래의 법문에는 장애가 없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보불신(報沸身)의 국토에는 대략 두 가지 문이 있으니, 만일 정상귀원(正相歸源)의 문으로 말한다면 첫째 스승의 말과 같지만, 만일 종성성덕(從性成德)의 문에 의한다면 뒤의 스승의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들의 인용한 경론은 그 문을 따라 말하였기 때문에 서로 틀리는 것이 아니다.”
或有說者
二師所說 皆有道理 等有經論 不可違故 如來法門無障?故 所以然者 報佛身土 略有二門 若就正相歸源之門 如初師說 若依從性成德之門 如後師說 所引經論 隨門而說 故不相違
이상 제2의 색이 있고 색이 없는 문이다.
此是第二色無色門也
(3)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문을 밝힘
次第三 明共不共門者
통틀어 말하면 국토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토(內土)요,
둘째는 외토(外土)이다.
외토란 곧 공과(共果)요,
내토란 곧 불공과(不共果)이다.
通相而言 土有二種
一者內土 二者外土
言外土者 是共果 言內土者 是不共果
내토에 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중생들의 5음(陰)을 정보토(正報土)로 삼는데 사람이 거기에 의지해 살기 때문에 국토라 한다.
둘째는 세상을 뛰어난 성인의 지혜로서 이름을 실지토(實智土)라 하는데, 후득지(後得智)로 거기에 머무르기 때문이며, 또 근본지(根本智)에 의하여 전도(顚倒)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 “본업경”에 “국토란 일체 성현이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모든 중생과 성현의 각자가 사는 과보의 국토로서, 만일 범부 중생이 5음 가운데 머무르면 그것을 정보의 국토라 하고, 산림(山林)과 대지를 공유(共有)하면 그것을 의보(依報)의 국토라 한다” 한 것과 같다.
內土之中 亦有二種
一者衆生五陰 爲正報土 人所依住 故名爲土
二者出世聖智 名實智土 以能住持後得智故 依根本智 離顚倒故
如本業經云 土名一切賢聖所居之處 是故一切衆生賢聖 各自居果報之土 若凡夫衆生住五陰中 爲正報之土 山林大地共有 爲依報之土
초지(初地)의 성인에게도 두 가지 국토가 있다.
첫째는 실지토(實智土)이니 전지(前智)가 후지(後智)에 머무름으로써 국토를 삼는 것이며, 둘째는 변화하는 정예(淨穢)가 겁의 수량을 지나 응현(應現)하는 국토이며 마침내 무구지토(無垢地土)에 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
모든 중생과 나아가서는 무구지까지가 모두 정토가 아니니 과보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初地聖人 亦有二土
一實智土 前智住後智爲土 二變化淨穢 逕劫數量 應現之土 乃至無垢地土 亦復如是
一切衆生 乃至無垢地 盡非淨土 住果報故
통틀어 말하면 비록 그렇다고 하지만 그것을 분별하면 정보의 국토는 불공과(不共果)의 뜻으로서 거기는 아무 이설(異說)이 없거니와, 의보의 국토를 공과(共果)라 하는 데에는 여러 학설이 같지 않다.
總說雖然 於中分別者 正報之土 不共果義 更無異說依報之土 爲共果者 諸說不同
즉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저 산이나 물 등은 극미(極徵)가 합해서 된 것이 아니고 실지로는 한 본체가 있으며, 많은 인(因)의 공감(共感)으로서 그것은 중생들이 따로 이루어지고 각기 변한 것이므로, 함께 있어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은 여러 개의 등불과 같다.
또 많은 원인으로 꿈이 될 때 원인의 종류가 다 같으면 결과의 모양도 같으며 처소도 다름이 없는데, 가정해서 공(共)이라 하지만 실지로는 각기 다른 것처럼 부처님의 정토도 또한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그것이 별식(別識)이 변해 된 것으로서 모두 법계에 두루한 것이라면, 있는 처소가 같다고 해서 공(共)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공이 아닌 것이며, 만일 어떤 한 국토라도 식(識)을 따라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마음 밖에서 이루어진 것이요 유식(惟識)의 이치가 아니다”고 한다.
이것은 저 “해심밀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識)의 반연할 것이라고 나는 말하나니, 그것은 유식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또 “유식론”에서, “업이 식 안에 훈습(熏習)하여 과(果)에 집착하여 밖으로 나온다.
무엇 때문에 훈습하는 곳에서는 과를 말하지 않는가?”라고 한 것과 같다.
或有說者 如山河等 非是極微合成 實有一體 多因共感 直是有情異成各變 同處相似 不相障? 如衆燈明
如多因所夢 因類是同 果相相似 處所無別 假名爲共 實各有異 諸佛淨土 當知亦爾
若別識變 皆遍法界 同處相似 說名爲共 實非共也 若有一土 非隨識別者 卽成心外 非唯識理
如解深密經云
我說識所緣 唯識所現故
唯識論云 業熏習識內 執果生於外 何因熏習處 於中不說果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정토의 의과(依果)가 식을 떠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식은 다른 것이며 국토의 하나이니, 그것은 별식(別識)이 함께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4진(塵)을 모아 한 기둥을 이루는 것과 같나니 한 기둥의 모양은 4미(微)를 떠나지 않지만 4미를 따라 4주(柱)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이치도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만일 자수용토(自受用土)에 대해서 말한다면, 부처님이 모든 부처님과 함께 한 국토를 공유(共有)했나니 그것은 마치 부처님이 법신을 함께 의지한 것과 같기 때문이며,
만일 타수용토(他受用土)에 대해서 말한다면, 부처님이 모든 보살들과 공유했나니 그것은 마치 왕이 신하들과 한 나라를 공유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 두 개의 수용토도 별체(別體)가 아니니, 그것은 마치 관행(觀行)하는 사람은 돌을 옥으로 보지만 지혜가 열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돌로만 보는데, 돌과 옥은 다르지만 체가 다른 것이 아닌 것처럼, 그토가 같은 것도 그런 줄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저 “해심밀경”에서 “여래의 행과 여래의 경계는 어떻게 다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여래의 행은 이른바 일체종(一切種)으로서 여래는 무량한 공덕을 공유하는 청정한 불토를 장엄하는 것이며, 여래의 경계도 일체종이지만 거기는 5계(界)의 차별이 있으니, 이른바 유정계(有情界), 세계, 법계, 조복계(調伏界), 조복방편계(調伏方便界)이니라”라고 하신 것과 같다.
그 해석에 “여기서 말한 자수용토는 모든 부처님이 공유한 것으로서 각기 다른 것이 아니다” 하였다.
或有說者 淨土依果 雖不離識 而識是別 土相是一 由彼別識共所成故
如攬四塵以成一柱 一柱之相 不離四微 非隨四微成四柱故 當知此中道理亦爾
於中若就自受用土 佛與諸佛共有一土 猶如法身 諸佛共依故 若論他受用土相者 佛與諸菩薩等共有 如王與臣共有一國故
又二受用土 亦非別體 如觀行者 觀石爲玉 無通慧者 猶見是石 石玉相異 而非別體 二土同處 當知亦爾
如解深密經云 如來所行如來境界 此何差別 佛言 如來所行謂一切種 如來共有無量功德衆 莊嚴淸淨佛土 如來境界 謂一切種 五界差別 所謂有情界 世界 法界 調伏界 調伏方便界
解云 此說自受用土 諸佛共有 非各別也
“유가론”에는 “서로 평등한 모든 물건을 혹은 불공분별(不共分別)로 인(因)을 삼고,
혹은 공분별(共分別)로 인을 삼는다.
만일 공분별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면 분별은 없다 하더라도 남의 분별로 주지(住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멸하지 않으며, 만일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남의 분별에는 과가 없을 것이다.
그가 비록 멸하지 않더라도 청정하게 되었으면 그 일에 대해 바른 견해가 청정한 것이다.
마치 관행을 닦는 많은 사람들이 그 한 일에 대해 정심(定心)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다른 견해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저도 또한 그럴 것이다”하셨다.
그 해석에는 “여기서 말한 의보는 식을 따라 다른 것이 아니다.
만일 공과(共果)가 식을 따라 달라진다고 고집한다면, 나의 과는 멸하더라도 남의 과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남의 분별과 같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그는 이 글을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다.
瑜伽論云 相等諸物 或由不共分別爲因 或復由共分別爲因 若共分別之所起者 分別雖無 由他分別所住持故 而不永滅 若不爾者 他之分別應無其果 彼雖不滅 得淸淨者 於彼事中 正見淸淨 譬如衆多修觀行者 於一事中 由定心故 種種異見可得 彼亦如是
解云 此說依報 不隨識別 若執共果隨識異者 我果雖滅他果猶存 卽他分別 不應無異 故彼不能通此文也
“섭대승론”에는 “다시 이와 같은 정토는 한결같이 청정하고 한결같이 즐거우며 한결같이 잃음이 없고 한결같이 자재함을 수용한다” 하고,
그 해석에는 ‘항상 더러움이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청정하다 하고, 다만 묘한 즐거움을 받으면서 괴로움도 없고 버림도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즐겁다 하며, 오직 진실한 선으로서 악도 없고 기억도 없기 때문에 한결같이 잃음이 없다 하고, 일체의 일에서 다 다른 인연을 보지 않고 모두 자신의 마음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결같이 자재하다”고 한다.
