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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문, 십자가의 길
시편 118:19-29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사순절 여섯째 주일이다.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되는 날이다. 첫날 예루살렘 입성부터,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 무덤에 계신 토요일까지 고난주간의 절정을 보낸다.
교회 전통에서 부활절을 앞둔 한 주간을 성 주간(Holy Week)이라 부른다. 동방교회는 성 주간의 모든 날들 앞에 성(聖)을 붙여 성월요일, 성화요일... 특히 무덤에 계신 날을 성대(大)토요일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참 거룩하고, 귀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속적 죽음이다.
고난주간 ‘트리둠’ 제도가 있다. 고난주간 중 3일(Triduum)은 세족 목요일과 성금요일, 성토요일로 지키며 더욱더 엄숙히 주님의 삶, 고난과 부활의 의미를 되새기려는 것이다.
사순절을 엄격히 지키는 배경이 있다. 초대교회가 고난과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입회원이 되려면 마음가짐, 몸가짐의 각오와 다짐이 남달라야 하였다.
사순절은 금식 절기다. 주일을 뺀 사순절 기간 내내 교회 예배당의 회중석과 성가대석 중간에 사순절 막을 내렸다. 회중들이 사순절임을 명심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순절 막을 ‘굶주림의 막’이라고도 불렀다.
색동교회는 교회 전통에 따라 약식으로 하루 한 끼 금식을 한다. 거룩한 주간임을 몸으로 기억하고 새기려는 뜻이다. 그리고 이웃 나라의 아픔과 연대한다.
중요한 것은 교회 전통 이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 53:5).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거룩하신 사랑이 이 한 주간 동안 하루씩, 하루씩 날마다 여러분의 말과 생각과 일상생활 속에서 내 믿음의 흔적처럼 기억되기를 바란다.
1)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과 자신의 관계를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헬라어 번역 시편에서 무수히 많은 메시야 예언을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시 22편과 118편은 종려주일과 수난주간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오늘 본문은 호산나 찬양과 버린 돌과 머릿돌 말씀이다. 종려주일과 관련한 익숙한 말씀들이 본문 안에 있다.
25절과 26절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의 외친 말씀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호와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25).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26).
이 말씀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의 외침이었다. 4복음서 모두에서 인용하고 있다.
특히 22절 말씀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21장에서 직접 인용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버림받은 주님은 다시 하나님이 회복시키신다는 의미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22).
예수님은 마치 십자가 사건처럼,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취급하여 내다 버린 돌과 같았으나, 부활하셔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귀한 쓰임을 받았다.
건축자이신 하나님의 위대성은 버린 돌을 사용하여 구원의 집의 머릿돌로 삼으셨다는 사실에서 더욱 빛난다. 세상의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머릿돌로 하여, 십자가와 부활을 신앙고백으로 하여 세움 받은 신앙공동체이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사 28:16).
이렇듯 시편 118편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바로 나의 주님 되심을 깨닫게 한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른 채 방황하던 그들은 십자가의 신비와 하나님의 사랑을 뒤늦게 발견하였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시편에서 예언과 찬양의 말씀을 통해 확신을 얻고, 용기를 내었다. 이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신뢰할 수 있었다. 우리도 같은 믿음의 기초 위에 서 있다. 이를 메시야적 관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고난주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곧 나의 주님이심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새롭게 배운다. 이러한 든든한 믿음을 바로 세우기를 바란다.
2)
종려주일의 상징들을 생각해보자. 호산나를 찬양하는 무리, 어린 나귀, 종려나무 가지, 돌들의 외침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시편 118편은 ‘구원의 문’에 대해 우리의 생각을 일깨워 준다. 예수님이 영광의 예루살렘 성문에 입성하신다.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시 118:19-20).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단순한 기념 주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구원의 문’에 들어가며,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에 들어갈 것을 다짐한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이며, 대표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초기에는 너무 잔인한 까닭에 사랑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리스도교 심벌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바울은 십자가야 말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고전 1:23)이라고 강조한다.
십자가에서 죄인의 몸으로 사형당하신,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버림받은, 비참한 죽음조차 조롱과 멸시로 외면당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러한 십자가 사건을 살펴보면 십자가 사건 후에 ‘예수가 그리스도시다!’라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그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분일 수 있는가! 그럼에도 십자가는 복음 전파의 유일무이한 증거였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누가 뭐래도 십자가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지적소유권을 가진 교회와 성당들은 십자가라는 브랜드 활용에 한참 뒤처진 느낌이다.
