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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38) 백사 이항복(上) 미숙아로 태어나 건강하게 자랐던 비결 정지천 <조선일보> 2014년 10월 30일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어릴 적의 재치 있는 얘기라든가 이덕형(李德馨, 1561~1613)과 함께 어울리며 만들어낸 ‘오성과 한음’의 숱한 일화들이 이야기책으로 만화로 수없이 나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항복은 부친 이몽량이 58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더구나 모친이 임신했을 때 병이 들고 파리해지는 바람에 순산을 하지 못할까 두려워서 독약으로 낙태를 시키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탓인지 태어나면서 오른쪽 갈비에서 등이 모두 상해서 피부가 생기지 못했고, 이틀 동안 젖을 빨지 못했으며 사흘 동안 눈을 뜨지 못했고 닷새 동안 울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백사 이항복
그토록 허약하게 태어난 이항복은 어떻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나? 미숙아였던 이항복은 요즘 같으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니 문제없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거의 목숨을 이어가기 어려웠는데, 다행히 살았죠. 9세 때 부친상을 당한 다음 편모슬하에서 자라다 보니 버릇이 나빠지고 품성과 행동이 나쁜 소년이 되어갔습니다. 엄한 아버지를 여읜 뒤로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해서 동네장난꾼들의 대장이 되었던 것이죠. 한창 과거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나이인 15세에 이르도록 매일같이 동네에 나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제기차기, 씨름 등의 놀이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모친으로부터 피눈물 섞인 꾸지람을 듣고 뉘우치고는 그날부터 놀지 않고 공부에 열중해서 25세에 과거에 급제했지요. 그래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정승을 지낸 분으로서는 드물게 청백리(淸白吏)로 녹선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집안 후손들에서 많은 재상이 배출되었고 장수한 분이 많아 장수 집안이 되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만약 이항복이 다른 아이들처럼 어릴 때부터 과거 준비에 나섰다면? 이항복이 어릴 때 공부하지 않고 놀면서 지낸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었죠. 선천적으로 허약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만약 놀이를 통해 체력이 강해지지 않았더라면 제대로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요절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울러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해학과 유머도 갖추기 어려웠겠죠. 15세까지 공부를 시작하지 않고 장난치고 놀면서 지낸 덕분에 몸이 건강해질 수 있었고 유머감각이 몸에 배일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요즘 초등학교 시절부터 운동은 별로 시키지 않은 채 사교육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이의 균형 있는 학습능력을 저해하고 건강과 창의력 개발에 크나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허약한 체질을 타고난 아이들이 이를 개선하지 않고 공부만 한다면 평생 병고에 시달리게 되고 장수는 꿈도 못 꾸게 되는 것이죠.
조선시대에 선비들의 과거 준비는 언제쯤부터 시작되었나? 다산 정약용 선생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네 살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일곱 살에 오언시를 지었으며, 열 살에는 경서와 역사서를 공부하고 문장을 지었다고 합니다. 명문가 자제들 대부분이 그런 코스를 밟았던 것 같습니다.
한음 이덕형의 경우도 어려서부터 문재가 뛰어나 약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뒤,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불과 32세에 학문의 최고봉인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42세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영창대군과 소북파를 제거하려는 계축옥사에 반대하여 삭탈관작을 당하고 낙향한 뒤에 울화가 쌓여 그 해에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편, 이항복과 이덕형이 절친한 사이로 숱한 일화를 남겼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은 백사가 23세, 한음이 18세 때에 생원, 진사 시험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그러니 어릴 때 함께 장난치고 놀았던 적은 없었던 것이죠.