“다시 큰 청정함에 의하여 한결같은 청정함을 말하고, 큰 즐거움에 의하여 한결같은 즐거움을 말하며, 큰 항상됨에 의하여 한결같이 잃음이 없음을 말하고, 큰 나[大我]에 의하여 한결같은 자재함을 말한다” 하였으며,
그 해석에는 “이 가운데 처음의 ‘다시’은 타수용의 뜻을 나타낸 것이며, 뒤의 ‘다시’은 지수용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뜻은 같지 않더라도 다른 국토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본론(本論)에 대한 주장만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그 두 국토도 별체(別體)가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攝大乘論云 復次 受用如是淨土 一向淨 一向樂 一向無失 一向自在
釋曰 恒無雜穢 故言一向淨 但受妙樂 無苦無捨 故言一向樂 唯是實善 無惡無記 故言一向無失 一切事悉不觀餘緣 皆由自心成 故言一向自在
復次 依大淨說一向淨 依大樂說一向樂 依大常說一向無失 依大我說一向自在
解云 此中初復次 顯他受用義 後復次 顯自受用義 義雖不同 而無別土 所以本論 唯作一說 故知二土 亦非別體也
(문) 그 두 주장에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問如是二說 何得何失
(답) 만일 그 말로써 취한다면 다만 성립하지 않을 뿐이지만 그 뜻으로 이해하면 거기에 다 이치가 있는 것이다.
答曰 如若言取 但不成立 以義會之 皆有道理
이상은 제3의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문이다.
此是第三共不共門也
(4) 누(漏)가 있고 누가 없는 문을 밝힘
次第四 明漏無漏門者
여기에는 대략 두 구(句)가 있으니,
첫째는 모든 법을 통틀어 말하여 유루와 무루의 뜻을 나타내고,
둘째는 정토를 따로 잡아 유루와 무루의 모양을 밝히는 것이다.
略有二句 一者通就諸法 顯漏無漏義 二者別約淨土 明漏無漏相
첫째의 통문(通門)이란,
“유가론”에 말하기를 “유루, 무루에 각각 5문이 있으니,
유루의 5문이란,
첫째는 일(事)을 말미암기 때문이요,
둘째는 수면(睡眠) 때문이며,
셋째는 상응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반연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일어나기 때문이다.
무루의 5문이란, 첫째는 모든 얽매임을 떠나기 때문이요,
둘째는 수면을 끊기 때문이며,
셋째는 끊어 멸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견도위(見道位)에서 끊은 번뇌를 대치(對治)하여 자성(自性)을 상속(相續)하게 하여 해탈하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수도위(修道位)에서 끊는 번뇌를 대치하므로 자성을 상속하게 하여 해탈하기 때문이다”하였으니, 그 자세한 것은 저기서 널리 말한 것과 같다.
初通門者 瑜伽論說 有漏無漏 各有五門 有漏五者 一由事故 二隨眠故 三相應故 四所緣故 五生起故
無漏五者 一離諸纏故 二隨眠斷故 三是斷滅故 四見所斷之對治自性相續解脫故 五修所斷之對治自性相續解脫故 於中委悉 如彼廣說
지금 여기 4구(句)로서 대략 그 모양을 나타내면,
첫째는 어떤 법은 한결같이 유루이니, 이른바 모든 더러운 마음과 심소법(心所法) 등이 상응하는 이치에 의한 것인데, 그것은 유루이기 때문에 다섯 가지 무루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어떤 법은 한결같은 무루이니, 이른바 도를 보았을 때 마음과 심소법등이 자성해탈의 이치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유루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어떤 법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한 것이니, 이른바 과보로서의 무기심과 심소법 등이 수면에 얽매이기 때문이며, 또 모든 얽매임을 떠났기 때문에 비록 무루이기는 하나 그것은 고제(苦諦)이니 업의 번뇌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는 어떤 법은 유루도 아니며, 무루도 아닌 이른바 매우 깊은 법이니 수(數)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今作四句 略顯其相 一者有法 一向有漏 謂諸染汚心心所法等 由相應義 是有漏故 而無五種無漏相故
二者有法 一向無漏 謂見道時 心心所法等 由有自性解脫義故 而無五種有漏相故
三者有法 亦有漏 亦無漏 謂報無記心心所法等 隨眠所縛故 諸纏所離故 雖復無漏 而是苦諦 由業煩惱所生起故
四者有法非有漏謂甚深法不墮數故
다음에 따로 밝히는 가운데에도 또한 두 문이 있으니 첫째는 분제(分際)가 있는 문이요.
둘째는 장애가 없는 문이다.
次別明中 亦有二門 一有分際門 二無障?門
분제가 있는 문이란, 만일 부처님께서 사시는 정토에 대해 말한다면, 이 사구중에 오직 두 구만이 있으니, 색이 있고 마음이 있는 문에 의하면 그것은 곧 한결같이 무루로서, 자성 상속(自性相續)에서 해탈하는 이치 때문에 다섯 가지 유루의 모양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만일 색도 아니요 마음도 아닌 문에 의하면, 그것은 곧 유루도 아니요 무루도 아니니, 유루도 아니요 무루도 아니기 때문에 모양도 떠나고 성품도 떠났기 때문이다.
有分際門者 若就諸佛所居淨土 於四句中唯有二句 依有色有心門 卽一向是無漏 自性相續解脫義故 遠離五種有漏相故
若就非色非心門者 卽非有漏 亦非無漏 非有非無故 離相離性故
보살에 대해 말해도 또한 두 구가 있으니 논(論)에서와 같이 두 지혜로 나타난 정토는 한결같이 무루의 도로서 도제(道諦)에 포섭된다.
저 “섭론(攝論)”에서 말한 “보살과 여래의 유식(唯識)의 지혜는 모양도 없고 공용(功用)도 없나니 그러므로 청정이라고 하고, 일체의 장애를 떠나 퇴실(退失)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자재라고 하며, 이 유식의 지혜는 정토의 체(體)가 되기 때문에 고제(苦諦)로 그 체를 삼지 않는다…(이하 생략)…”한 것과 같다.
若就菩薩 亦有二句 恰論二智 所顯淨土 一向無漏 道諦所攝
如攝論說 菩薩及如來唯識智 無相無功用 故言淸淨 離一切障 無有退失 故言自在 此唯識智 爲淨土體故 不以苦諦爲體 乃至廣說故
만일 본식(本識)이 변한 문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것은 무루이니, 삼계의 유루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무루의 세계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은 무루이다.
그러나 무명주지(無明住地)가 반연이 되어 생겼기 때문에 과보토(果報土)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유루가 비록 무루라 하더라도 그것은 세간이다.
그러므로 지음이 없는 사제문(四諦門) 안에서 고제의 과보에 포섭되는 것이다.
저 경에 “삼현(賢) 십성(聖)은 과보에 머무른다”고 한 것과 같다.
若就本識所變之門 亦是無漏 以非三界有漏所起 樂無漏界 故是無漏
無明住地爲緣出故 名果報土
故是有漏 雖亦無漏而是世間
故於無作四諦門內 苦諦果報之所攝也
如經言 三賢十聖住果報故
“보성론(寶性論)”에 “무루계에 의하여 세 가지 의생신(意生身)이 있으니, 그것은 무루의 선근으로 인해 지어진 것으로서 이름을 세간이라 하며, 유루의 모든 업의 번뇌로 지어진 세간법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또 이름을 열반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이 뜻에 의해 “승만경”에는 “세존님, 유위(有爲)의 세간이 있고 무위(無爲)의 세간이 있으며, 유위의 열반이 있고 무위의 열반이 있습니다”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한 의생신이란 곧 아리야식(阿梨耶識)이 변한 정보(正報)이다.
정보가 그렇다면 의보도 또한 그러하니, 그것은 다같이 본식(本識)이 변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리야가 변해서 된 국토와 두 지(智)로 나타난 정토는 비록 고제와 도제의 이제(諦)에 포섭되는 것이지만 그 별체는 없는 것이요, 뜻을 따라 달리 포섭될 뿐이다.
이것은 마치 저 분별로 가지는 예토에 대해 청정을 얻은 이는 그것을 청정하다고 볼 때 청정하고 더러움은 비록 다르나 별체가 없는 것처럼, 이 두 가지 이치도 또한 그런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상은 분제문(分際門)에 대해 말한 것이다.
寶性論云 依無漏界中 有三種意生身 應知彼因無漏善根所作 名爲世間 以離有漏諸業煩惱所作世間法故 亦名涅槃
依此義故 勝?經言 世尊 有有爲世間 有無爲世間 有有爲涅槃 有無爲涅槃
故此中說意生身 乃是梨耶所變正報
正報旣爾 依報亦然 同是本識所變作故
然此梨耶所變之土 及與二智所現淨土 雖爲苦道二諦所攝 而無別體隨義異攝耳
如他分別所持穢土 得淸淨者 卽見爲淨 淨穢雖異 而無別體 當知此中二義亦爾
此約有分際門說也
다음에 장애가 없는 문에 대해 말하면 네 구(句)를 만들어야 한다.