교회 건물을 보라. 건물 첨탑과 외벽 그리고 입구에 크고 작은 십자가를 세웠지만, 남들에게는 그곳이 무엇을 하는 공간임을 알려주는 표식일 뿐이다. 그 십자가는 일상의 안식처라는 믿음도, 회복과 치유의 이미지도, 앞장서서 마이너스(-)의 희생을 실천한다는 신뢰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밤에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 숲을 보면, 십자가가 외려 불편해 보인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상처받은 치유자’(헨리 나우웬)라는 것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치료를 하기 위해 먼저 스스로 상처를 받은 분이라는 의미이다. 아픈 자, 외로운 자, 가난한 자, 억눌린 자를 치유하시려고 먼저 아프고, 외롭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가 되신 분이다. 모든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죽임 당하신 대속자요, 구원자이시다.
예수님은 ‘상처받은 치유자’로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먼저 십자가의 상처와 고통과 아픔과 죽음을 묵묵히 순종하심으로 감당하셨다.
서울 광화문과 시청 사이에 성공회대성당이 있다. 대한성공회 주교좌성당이라고 불리는 이 건물은 참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배당이었다. 꼭 98년 전인 1926년에 봉헌식을 했는데,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 전통건축기법을 조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한동안 이 건물은 빌딩에 가려 있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감춰진 역사 기념물 취급을 받았다. 영국대사관과 덕수궁 사이에서 구시대의 유물 혹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산 같아 못마땅하였다.
이 대성당이 사람들의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초여름이었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전기를 마련한 1987년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된 곳이, 바로 성공회대성당이었다. 도로에 6.10 민주화 기념비가 있다. 지금은 노숙자를 위한 나눔과 사회적 봉사가 있는 곳으로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다 죽어가는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함성이 시작된 곳,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 사람 대접을 받는 곳, 이것이 버림받은 돌이 머릿돌이 되는 교회의 모습이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전도하던 베드로는 고침받은 앉은뱅이 거지를 보고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행 4:10).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던 (행 4:11) 분이라는 것이다. 그 이름은 천하 사람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자요, 둘도 없는 하나님의 메시야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난주간에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곧 나의 주님이심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새롭게 배운다. 이러한 든든한 믿음을 바로 세우기를 바란다.
3)
시편 118편은 순례자들의 찬양이다. 장막절 시편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첫 번째 장막절을 축하한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장막절은 무엇인가? 이것은 출애굽 한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던 고난의 삶, 해방의 삶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명절마다 성전 문으로 올라가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시작과 끝이 마치 후렴구처럼 같은 말씀으로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중심 메시지는 하나님의 ‘헤세드’ 즉 인자하심, 사랑, 친절하심, 자비, 신실하심, 은혜, 약속을 찬양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9).
그 성전은 무엇인가? 먼저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25)라는 간구처럼, ‘호산나’의 외침이 있는 곳이다.
또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26)처럼 성전은 내 삶이 위로받고, 회복되고, 은총을 누리는 집이다.
그리고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찌어다”(27)처럼 죄인을 용서하고, 억울한 사람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세상의 피난처와 같은 곳이다. 성전은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집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자기 육체를 기초로 성전을 삼으라고 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심벌은 십자가이다. 우리의 믿음은 이러한 십자가 사랑 위에 세워진 것이다.
세상에는 보이는 십자가가 전부가 아니다. 나는 가장 큰 십자가가 우리나라 한반도라고 주장한다. 믿음의 눈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우리나라의 현실을 아파하는 마음으로 지도를 보면 십자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주간에 DMZ 평화순례에 참여하였다. 파주에서 고성까지 참여한 사람은 4대 종단에서 14명 정도이고, 매일 방문자들이 어울려 걸었다. 나는 마지막 3일 동안 행렬의 맨 끝에서 동참하였다. 감리교평화통일위원회에서 5명이 참여하였다.
사실 한 겨울에 나 홀로 걷기도 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 수월한 순례였다. 먹을 것과 잠자리가 미리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길을 찾지 않아도 되고, 그냥 앞 사람 뒤를 따라 걸을 수 있었다. 함께 하니 참 수월하였다.
불교 승려 한 분이 마지막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이번 순례 기간 22일 동안 마을회관, 교회, 천주교 공소, 원불교 교당 등에서 밥을 먹고, 잠자리를 제공 받았습니다. 실은 제가 몸담고 있는 절이 제대로 역할을 못해서 미안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절이 무언지 아십니까? 바로 ‘친절’입니다.”
종교가 제 구실을 해야 한다는 일침처럼 들렸다. 세레모니만 할 것이 아니라, 실천하라는 것이다.
카르타고 출신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십자가의 외적인 형태뿐 아니라, 내면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일 모든 일상적인 행동 속에서 십자가를 닮으려고 하였다.
발걸음을 앞으로 옮기고 움직일 때마다,
들어가거나 나갈 때마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을 때에,
목욕할 때에, 식탁에 앉을 때에, 등잔에 불을 켤 때에,
침상에서, 좌석에서, 우리는 이마에 그 표시(십자가)를 그렸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나와 어떤 관계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십자가, 그 가로와 세로 사이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 관계를 찾아보기 바란다.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고난주간과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