▲한음 이덕형
궁중의 왕세자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나? 사극에서 왕세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장면을 보셨을 겁니다. TV 드라마에서 영조대왕이 나중에 정조대왕이 되는 ‘이산(李祘)’을 엄청 야단치면서 공부를 독려하는 장면이 많았고, 그것을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하여 오래 방송했던 적이 있었죠. 장차 왕이 될 왕세자에 대한 교육은 나라의 미래가 걸려있는 문제라서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세자는 ‘서연(書筵)’이라고 하여 왕이 되기 위한 준비로 세자시강원의 신하들로부터 엄격한 교육 프로그램에 따라 학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웃어른들께 인사드린 후부터 조강, 주강, 석강 등으로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했고, 가끔 성균관의 대제학이나 직제학 같은 학자들로부터 특강을 받기도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 아주 까다로운 선생을 만나 혹독한 교육을 받기도 했지요. 그래서 몸이 허약해진 경우도 많았는데, 역시 공부와 운동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죠.
조선 왕세자의 두뇌 개발을 위한 음식 왕세자의 두뇌 보양식이 바로 ‘조청’입니다. 조청은 쌀이나 찹쌀을 원료로 보리길금을 넣고 고아서 만든 물엿이죠. 포도당의 덩어리인 조청이었던 셈인데, 영양가도 높고 뇌의 활동력을 높여 두뇌를 총명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뇌의 에너지원 중에 80%가 포도당이기 때문이죠. 한의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뇌는 아침 5시에서 7시까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왕자들의 아침공부 시간입니다. 그래서 공부에 들어가기 직전에 포도당을 공급하는 조청을 먹었던 것이죠.
또한 간식으로 무를 썰어 삶은 뒤에 조청에 절인 ‘무 정과’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소문이 퍼져서 양반 가문에서도 활용했고, 심지어 과거에 응시하러 가는 유생들의 짐보따리에 조청 단지가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조청이 약으로도 쓰였나? 어린이 성장을 돕는 한약 처방 가운데 ‘소건중탕(小建中湯)’이 있는데, 이 처방에 조청이 들어갑니다. 조청은 비위장을 돕고 통증을 멎게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원래 ‘건중(建中)’은 비위장을 건실하게 한다는 뜻인데, 중(中)이 우리 몸의 가운데에 위치한 ‘비위장’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소건중탕은 비위장이 허약한 체질의 어린이가 밥을 잘 먹지 않고 배가 아픈 경우에 좋은 약이 되는 것이고, 아울러 두뇌를 총명하게 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는 것이죠. 조청은 그밖에도 폐에 윤기를 주고 기(氣)를 보충하여 기침과 천식을 막아주는 효능이 있고, 해독 작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청은 단맛이 아주 강합니다. 조청을 많이 먹으면 습기와 담이 몸속에 쌓일 수 있으므로 몸이 퉁퉁하거나 열이 많은 사람은 적게 먹어야 합니다. 물론 사탕이나 초콜릿을 먹어도 살이 찌고 비위장에 부담이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총명탕(聰明湯)이 정말 좋을까? 머리를 좋게 하는 약이라면 ‘총명탕’을 첫손 꼽는 분들이 많습니다. 동의보감에는 자주 잊어버리는 것을 치료하며 오래 먹으면 하루에 천 개의 단어를 암송한다고 나오는데, 좀 과장된 표현이죠. 원래 총명이란 ‘귀밝을 총, 눈밝을 명’입니다. 눈과 귀가 밝아야 남보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고 암송할 수 있는 것이죠. 총명탕은 원지, 석창포, 백복신 등이 주된 약재로서 정신을 편안하게 하고 뜻을 굳건하게 하며 건망증을 치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뇌의 활동에 장애를 주는 ‘담(痰)’을 없애 주고 뇌와 심장을 맑게 하므로 머리가 좋아지게 도와 줄 수 있는 것이죠. 담은 몸속의 물기가 열을 받아 가래처럼 끈적끈적하게 된 것입니다.