次就無障?門說者 應作四句
첫째는 부처님의 몸과 국토가 다 유루이니, 일체의 누(漏)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 경에 “모든 부처님이 삼독(三毒), 사루(四漏) 등 일체 번뇌 속에 편히 머무르면서 아뇩보리를 얻는다…(이하 생략)…”한 것과 같다.
一者諸佛身土 皆是有漏 不離一切諸漏故 如經說言 諸佛安住三毒四漏等 一切煩惱中 得阿?菩提 乃至廣說故
둘째는 범부들의 몸과 국토가 다 무루이니 모든 눈의 성품을 떠났기 때문이다.
저 경에 “색(色)도 무루 무계(無漏無繫)요,
수, 상, 행, 식도 무루 무계이다…(이하 생략)…” 한 것과 같다.
二者 凡夫身土皆是無漏 以離一切諸漏性故 如經說言 色無漏無繫 受想行識 無漏無繫 乃至廣說故
셋째는 모든 범부와 성인의 예토와 정토가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한 것이니, 앞의 두 문(門)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三者 一切凡聖穢土淨土 亦是有漏 亦是無漏 以前二門不相離故
넷째는 모든 범부와 성인의 예토와 정토가 유루도 아니요 무루도 아닌 것이니, 그것은 얽매이는 성품[縛性]도 없고 해탈의 성품[脫性]도 없기 때문이다.
저 경에 “색도 얽매이는 성품도 없고 해탈의 성품도 없으며 수, 상, 행, 식도 또한 그렇다…(이하 생략)…” 한 것과 같다.
四者 一切凡聖穢土淨土 非有漏 非無漏 以無縛性及脫性故
如經說言 色無縛無脫 受想行識 無縛無脫 乃至廣說故
이상은 제4의 누가 있고 누가 없는 문이다.
此是第四有漏無漏門也
이상의 4문을 합해 첫째의 정토의 과덕이라고 한다.
上來四門合爲第一淨土果竟
2) 정토(淨土)의 인행(因行)
次第二明淨土
정토의 인에 두 길이 있으니
첫째는 성변인(成辨因)이요,
둘째는 왕생인(往生因)이다.
淨土之因 有其二途 一成辨因 二往生因
성변인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본래 무루의 법(法)의 종자를 3 아승지겁 동안 닦아 그것을 증장(增長)시키는데 이것을 정토가 변해 나타나는 생인(生因)이라고 한다” 하나니,
마치 저 “유가론”에서 “나락가(那洛迦 : 지옥)에 나서 세 가지 무루근(無漏根)의 종자를 성취한다”고 한 것과 같은데, 이로써 무루 정토 종자의 있음을 알 수 있다.
成辨因者 說者不同 或有說者 本來無漏法爾種子 三無數劫修令增廣 爲此淨土變現生因
如瑜伽論說 生那落迦 三無漏根種子成就 以此准知 亦有無漏淨土種子
또 어떤 이는 말하기를 “두 지혜로 닦아서 새로 난 종자가 정토의 생인을 만든다” 하나니,
이것은 저 “섭론”에서 “출세간의 선법과 공능(功能)에서 나와 정토를 일으킨다.
무엇을 출세간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가?
분별 없는 지혜[無分別智]와 분별 없는 후득지(後得智)에서 생기는 선근을 출세간 선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본래 있는 것이지 뒤에 생긴 것이 아니며 만일 생긴 것이라면 그것은 새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或有說者 二智所熏新生種子 爲彼淨土而作生因
如攝論說 從出出世善法功能 生起淨土 何者爲出出世善法 無分別智 無分別後得 所生善根 爲出出世善法 是本有卽非所生 旣是所生 當知新成
(문) 그 두 주장에서 어느 것이 진실인가?
問 如是二說 何者爲實
(답) 다 성전(聖典)에 의한 것이니 어느 것인들 진실이 아니겠는가.
자세한 것은 “능가경요간(楞迦經料簡)”에서 말한 것과 같다.
答 皆依聖典 有何不實 於中委悉 如楞伽經料簡中說
다음에 왕생의 인이란 무엇인가.
무릇 모든 왕생의 인은 바로 정보의 장엄만을 감득(感得)하는 것이 아니요,
의보의 정토도 갖추어 감득하는 것이다.
다만 여래 본원의 힘을 받들기 때문에 느낌을 따라 수용하는 것이며 스스로의 업인(業因)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왕생의 인이 없다는 것이다.
次明往生因者
凡諸所說往生之因 非直能感正報莊嚴 亦得感具依報淨土
但承如來本願力故 隨感受用 非自業因力之所成辨 是故說無往生因
이 인의 모양에 대해서는 경론의 말이 같지 않다.
“관경(觀經)”에 의하면 십륙관(十六觀)을 말하고 “왕생론”에는 5문(門)의 행을 말한다.
이제 이 경에 의하여 3배(輩)의 인(因)을 말하면, 상배(上輩)의 인에는 다섯 귀절로 말하였다.
此因之相 經論不同
若依觀經說十六觀 往生論中說五門行
今依此經 說三輩因 上輩之因 說有五句
첫째는 집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는 사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정인(正因)을 일으키는 방편을 나타낸 것이요,
둘째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니 이것은 정인을 밝힌 것이며,
셋째는 저 부처님을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은 수관(修觀)을 밝힌 것이요,
넷째는 온갖 공덕을 짓는 것이니 이것은 기행(起行)을 밝힌 것으로서 이 관과 행은 만업(滿業)을 돕는 것이며,
다섯째는 그 국토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 하나는 원이며 앞의 네 가지는 행이니, 행과 원이 화합해야 비로소 거기에 날 수 있기 때문이다.
一者 捨家棄欲而作沙門 此顯發起正因方便
二者 發菩提心 是明正因
三者 專念彼佛 是明修觀
四者 作諸功德 是明起行 此觀及行爲助滿業
五者 願生彼國
此一是願 前四是行 行願和合 乃得生故
중배(中輩)의 인에 대해서도 네 귀절로 말한다.
첫째는 비록 사문이 되지는 못했지만 장차 위없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니 이것은 정인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저 부처님을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며,
셋째는 얼마간의 선을 닦는 것이니 이 관과 행은 만업을 돕는 것이요,
넷째는 그 국토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니 앞의 행과 이 원이 화합해서 인이 되는 것이다.
中輩之中 說有四句
一者 雖不能作沙門 當發無上菩提之心 是明正因
二者 專念彼佛
三者 多少修善 此觀及行爲助滿業
四者 願生彼國 前行此願 和合爲因也
하배(下輩)에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하는데 그들에게 각각 세 귀절이 있다.
下輩之內 說二種人 二人之中 各有三句
첫째 사람의 세 귀절은 첫째는 설사 온갖 공덕을 짓지 못하였더라도 장차 위 없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니 이것은 정인을 밝힌 것이요,
둘째는 십념(十念) 내지 그 부처님을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은 만업(滿業)을 돕는 것이며,
셋째는 저 국토에 나기를 원하는 것으로서, 앞의 행과 이 원이 화합해서 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은 부정성(不定性)의 사람을 밝힌 것이다.
* 滿業 - 두 가지 업(業)의 하나. 차별이 있는 모양의 과보를 이끌어 오는 업을 말함.
즉 사람이라고 하는 보편적인 상태에 나게 하는 같은 업에 대하여 빈부, 귀천, 남녀 등의 구별을 나타내는 업을 말함.
初人三者 一者 假使不能作諸功德 當發無上菩提之心 是明正因
二者 乃至十念 專念彼佛 是助滿業
三者願生彼國 此願前行和合爲因
是明不定性人也
둘째 사람에도 각각 세 귀절이 있다.
첫째는 매우 깊은 법을 듣고는 기뻐하면서 믿고 좋아하는 것이니, 이것은 발심과 정인을 아울러 나타내는 것으로서 다만 앞의 사람과 다른 것은 그 깊은 믿음을 말했을 뿐이요,
둘째는 마지막 일념이나마 그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만업을 돕는 것이니, 앞 사람의 깊은 믿음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반드시 십념이 있어야 하지만 이 사람은 깊은 믿음이 있기 때문에 꼭 십념을 갖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저 국토에 나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 원과 앞의 행이 화합해서 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보살 종성의 사람에 대해 한 말이다.
第二人中有三句者
一者 聞甚深法 歡喜信樂 此句兼顯發心正因 但爲異前人擧其深信耳
二者 乃至一念念於彼佛 是助滿業 爲顯前人無深信故 必須十念 此人有深信故 未必具足十念
三者 以至誠心 願生彼國 此願前行和合爲因
此就菩薩種性人也
이상은 경의 말이다.
經說如是
(1) 정인(正因)
지금 이 글에서 그 나는 모양을 대량 분별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는 정인(正因)을 밝히고 뒤에는 조인(助因)을 나타내는 것이다.
今此文略辨其生相 於中有二 先明正因 後顯助因
경에서 말하는 정인이란 이른바 보리심이니, 위없는 보리심을 낸다는 것은 세간의 부귀와 즐거움과 2승의 열반을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이 3신(身)의 보리를 지원(志願)하는 것이니 이것을 위없는 보리심이라 한다.
經所言正因 謂菩提心 言發無上菩提心者 不顧世間富樂 及與二乘涅槃 一向志願三身菩提 是名無上菩提之心
통틀어 말하면 그렇지만 거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을 따라 발심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치를 따라 발심하는 것이다.
總標雖然 於中有二 一者 隨事發心 二者 順理發心
이른바 일을 따른다는 것은 무수한 번뇌를 다 끊기 원하고 무량한 선법을 다 닦기 원하며 무변한 중생을 다 건지기 원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일을 결정코 기원하는 것이니,
첫째는 여래의 단덕(斷德)의 정인이요,
둘째는 여래의 지덕(智德)의 정인이며,
셋째의 마음이란 은덕(恩德)의 정인이다.
이 3덕이 합해 위 없는 보리의 과가 되며 이것이 곧 3심(心)으로서 모두 위없는 보리의 인이 되는 것이다.
인과 과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너비와 길이의 양(量)이 같고 또 평등하여 빠뜨림이 없이 무엇이고 다 포용한다.
그러므로 저 경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발심과 마지막은 차별이 없지만 이런 두 마음에 앞 마음이 어렵네 자기 제도는 못했으나 먼저 남을 건지나니 그러므로 초발심에 나는 경례하노라.
이 마음의 과보가 바로 보리이기는 하지만 그 과보(果報)는 정토에 있는 것이다.
왜냐 하면 보리심의 양(量)은 광대하기 그지없고 장원(長遠)하여 무한하기 때문에 광대하고 무변한 의보(依報)의 정토와 장원하고 무량한 정보의 수명을 감득하는데는 보리심 이외에 그것을 감당할 것이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마음이 그 정인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상은 일을 따라 발심하는 모양을 밝힌 것이다.
言隨事者 煩惱無數 願悉斷之 善法無量 願悉修之 衆生無邊 願悉度之
於此三事 決定期願 初是如來斷德正因 次是如來智德正因 第三心者 恩德正因
三德合爲無上菩提之果 卽是三心 總爲無上菩提之因
因果雖異 廣長量齊 等無所遺 無不苞故
如經言
發心畢竟二無別
如是二心前心難
自未得度先度他
是故我禮初發心
此心果報 雖是菩提 而其華報 在於淨土
所以然者 菩提心量 廣大無邊 長遠無限 故能感得廣大無際依報淨土 長遠無量正報壽命 除菩提心 無能當彼 故說此心 爲彼正因
是明隨事發心相也
다음에 이치를 따르는 발심이란, 이른바 모든 법이 다 요술이나 꿈과 같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것이라 신해(信解)하고, 이 신해에 의하여 광대한 마음을 내어 비록 번뇌와 선법을 보지 않지만 그래도 끊고 닦을 것이 없다고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다 끊고 다 닦기를 원하지만 무원(無願)삼매를 어기지 않고, 무량한 중생을 다 건지기를 원하지만, 건진다거나 건져진다는 생각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공(空), 무상(無相)의 이치를 따르나니 저 경에, “이렇게 무량한 중생을 제도한다 하지만 실은 제도를 얻는 중생이 없는 것이다…(이하 생략)…”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발심은 불가사의한 것이니, 이것이 이치를 따라 발심하는 모양을 밝힌 것이다.
所言順理而發心者 信解諸法皆如幻夢 非有非無 離言絶慮 依此信解 發廣大心 煩 雖不見有惱善法 而不撥無可斷可修
是故雖願悉斷悉修 而不違於無願三昧 雖願皆度無量有情 而不存能度所度
故能順隨於空無相 如經言 如是滅度無量衆生 實無衆生得滅度者 乃至廣說故
如是發心 不可思議 是明順理發心相也
일을 따르는 발심은 퇴전(退轉)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에 부정한 성품[不定性]의 사람도 발심할 수 있지만 이치를 따르는 발심은 퇴전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보살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야 발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발심하는 공덕은 무변하기 때문에 설사 부처님께서 겁이 다하도록 그 공덕을 말씀하더라도 오히려 다할 수 없는 것이다.
정인(正因)의 모양은 대략 말해 이와 같다.
隨事發心 有可退義 不定性人 亦得能發 順理發心 卽無退轉 菩薩性人 乃能得發
如是發心 功德無邊 設使諸佛窮劫演說彼諸功德 猶不能盡
正因之相略說如是
(2) 조인(助因)
다음에는 조인(助因)을 밝히겠다.
조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지금은 우선 그 하배(下輩)의 십념(十念)을 밝힌다.
次明助因
助因多種 今且明其下輩十念
이 경에서 하배의 십념을 말하였는데, 그 한 말 속에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른바 현료의(顯了義)와 은밀의(隱密義)이다.
此經中說下輩十念 一言之內 含有二義 謂顯了義 及隱密義
은밀의란 제3대(對)의 순정토(純淨土)의 과에 의해 하배 십념의 공덕을 말한 것이니, 이것은 “미륵발문경(彌勒發問經)”에 말한 것과 같다.
즉 “그때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사뢰었다.
‘부처님께서 아미타불의 공덕 이익을 말씀하시면서, 만일 십념을 끊어지지 않게 계속해 그 부처님을 생각하면 곧 왕생할 수 있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범부의 생각이 아니요 나쁜 생각이 아니며 잡된 번뇌의 생각이 아니니, 만일 그런 생각을 두루 갖추면 곧 안양국토(安養國土)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무릇 십념이 있으니 그 십념이란 이른바, 첫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항상 인자한 마음을 내고 모든 중생에 대해 그 행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니 만일 그 행을 비방하면 끝내 왕생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슬퍼하는 마음을 일으켜 해칠 생각을 버리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보호할 마음을 일으켜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체의 법을 비방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인욕(忍辱)하는 가운데서 결정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며,
다섯째는 신심이 청정하여 이양(利養)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여섯째는 일체종지(一切種智)의 마음을 내어서 날마다 늘 생각하면서 잊지 않는 것이며,
일곱째는 모든 중생에 대해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 아만(我慢)을 버리고 겸손한 말을 쓰는 것이며,
여덟째는 세속 이야기에 맛을 붙이지 않는 것이며,
아홉째는 각의(覺意)를 가까이 하여 갖가지 선근의 인연을 깊이 일으키고 시끄럽고 산란한 마음을 멀리 떠나는 것이며,
열째는 바른 생각으로 부처님을 관(觀)하면서 모든 감관을 제거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해석하기를 “이런 십념을 가지면 이미 범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초지(初地)이상 보살이라야 십념을 두루 갖출 수 있는 것이며 순정(純淨)한 국토에 대한 하배의 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은밀의의 십념이라 한다.”
隱密義者 望第三對純淨土果 以說下輩十念功德 此如彌勒發問經言
爾時彌勒菩薩白佛言 如佛所說阿彌陀佛功德利益 若能十念相續不斷念彼佛者 卽得往生 當云何念
佛言
非凡夫念 非不善念 非雜結使念 具足如是念 卽得往生安養國土
凡有十念 何等爲十 一者 於一切衆生常生慈心 於一切衆生不毁其行 若毁其行 終不往生
二者 於一切衆生深起悲心 除殘害意
三者 發護法心 不惜身命 於一切法不生誹謗
四者 於忍辱中生決定心
五者 深心淸淨 不染利養
六者 發一切種智心 日日常念 無有廢忘
七者 於一切衆生 起尊重心 除我慢意 謙下言說
八者 於世談話 不生味著心
九者 近於覺意 深起種種善根因緣 遠離?鬧散亂之心
十者 正念觀佛 除去諸根
解云 如是十念 旣非凡夫 當知初地以上菩薩 乃能具足十念 於純淨土 爲下輩因 是爲隱密義之十念
현료의(顯了義)의 십념의 모양을 나타낸다는 것은 제4대(對)의 정토를 잡아 말하는 것이니,
이 “관경 (觀經)”에 “하품하생(下品下生)이란 어떤 중생이 오역(五逆), 십악(十惡) 등 갖가지 악업을 갖춰 짓다가 임종 때에 이르러 선지식을 만나면, 선지식은 그를 위해 묘한 법을 말하면서 염불하기를 권하고, 만일 염불할 수 없으면 무량수불을 일컬어야 한다.
이와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그 소리를 끊어지지 않게 하며, 십념을 갖추어 나무불(南無佛)이라고 일컫는데, 부처님 명호를 일컫기 때문에 찰나찰나에 80억 겁에 지은 생사의 죄를 멸하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곧 왕생하게 된다…(이하 생략)…”
言顯了義十念相者 望第四對淨土而說
如觀經言 下品下生者 或有衆生 作不善業 五逆十惡 具諸不善 臨命終時 遇善知識 爲說妙法 敎令念佛 若不能念者 應稱無量壽佛 如是至心 令聲不絶 具足十念 稱南無佛 稱佛名故 於念念中 除八十億劫生死罪 命終之後 卽得往生 乃至廣說
어떤 마음을 지극한 마음이라 하며 어떤 것을 십념의 계속이라 하는가.
구마라집(鳩擧羅什)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광야에서 나쁜 도적이 창을 휘두르거나 칼을 빼어 들고 곧 쫓아와 죽이려 하자 그는 부지런히 달아나다가 한 강에 이르렀는데, 만일 그 강을 건너지 못하면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웠다.