총명하려면 반드시 신장(腎臟)의 정기(精氣)가 충분해야 합니다. 뇌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데, 한의학에서 뇌에 정기를 공급해 주는 곳이 신장이기 때문이죠. 한의학에서 신장은 콩팥을 비롯한 비뇨기와 생식기, 그리고 호르몬을 포괄한 개념입니다. 뇌, 허리, 뼈, 이빨, 귀, 머리카락 등이 신장의 정기를 받아야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신장계통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신장의 정기가 충실하면 성장 발육, 면역기능, 성기능, 뇌기능이 우수합니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신장의 정기가 부족하게 태어나거나 혹은 큰 병을 앓아 쇠약해지면 성장발육이 부진하고 신체가 허약하며 면역기능이 약하여 잔병치레가 많고 성기능도 약하며 성인병에 잘 걸리고 노화가 촉진될 뿐만 아니라 뇌에 정기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 두뇌가 총명해질 수 없죠.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39) 백사 이항복(中) 청빈하고 검소한 가풍 덕에 후손들도 모두 장수
이항복은 당시로서는 아주 늙으신 아버지로부터 정기를 물려받았는데다 낙태하려고 극약을 복용한 모친으로부터 태어났기에 미숙아로서 겨우 세상에 나왔지만 다행히 15세까지 동네에 나가 어울려 놀기를 즐긴 탓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평생을 해학과 유머 속에 살았기에 임진왜란을 비롯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고 60세를 넘길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항복은 63세에 돌아가셨으니 당시로서는 오래 살았던 것이지만 그렇게 장수한 편은 아닌데, 이유가 있습니다.
이항복이 장수하지 못한 이유는? 첫째, 외롭고 힘든 만년을 보냈습니다. 58세에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 죽인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벌어지자 좌의정 자리에서 내쫓겨 도성을 떠나야 했고, 뚝섬과 노원, 망우리 등지로 이사를 다니면서 4,5년을 가족과 떨어져 외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권력에서 쫓겨난 탓에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고 하는데, 평소 남들과 어울려 재담을 잘 하던 터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갑니다. “슬픔은 그대로 놔둬도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하지만 완전한 기쁨을 얻으려면 그것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보면 함께 할 사람이 곁에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죠. 노년에는 사람들과 많이 어울려야 건강 장수에 유리한데, 이항복은 외롭고 쓸쓸하게 보냈으니 심신이 허약해지고 노화가 진행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게다가 당시 거처는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두실(斗室)에 불과했고, 끼니도 거친 밥에 채소 반찬으로 겨우 이어나가는 정도였습니다. 주거 환경이나 식생활 면에서 노인의 건강을 지키는데 최악의 조건이었죠. 심지어 아들의 혼사를 치를 비용도 없는 지경이었다니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처지에도 이항복은 편안하게 경전에 침잠하여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 산과 물가에 노닐면서, 때로 흥이 나면 노새에 몸을 싣고 동자 하나 앞세워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나서니 그를 보는 사람들은 단지 시골 노인으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그때 지은 시 한 수를 보면 당시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雪後山扉晩不開 溪橋日午少人來 篝爐伏火騰騰煖 茅栗如拳手自煨
눈 온 뒤 산속의 사립은 늦도록 열지 않았고 개울가 다리에는 한낮에도 찾아오는 이 적구나. 화로 안에 묻어놓은 불 대단히 따뜻해 주먹만 한 밤을 손수 구워 먹노라.
둘째, 늙은 나이에 매우 추운 지방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62세 때 대북파에서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려고 하자 부당성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이 진노하여 다음 해에 관작을 삭탈당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이미 중풍으로 고생하던 이항복은 결국 그 곳에서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죠.
만약 귀양만 가지 않았어도 더 오래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귀양지가 그 추운 곳이 아니고 따뜻한 남쪽이었더라도 좀 더 오래 사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노인, 특히 중풍이 온 경우에는 추위가 위험요소이기 때문이죠. 추워지면 혈관벽이 압력을 받아 혈압이 오르게 됩니다. 삼수, 갑산이나 북청 같은 북쪽의 극변지방은 날씨가 매섭게 추운데다 토지가 메말라 먹을 것도 귀하다 보니 귀양 온 분에게 나눠 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반면에 남쪽지방으로 귀양을 가면 겨울에 훨씬 덜 추워 지내기에 좋고 먹을 것도 많지요.