그때 그는 다만 그 강을 건널 방편만을 생각한다.
즉 ‘나는 지금 강가에 이르렀다.
옷을 입고 건너야 할까?
옷을 벗고 건너야 할까?
옷을 입고는 건널 수 없고 옷을 벗으려 해도 그럴 겨를이 없다.’
오직 이 생각만 있고 다른 생각이 없어, 강을 건너려는 생각은 곧 그 일념 뿐이니 이런 십념에는 다른 생각이 섞이지 않는다.
수행하는 사람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부처님 명호를 생각하거나 부처님 상호를 생각하거나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여 십념에 이르러야 하나니, 이런 지극한 마음을 십념이라 하며 이것이 곧 현료의 십념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以何等心名爲至心 云何名爲十念相續者
什公說言 譬如有人於曠野中 値遇惡賊 揮戈拔劍 直來欲殺 其人勤走 視度一河 若得度河 首領難全
爾時但念 渡河方便 我至河岸 爲著衣度 爲脫衣度 若著衣衲 恐不得過 若脫衣衲 恐不得暇
但有此念 更無他意 當念度河 卽是一念 此等十念 不雜餘念
行者亦爾 若念佛名 若念佛相等 無間念佛 乃至十念 如是至心 名爲十念 此是顯了十念相也
지금 이 두 권의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십념을 말한 것은 은밀과 현료의 두 가지를 다 갖추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현료의 십념은 “관경(觀經)”의 뜻과 조금 다르다.
즉 저 “관경”에서는 오역죄는 제외하지 않고 오직 방등(方等)을 비방한 죄만을 제외했는데 이 두 권 경에서는 오역죄와 정법(正法)의 비방을 다 제외하였으니, 이렇게 서로 틀리는 것을 어떻게 회통시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 경에서는 비록 오역죄를 지었더라도 대승의 가르침에 의해 참회한 사람을 말한 것이며, 이 경에서는 참회하지 않은 이를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서로 틀리지 않는 것이다.
인연의 모양은 대략 이와 같다.
今此兩卷經說十念 具此隱密顯了二義
然於其中 顯了十念 與觀經意 少有不同
彼觀經中 不除五逆 唯除誹謗方等之罪 今此兩卷經中說言 除其五逆 誹謗正法 如是相違 云何通者
彼經說其雖作五逆 依大乘敎 得懺悔者 此經中說不懺悔者 由此義故 不相違也
因緣之相 略說如是
위에서 말한 인과의 두 문(門)을 합해 제이 종체의 분별을 마친다.
上來所說因果二門 合爲第二簡宗體竟
3. 사람을 들어 분별함
第三約人分別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삼취(三聚) 중생에 대한 분별이요,
둘째는 사의(四疑) 중생에 대한 분별이다.
於中有二 初約三聚衆生分別 後就四疑衆生分別
1) 삼취(三聚)
삼취란 아래의 경에서 “어떤 중생이거나 그 국토에 난 자는 다 정정취(正定聚)에 머무른다. 왜냐 하면 그 불토에는 사정취(邪定聚)와 부정취(不定聚)가 없기 때문이다” 한 것과 같다.
初三聚者 如下經云 其有衆生 生彼國者 皆悉住於正定之聚 所以者何 彼佛土中 無諸邪聚 及不定聚
이런 삼취의 그 현상은 어떠한가.
그 이치의 자세한 것은 저 “보성론(寶性論)”에서 말한 것과 같다.
즉, “일체 중생 세계를 대략 말하면 거기에는 세 가지 중생이 있다.
첫째는 유(有)를 구하는 자요,
둘째는 유를 구하기를 멀리 떠난 자이며,
셋째는 이상의 둘을 다 구하지 않는 자이다.
유를 구함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해탈의 도를 비방하고 열반의 성품이 없어서 항상 세간에 살기를 구하고 열반을 증득하기를 구하지 않는 것이며,
둘째는 불법에 있어서 천제(闡提)와 동위(同位)이니, 그는 대승을 비방하기 때문이다.”
如是三聚 其相云何
此義具如寶性論說
彼云 略說一切衆生界中 有三種衆生 何等爲三
一者求有 二者遠離求有 三者不求彼二
求有有二種 一者 謗解脫道 無涅槃性 常求住世間 不求證涅槃 二者 於佛法中 闡提同位 謗大乘故
그러므로 “부증불감경(不增不滅經)”에서 “만일 어떤 비구나 내지 우바이로서 첫째 소견이나 혹은 둘째 소견을 일으켜 모든 부처님을 세존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는 내 제자가 아니다” 한 것이다.
是故不增不減經言 若有比丘 乃至優婆夷 若起一見 若起二見 諸佛如來 非彼世尊 如是等人 非我弟子
유를 구하기를 멀리 떠난 자에게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도를 구하는 방편이 없는 자이며, 둘째는 도를 구하는 방편이 있는 자이다.
遠離求有者 亦有二種 一者無求道方便 二者有求道方便
방편이 없는 자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여러 외도의 갖가지 삿된 소견을 가진 사람들이요, 둘째는 불법 안에서 그 행이 외도들과 같아서 불법을 믿는 다 하더라도 전도(顚倒)에 집착하여 마치 독자부(犢子部)들과 같은 것이다.…(이하 생략)…
無方便者 亦有二種 一者 多種外道種種邪計 二者 於佛法中 同外道行 雖信佛法 而顚倒取 如犢子等 乃至廣說
방편이 있는 자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이승이다.
그 둘을 다 구하지 않는다는 자는 이른바 근기가 가장 예리한 중생과 여러 보살들이다.
有方便者 亦有二種 所謂二乘
不求彼二者 所謂第一利根衆生諸菩薩等
또 유를 구하는 중생과 일천제는 불법 안에서 동일한 일천제의 지위이니 그것을 사정취 중생(邪定聚衆生)이라고 하고,
유를 구하기를 멀리 떠난 중생 가운데 방편이 없이 도를 구하는 중생을 부정취 중생(不定聚衆生)이라고 하나니 성문과 벽지불이며,
그 둘을 구하지 않는 자를 정정취 중생(正定聚衆生)이라고 한다.
又彼求有衆生一闡提人 及佛法中 同一闡提位 名爲邪定聚衆生
又遠離求有衆生中 墮無方便求道衆生 名爲不定聚衆生 聲聞?支佛
及不求彼二 名爲正定聚衆生
논에서 말한 것은 이상과 같다.
論說如是
이 가운데서 이승과 보살을 총판(總判)하여 정정취라고 하였지만 그것은 지위의 분제(分齊)를 분별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지위에 이르러야 정정취에 들어가며 어떤 뜻에 의하여 정정취라고 하는가.
결정코 퇴타(退墮)함으로써 선근을 끊지 않는 것을 정정취의 뜻이라 한다.
此中總判二乘菩薩爲正定聚 而未分別位地分齊
齊何等位入正定聚 依何等義名正定聚
決定不退墮斷善根 如是名爲正定聚義
그 지위를 논하여 “유가론”에 의하면, “정정취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본성(本性)의 정정취(正定聚)요,
둘째는 습성(習成)의 정정취이다”하였다.
만일 이 말에 의하면 다섯 가지 종성 가운데 보살 종성의 사람이 원래부터 오역죄를 짓지 않고 선근을 끊지 않는 것이 본성의 정정취이며, 이승의 종성과 부정성에 속하는 이들은 오역죄를 짓고 선근을 끊는데, 선근을 끊을 때에는 사정취에 떨어지며 선근이 계속한 뒤에도 들어가지 못하면 그것을 부정취라고 할 것이다.
論其位而依瑜伽說 正定聚有二種 一者本性正定聚 二者習成正定聚
若依此而說 五種種性中 菩薩種性人 從無始時來 不作五逆及斷善根是名本性正定聚也 其二乘性 及不定性 得作五逆 及斷善根 斷善根時 墮邪定聚 善根相續後 未趣入 爲不定聚
이미 들어갔을 때에는 곧 3품(品)으로 분별해야 할 것이니,
만일 그가 본래 하품의 선근으로서 들어가는 사람이면 난법(煖法)이더라도 부정취일 것이요. 정법위(頂法位)에 들어갔어야 비로소 정정취가 되는 것이니, 논에서 정법 위에서는 선근을 끊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 煖法 - 난위(煖位)를 말한다. 불 앞에 있으면 따뜻해지는 것과 같이 번뇌를 태워 없앨 수 있는 견도(見道)의 무루혜(無漏慧)의 불에 접근하여 그에 앞선 유루(有漏)의 선근(善根)을 내는 지위.
已趣入時 卽當分別三品
若其本來下品善根而趣入者 乃至煖法 猶爲不定 入頂法位 方爲正定 論說頂不斷善根故
만일 그가 본래 중품의 선근으로서 들어가는 자라면 난법에 이르렀을 때 정정취라고 하며, 만일 그가 본래 상품의 선근으로서 들어가는 자라면 처음 들어갔을 때 곧 정정취가 되는 것이니, “유가론”에서 말했다.
“만일 하품의 선근에 편히 머무르면서 들어가는 자라면 그는 하품이니, 이름을 유간극(有間隙)이라고 하여 간극이 없지 않고 매우 청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만일 중품의 선근에 편히 머무르면서 들어가는 자라면 그는 중품이며,
만일 상품의 선근에 편히 머무르면서 들어가는 자라면 그는 상품이니, 이름을 무간극(無間隙)이라 하여 이미 간극이 없고 이미 매우 청정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미 들어간 모양이라고 한다.”
若其本來中品善根而趣入者 至煖法時 名爲正定 若其本來上品善根而趣入者 始趣入時 便作正定 如瑜伽說
若有安住下品善根而趣入者 當知下品 名有間隙 未能無間 未善淸淨
若有安住中品善根而趣入者 當知中品
若有安住上品善根而趣入者 當知上品 名無間隙 已能無間 已善淸淨
如是爲已趣入相
또 그 논에서 말했다. “이 하품에 의하여 해탈분(解脫分)의 선근을 따른다.
바가범(婆伽梵)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세간의 상품의 정견(正見)을 갖추면 천생(千生)을 지나더라도 악도(惡道)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글은 본래 상품의 선근에 편히 머물다가 들어가는 이는, 비로소 하품에 들어가서도 해탈분의 선근을 따를 때에는 곧 물러나지 않게 되는 것을 밝힌 것이니, 그것은 간극이 없기 때문이다.
又彼論云 依此下品 順解脫分善根 婆伽梵說 若具世間上品正見 雖歷千生 不墮惡道
此文正明本來安住上品善根而趣入者 始入下品 順解脫分善之時 便得不退 無間隙故
또 그 논에, “만일 때로 하품에 머물다가 성숙한 자이면 그는 여전히 악취(惡趣)에 왕생하며, 중품이나 혹은 하품이면 그들은 악취에 가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글은 본래 하품의 선근에 편히 머물다가 들어가는 사람은 비록 난법에 이르더라도 하품의 성숙위(成熟位)에서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악취에 간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이승의 지위에 대한 분별이다.
又彼論說 若時安住下成熟者 猶往惡趣 若中若上 不往惡趣
此文正明本來安住下品善根而趣入者 雖至煖法 下成熟位 未得不退 故往惡趣
是約二乘位地分別
만일 그가 부정종성(不定種性)인 사람이라면, 그는 곧 대승을 향해 들어갈 때에 종성위(種性位)에 이르러야 비로소 정정취가 되는 것이니,
그것은 저 “기신론”에서 “어떤 사람을 의지하고 어떤 행을 닦아야 믿음을 성취하여 발심할 수 있는가.
이른바 부정취의 중생을 의지하면 선근은 훈습(熏習)하는 힘이 있기 때문에 업의 과보를 믿고 십선(十善)을 일으킬 수 있다.
그리하여 생사의 고통을 싫어하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기 위해 부처님을 만나 친히 받들어 공양하면서 신심을 수행하여 1만겁을 지나면 신심을 성취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그들로 하여금 발심하게 하되,
혹은 대비심(大悲心)으로 인해 스스로 발심하며,
혹은 정법(正法)이 멸하려 할 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발심하게 한다.
이렇게 신심을 성취하여 발심한 이는 정정취에 들어가 끝까지 물러나지 않나니, 이것이 여래의 종성(種性)에 머무르는 것으로서 정인(正因)과 상응하는 것이다.
여기서 여래의 종성에 머무른다는 것은 이미 습종성위(習種性位)에 들어간 것으로서,
그것은 곧 십해(十解)의 초발심(初發心)에 머무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한 것과 같다.
이상에 말한 것은 다 습성의 정정취를 밝힌 것이다.
* 習種性位 - 성종성(性種性)의 상대. 습소성종성(習所成種性)이라고도 함. 훈(熏)해서 만들어진 무루(無漏)의 종자를 말함.
* 十解 - 보살의 52위(位)중 십주(十住)의 위를 말함.
若是不定種性人 直向大乘而趣入時 至種性位 方爲正定
如起信論說 依何等人 修何等行 得信成就 堪能發心
所謂依不定聚衆生 有熏習善根力故 信業果報 能起十善
厭生死苦 欲求無上菩提 得値遇佛 親承供養 修行信心 逕一萬劫 信心成就故
諸佛菩薩敎令發心 或以大悲故 能自發心 或因正法欲滅 以護法因緣 能自發心
如是信心成就 得發心者 入正定聚 畢竟不退 名住如來種中 正因相應
此言名住如來種者 名已入習種性位 卽是十解初發心住
上來所說 皆明習成之正定聚
또 “만일 그 본래 보살의 종성이 바로 대승을 향해 들어가면, 처음 들어 갔을 때 아주 물러나지 않고 또 업력을 따라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 말에 의하면 십신위(十信位)에 들어가면 다시는 물러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부정성의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이니, 이런 말은 다 예토에 대해 한 말이다.
만일 저 정토에 나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면, 정성(定性)의 이승은 왕생하지 못하고 부정성(不定性) 중의 3품 사람으로서 대승에 대해 발심한 사람은 다 정토에 나되, 거기 났을 때에는 바로 정정취에 들어가나니, 그것은 외연(外緣)의 힘에 주지(住持)되기 때문이다.
若其本來菩薩種性 直向大乘而趣入者 始趣入時 永得不退 不由業力墮於惡趣
依此而言 入十信位 便得不退 不同前說不定性人 如是等說 皆就穢土
若就得生彼淨土者 定性二乘 卽不往生 不定性中三品之人 發大乘心者 皆得生彼 生彼之時 卽入正定 由外緣力所住持故
삼취의 뜻은 대략 이상과 같다.
三聚分別略義如是
2) 사의(四疑) 중생을 밝힘
次明有四疑惑衆生
여기서 먼저는 의심되는 경계를 밝히고, 뒤에는 의혹하는 모양을 나타낸다.
於中先明所疑境界 然後顯其疑惑之相
의심되는 경계란 아래의 글과 같다.
즉, “만일 어떤 중생이 의혹하는 마음으로 온갖 공덕을 닦으면서 저 국토에 나기를 원하면, 그는 명확히 알 수 없는 부처의 지혜,
즉 사의할 수 없는 지혜[不事議智],
일컬을 수 없는 지혜[不可稱智],
대승의 넓은 지혜[大乘廣智],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無等無論最上勝智]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지혜를 의심하여 믿지 않는다.
그래도 죄와 복을 믿고 선의 근본을 닦으면서 저 국토에 나기를 원하면, 그런 중생은 저 국토에 나되 5백년 동안은 삼보에 대한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변지(邊地)라고 한다…(이하 생략)…”하였으니, 여기서 말한 부처의 지혜는 통틀어 표한 글귀요,
아래의 네 구는 사지(四智)를 따로 나타낸 것이다.
* 邊地 - 아미타 불이 교화하는 국토로 부처의 지혜를 의심하는 사람이 나는 곳.
所疑境者 如下文言
若有衆生以疑惑心 修諸功德 願生彼國 不了佛智 不思議智 不可稱智 大乘廣智 無等無倫最上勝智 於此諸智 疑惑不信
然猶信罪福 修習善本 願生彼國 此諸衆生 生彼宮殿 五百歲中 不聞三寶 故說邊地 乃至廣說
此言佛智 是總標句 下之四句 別顯四智
사의(思議)할 수 없는 지혜란 바로 성소작지(成所作智)로서 이 지혜는 능히 사의할 수 없는 일을 짓나니, 이른바 부처님의 키가 1장 6척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아무도 그 정수리를 보지 못한다거나, 털구멍만한 양(量)을 더하지 않으면서 시방 세계에 두루한다거나,일념(一念)으로 이름을 불러 많은 겁의 중죄(重罪)를 아주 멸한다거나, 십념으로 덕을 생각하여 계외(界外)의 과보를 능히 낸다거나 하는 등,
이런 일은 하지(下智)의 범부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의할 수 없는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不思議智者 是成所作智 此智能作不思議事 謂如不過丈六之身 而無能見頂者 不增毛孔之量 而遍十方世界 一念稱名 永滅多劫重罪 十念念德 能生界外勝報 如是等事 非下智所測 是故名爲不思議智
일컬을 수 없는 지혜란 바로 묘관찰지(妙觀察智)로서 이 지혜로 일컬을 수 없는 경계를 관찰하나니, 이른바 모든 법은 다 요술이나 꿈과 같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겨 말만을 쫓는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 그러므로 일컬을 수 없는 지혜라 한다.
不可稱智者 是妙觀察智 此智觀察不可稱境 謂一切法 皆如幻夢 非有非無 離言絶慮 非逐言者所能稱量 是故名爲不可稱智
대승의 넓은 지혜란 바로 평등성지(平等性智)로서 이 지혜는 널리 건지고 소승을 향하지 않나니, 이른바 <나>(我)가 없는 경지에 놀기 때문에 나 아닌(無我) 것이 없고 나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모두를 평등하게 포섭한다.
이 동체(同體)의 지혜의 힘으로 무변한 중생을 두루 실어 모두 위없는 보리에 함께 이르게 하나니, 그러므로 대승의 넓은 지혜라고 한다.
大乘廣智者 是平等性智 此智廣度 不向小乘 謂遊無我故無不我 無不我故 無不等攝
以此同體智力 普載無邊有情 皆令同至無上菩提 是故名爲大乘廣智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란 바로 여래의 대원경지(大圓鏡智)로서 이것은 처음으로 본식(本識)을 움직여 바야흐로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서는 일체의 경계를 모두 뚜렷이 비추나니, 그러므로 대원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無等無倫最上勝智者 正是如來大圓鏡智 始轉本識 方歸心原 一切種境 無不圓照 是故名爲大圓鏡智
이 대원경지에는 다섯 가지 뛰어남이 있다.
즉 저 해탈신(解脫身) 따위는 이승이 똑같이 얻는 것이지만 이 대원경지는 바로 법신으로서 저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같음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이 그 첫째 뛰어남이다.
앞의 세 가지 지혜는 보살이 차츰 얻는 것이지만 이 대원경지는 부처님만이 단박 증득하는 것으로서 다시는 다른 동류(同類)가 없다.
그러므로 짝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이 그 둘째 뛰어남이다.
사의할 수 없는 지혜보다 더 뛰어난 것이 최(最)가 되고, 일컬을 수 없는 지혜보다 뛰어난 것이 상(上)이 되며, 대승의 넓은 지혜보다 더 넓은 것이 승(勝)이 되나니, 이것을 셋째, 넷째, 다섯째의 뛰어남이라 한다.
此一智中 有五殊勝
如解脫身 二乘同得 如是鏡智 正是法身 非彼所共
故名無等 是一勝也
如前三智 菩薩漸得 大圓鏡智 唯佛頓證 更無餘類
故名無倫 是二勝也
過於不思議智爲最 踰於不可稱智爲上 寬於大乘廣智爲勝 是爲第三四五勝也
그러므로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是故名爲無等無倫最上勝智
이것은 사의가 미혹되는 경계를 나타낸 것이다.
是顯四疑所迷境也
다음에는 네 가지 의혹하는 모양을 밝히는 것이니, 이른바 어떤 한 성품이 질직(質直)하지 않아 삿되게 총명하고 거만하며 도심(道心)이 엷은 사람은 사지(四智)를 알지 못하고 사의(四疑)를 일으키는 것이다.
次明四種疑惑相者 謂如有一性非質直 邪聰我慢 薄道心人 不了四智 而起四疑
그 첫째 의심이란 성소작지로 만드는 일을 의심하는 것이니, 이른바 십념으로 염불하면 저 국토에 왕생한다는 경전의 말을 듣고 그 까닭을 몰라 의심하는 것이다.
一者疑成作事智 所作之事 謂聞經說十念念佛 得生彼國 由不了故 生疑而言
즉 불경에 말하기를 “선업도(善業道), 악업도와 죄와 복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 무거운 것이 앞에서 끌고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일생 동안 갖은 악을 다 짓고도 다만 십념으로 모든 죄를 다 멸하고 저 국토에 왕생하며, 정정취에 들어가서는 삼도(三途)를 영원히 떠나 끝까지 물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본래부터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는 삼계(三界)에 얽매어 서로 묶고 있는데, 어떻게 2륜(輪)의 번뇌를 끊지 않고 바로 십념으로 삼계를 벗어날수 있겠는가” 한다.
이런 그릇된 생각의 의심을 다스리기 위하여 사의할 수 없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 지혜에 큰 힘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如佛經說善惡業道 罪福無朽 重者先牽 理數無差
如何一生無惡不造 但以十念能滅諸罪 便得生彼 入正定聚 永離三途 畢竟不退耶
又無始來 起諸煩惱 繫屬三界而相纏縛 如何不斷二輪煩惱 直以十念出三界外耶
爲治如是邪思惟疑 是故說名不思議智 欲顯佛智有大勢力故
가까운 것을 먼 것으로 만들고 먼 것을 가까운 것으로 만들며, 무거운 것을 가벼운 것으로 만들고, 가벼운 것을 무거운 것으로 만드는 등 진실로 이런 일이 있지만 그것은 사량(思量)의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바로 우러러 믿어야 하는 것이다.
경전의 말씀은 스스로의 얕은 식견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니, 만일 믿음을 내고자 한다면 사실을 들어 말해야 할 것이다.
能以近爲遠 以遠爲近 以重爲輕 以輕爲重 雖實有是事 而非思量境 所以直應仰信
經說不可以自淺識思惟 若欲生信 應以事況
비유하면 천 년 동안에 섶을 쌓아 그 높이가 백 리인데, 팥알만한 불로 하룻 동안 그것을 다 태워 버린다 하자. 그렇다면 그때에 과연, ‘천년 동안 쌍은 섶을 어떻게 하룻동안에 다 태워 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앉은뱅이가 제 힘으로 부지런히 나아가 여러 날만에 1 유순을 갔는데 그가 남의 배를 타고 풍세(風勢)에 의해 하룻동안에 천 리를 갔다면, 과연 그 때에, ‘앉은뱅이 신세로 어떻게 하룻동안에 천리를 갈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해서 되겠는가?
세간의 뱃사공도 이런 생각 밖의 일을 할 수 있거늘, 어찌 여래 법왕(法王)님의 힘으로 그런 사의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하겠는가.
譬如千年積薪 其高百里 豆許火燒 一日都盡 可言千年之積薪 如何一日盡耶
又如벽者 自力勤行 要逕多日至一由旬 若寄他船 因風帆勢 一日之間 能至千里 可言벽者之身 云何一日至千里耶
世間船師之身 尙作如是絶慮之事 何況如來法王之勢 而不能作不思議事耶 (앉은뱅이벽=?+足)
이것을 첫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是爲對治第一疑也
둘째 의심이란 이른바 묘관찰지로 관찰하는 경계를 의심하는 것이니,
이 경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찬탄하기를 “묘관찰지로 모든 법을 관찰하면 그것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변(二邊)을 멀리 떠났으면서도 또한 중도(中道)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중생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의심하기를 “지금 물건 다는 것을 볼 때 물건이 무거우면 내려가고 물건이 가벼우면 반드시 올라간다.
그런데 만일 가벼워도 올라가지 않고 무거워도 내려가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런 말은 말만 있고 뜻은 없는 것이니, 인연으로 생기는 법도 그런 줄 알아야 한다.
만일 실로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곧 있다는 데에 떨어지고, 만일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곧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없는 것이 아니면서 있을 수도 없고, 있는 것이 아니면서 없는 것에 떨어지지도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무거우면서 내려가지 않고 가벼우면서 올라가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이런 말은 말만 있고 실(實)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二邊 - 상대하는 두 가지 입장. 대립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주장. 예를 들면, 유(有)와 무(無), 득(得)과 실(失), 선(善)과 악(惡).
第二疑者 謂疑妙觀察智 所觀之境
如同經中歎佛智云 妙觀察諸法 非有非無 遠離二邊 而不著中
由不了故 生疑而言 如今現見稱物之時 物重卽低 物輕必擧 若言輕而不擧 重而不低 如是說者 有言無義 因緣生法 當知亦爾
若實非無 便墮於有 如其非有 卽當於無
若言非無而不得有 非有而不墮無 卽同重而不低 輕而不擧
故知是說 有言無實
그러나 이와 같이 양(量)을 헤아리는 것은 곧 여러 극단[邊]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른바 혹은 다른 것에 의지한 것은 실로 있고 공(空)이 아니라고 집착하여 무거우면 기우는 것에 떨어지고, 혹은 인연으로 생긴 것은 공(空)이어서 없는 것이라고 집착하여 가벼우면 올라간다는 것에 떨어지며, 혹은 속(俗)은 있고 진(眞)은 공이라고 헤아리면서 2변(邊)을 모두 저버려 상위론(相違論)에 떨어지고, 혹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헤아리면서 한 중변(中邊)에 집착하여 우치론(愚痴論)에 떨어진다.
如是稱量 卽墮諸邊 或執依他實有不空 墮增益邊 或執緣生空無有 墮損減邊 或計俗有眞空 雙負二邊 墮相違論 或計非有非無 著一中邊 墮愚癡論
이것은 저 “석론(釋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곧 우치론이다.
그러므로 이런 그릇된 헤아림의 고집을 다스리기 위해 일컬을 수 없는 지혜를 안립(安立)하여, 모든 법은 매우 깊어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어 생각하거나 헤아릴 수 없지만 그 말대로 뜻을 취한 것임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如釋論云 非有非無 是愚癡論故
爲治此等邪稱量執 是故安立不可稱智 欲顯諸法甚深 離言絶慮 不可尋思稱量 如言取義
또 저 “유가론”에서 “매우 깊어 보기 어려운 법이란, 이른바 일체의 법이다.
희론(戱論)을 없애고 언어의 길을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설(言說)에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비로소 취할 수 있고 볼 수도 있고 깨달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매우 깊어 보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如瑜伽說 云何甚深難見法 謂一切法
何以故 第一甚深難見法者 所謂諸法自性 皆絶戱論 過言語道
然由言說爲依止故 方乃可取可觀可覺
是故諸法甚深難見
이것을 둘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 한다.
是爲對治第二疑也
셋째 의심이란 이른바 평등성지(平等性智)등으로 두루 제도한다는 뜻을 의심하는 것이다.
第三疑者 謂疑平等性智等 齊度之意
저 경의 “모든 중생은 다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는 이는 다 보리를 얻는다”라는 말을 듣고 그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의심하기를
“만일 여래와 중생이 다 불성이 있고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여 모두 위없는 보리를 얻게 한다면, 비록 중생이 많다 하더라도 반드시 다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후의 부처님은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교화 받을 이가 없기 때문이며, 부처가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니 그것은 공덕이 없기 때문이다.
교화하는 일이 없이 공덕이 있을 리 없고, 공덕이 없이 부처가 된다는 것도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런 그릇된 억측으로 대승을 비방하고 평등하게 널리 구제하는 뜻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런 협소(狹小)한 의심의 집착을 다스리기 위하여 대승의 넓은 지혜를 굳게 세워 부처님의 지혜를 밝히려 하는 것이다.
如聞經說 一切衆生 悉皆有心 凡有心者 當得菩提 由不了故 生疑而言
若如來衆生 皆有佛性 悉度一切有情 令得無上菩提者 是卽衆生雖多 必有終盡 其最後佛 無利他德 所化無故 卽無成佛 功德闕故 無化有功 不應道理 闕功成佛 亦無是處
作是邪計 誹謗大乘 不信平等廣度之意 爲治如是狹少疑執 是故安立大乘廣智 欲明佛智
운반하지 않는 것이 없고 싣지 않는 것이 없어 일체가 모두 무여(無除)에 들어가기 때문에 대승이라고 하고, 그 운반하고 싣는 것이 처음도 끝도 없기 때문에 넓은 지혜라 한다.
왜냐 하면 허공은 그지없기 때문이며,
중생은 수가 없고 삼세는 짬[際]이 없기 때문에 생사도 처음도 끝도 없다.
無所不運所不載 一切皆入無餘 故言大乘 其所運載 無始無際 故名廣智
所以然者 虛空無邊故 衆生無數量 三世無際故 生死無始終
중생이 처음도 끝도 없으면 부처님도 처음도 끝도 없을 것이니, 만일 부처에게 처음 된다는 일이 있다면 그 전에는 부처가 없을 것이며,
따라서 성스러운 가르침도 없을 것이요, 성스러운 가르침이 없으면 듣는 이도 없을 것이며, 말이 없으면 익힐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되었다면 그것은 인이 없이 과가 있다는 것이니 다만 말만 있고 실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에게는 처음이 없는 것이다.
衆生旣無始終 諸佛亦無始終 若使諸佛有始成者 其前無佛 卽無聖敎 無敎無聞 無言無習
而成佛者 卽無因有果 但有言無實
由是道理 諸佛無始
그러나 실로 처음이 없다 하지만 어떤 부처도 본래 범부가 아니었던 일이 없을 것이며,
비록 다 본래 범부였더라도 계속해 올라가면 처음이 없을 것이리, 이로써 중생이 끝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로 끝이 없다 하더라도 한 사람도 뒤에 부처가 되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며,
비록 뒤에 다 부처가 되더라도 계속해 가면 끝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평등성지가 제도하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 한정이 있는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雖實無始 而無一佛本不作凡 雖皆本作凡 而展轉無始 以是准知衆生無終
雖實無終 而無一人後不作佛 雖悉後作佛 而展轉無終 是故應信平等性智 無所不度 而非有限
그 때문에 대승의 넓은 지혜를 굳게 세우는 것이니, 이것을 셋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所以安立大乘廣智 是爲對治第三疑也
넷째 의심이란 대원경지를 의심하는 것으로 이른바 경계를 두루 비추는 뜻을 의심하는 것이니 어떻게 의심하는가?
第四疑者 謂疑大圓鏡智 遍照一切境義 云何生疑
그는 이렇게 말한다.
즉, “허공이 가없기[無邊] 때문에 세계도 가없고,
세계가 가없기 때문에 중생도 가없으며,
중생이 가없기 때문에 심행(心行)의 차별과 근성과 욕망 등이 다 가없을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점점 닦아서 아는가?
혹은 닦지 않고 단박 비추어 아는가?
만일 닦지 않고 단박 안다면 모든 범부들이 다 평등하게 비추어 알 것이니, 다같이 닦지 않기 때문이며 다른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일 점점 닦아 마지막에 점점 다 알 수 있다면, 일체의 경계는 가 없는 것이 아닐 것이니 가 없으면서 다함이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진퇴(進退)에 따라 다 성립 될 수 없는데 어떻게 두루 비춘다 하여 일체종지라 할 수 있겠는가?” 한다.
그래서 이런 두 관문의 의심을 대치하기 위해,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를 굳게 세워, 이와 같은 대원경지를 밝히려는 것이다.
謂作是言
虛空無邊故 世界亦無邊 世界無邊故 衆生亦無邊 衆生無邊故 心行差別 根欲性等 皆是無邊際 云何於此 能得盡知
爲當漸漸修習而知 爲當不修 忽然頓照 若不修習而頓照者 一切凡夫皆應等照 等不修故 無異因故
若便漸修 終漸得盡知者 卽一切境非無邊際 無邊有盡 不應理故 如是進退 皆不成立 云何得普照 名一切種智
爲治如是兩關疑難故 安立無等無倫最上勝智 欲明如是大圓鏡智
삼지(三智)를 뛰어 넘어 등류(等類)가 없고, 이제(二諦)의 밖에 홀로 있어 둘이 없으며,
양관(兩關)의 이표(二表)에 초연하여 관계가 없으므로 다만 우러러 믿을 뿐이요, 비량(比量)할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
超過三智 而無等類 二諦之外 獨在無二 兩關二表 ?然無關 只應仰信 不可比量 故名無等無倫最上勝智
어떻게 여기에 대해 우러러 믿음을 일으킬 수 있는가.
비유하면 세계가 끝이 없지만 허공 밖을 나가지 않는 것처럼, 온갖 경계가 무한하지만 모두 한 마음안에 들어간다.
부처의 지혜는 모양을 떠나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지혜와 한 마음은 완전히 같아 둘이 없는 것이니, 그것은 시각(始覺)이 곧 본각(本覺)과 같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한 경계도 이 지혜 밖을 벗어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다하지 않는 경계가 없으면서도 한정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무한한 지혜로 가없는 경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云何於此起仰信者
譬如世界無邊 不出虛空之外 如是萬境無限 咸入一心之內
佛智離相 歸於心原 智與一心 渾同無二 以始覺者 卽同本覺 故無一境 出此智外
由是道理 無境不盡 而非有限 以無限智 照無邊境故
이것은 저 “기신론”에서 “일체의 경계는 본래 한 마음으로서 상념(想念)을 떠난 것인데, 중생들이 망녕되게 정계를 보기 때문에 마음에 분별과 한계가 있게 되고, 망녕되게 상념을 일으켜 법성(法性)에 맞지 않기 때문에 결단해 알지 못하지만, 모든 부처님은 본다는 생각을 떠나 두루하지 않는 것이 없나니, 그것은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은 곧 모든 법의 성품으로서 그 자체가 일체의 망녕된 법을 환히 비추며, 큰 지혜의 작용과 무량한 방편으로 중생들의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 모든 법의 이치를 다 열어 보이나니, 그러므로 이것을 일체 종지라고 하며, 이것은 같음이 없고 짝이 없는 최상의 뛰어난 지혜라고 한다.
그것은 보는 바가 없기 때문에 보지 않는 것이 없나니, 이것을 넷째 의심을 대치하는 것이라 한다.
如起信論云 一切境界 本來一心 離於想念 以衆生妄見境界故 心有分齊 以妄起想念 不稱法性故 不能決了 諸佛如來離於見相 無所不遍 心眞實故
卽是諸法之性 自體顯照一切妄法 有大智用 無量方便 隨諸衆生所應得解 悉能開示一切法義 是故得名一切種智 是爲無等無倫最上勝智
無所見故 無所不見 如是對治第四疑也
만일 이것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말과 같이 뜻을 취해 유변(有邊)이나 무변(無邊)에서 다 허물을 떠나지 못할 것이니, 유변이 아닌 문을 의지하여 짐짓 무변을 말했을 뿐이다.
만일 누구나 이런 사의(四疑)를 해결하지 못하면 비록 저 국토에 나더라도 변방에 살게 될 것이며, 또 만일 어떤 사람이 앞에서 말한 사지(四智)의 경계를 밝게 알지 못하더라도 마음의 눈이 열리지 못했다고 스스로 겸손하여, 부처님을 우러러 생각하면서 한결같이 엎드려 믿으면, 그런 사람은 그 행품(行品)을 따라 저 국토에 왕생하되 변방에 살지 않을 것이며, 만일 변방에 난다면 그들은 별류(別類)로서 구품(九品)에 나지 못할 것이니, 그러므로 함부로 의혹을 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然若不得意 如言取義 有邊無邊 皆不離過 依非有邊門 假說無邊義耳
若人不決如是四疑 雖生彼國而在邊地 如其有人 雖未明解如前所說四智之境 而能自謙 心眼未開 仰惟如來 一向伏信 如是等人 隨其行品往生彼土 不在邊地 生著邊者 別是一類 非九品攝 是故不應妄生疑惑也
兩卷無量壽經宗要(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