이항복의 후손들은 대대로 장수집안 이항복 대감의 경주이씨 백사공파는 백사 이래로 10명의 정승을 배출하여 <상신록(相臣錄)>을 만들어 보유하고 있는데, 사후에 정승으로 추증된 경우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정승을 지낸 열 분의 나이를 살펴보니 평균 수명이 무려 70.1세나 되었습니다. 두 분이 80세를 넘겼고, 두 분이 70세를 넘겼으며, 단 한 분만이 60세를 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장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승을 지내지 않은 후손들도 대부분 장수했습니다.
후손 가운데 전심전력을 기울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우당(友堂) 이회영 선생의 6형제도 있습니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후에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망명해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수많은 독립군 장교를 양성한 형제들인데, 건영(健榮, 1853~1940), 석영(石榮, 1855~1934), 철영(哲榮, 1863~1925), 회영(會榮, 1867~1932), 시영(始榮, 1869~1953,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호영(頀榮, 1875~1933)입니다. 둘째인 이석영이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기에 가능했던 것이죠. 이 형제들은 59세에 사망한 막내 한 분을 제외하고는 매우 장수한 편입니다. 세 분이 80세를 넘겼으며 평균 수명이 73.5세나 됩니다. 만약 우당 선생이 일제에 체포되어 중국 대련(大連)의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다가 66세에 사망하지 않았다면 평균수명이 훨씬 더 올라갔을 것이죠.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이회영(왼쪽)과 이시영
이항복의 후손들이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 우선 청백리로 선정된 이항복의 청빈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가풍을 이어받았기에 장수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우당 형제의 장수는 우연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 마음이 넓고 편안해져 건강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으로 여겨지는데, 물론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좋은 일을 할 수 있겠죠.
실제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1998년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봉사활동을 하거나 선한 일을 보기만 해도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사람의 침 속에 들어 있는 면역항체 'Ig A'는 근심이나 긴장상태가 지속되면 줄어드는데, 봉사와 사랑을 베풀며 일생을 보낸 테레사 수녀(1910~1997)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본 학생들의 'Ig A' 수치가 일제히 높게 나타났기 때문이죠. 그래서 남을 돕는 활동을 통하여 일어나는 변화를 ‘마더테레사 효과’ 또는 ‘슈바이처(1875~1965) 효과’라고 합니다. 물론 테레사수녀는 88세, 슈바이처박사는 91세까지 장수했죠.
▲테레사 수녀(왼쪽)와 슈바이처.
이와 함께 실제로 남을 도우면 최고조의 기분을 느끼게 되는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도 있습니다.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돌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고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하고 기부한다면 분명 건강 장수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지천의 명인들 건강장수비결(40) 백사 이항복(下) 돈안들고 자손대대로 장수하게 만든 비결
이항복은 청빈하고 검소하게 생활한데다 유머도 있었지만 워낙 어려운 시기를 지냈고 매섭게 추운 북방으로 귀양 가는 바람에 장수하지 못했지만 후손들은 대부분 장수했습니다. 그것은 이항복의 유머가 후손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이항복의 유머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임진왜란을 당하고 다음 달에 이항복은 불과 3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국방부장관)의 중임을 맡았습니다. 나라 땅의 끝까지 피난을 가서 언제 국경 밖으로 내몰릴지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던 의주 행재소에서 이항복이 한마디씩 던진 우스갯소리는 선조와 대신들을 웃게 만들어 잠시나마 긴장을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항복은 농담, 재담이 전매특허인 유머꾼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처칠수상도 “유머가 풍부할수록 위기에 강하다”고 하였죠. 나라가 결딴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이항복이 익살과 해학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랬기에 뛰어난 외교 솜씨를 발휘하여 전쟁 중의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이항복처럼 해학과 풍자가 뛰어난 인물도 드물다고 할 정도였기에 그에 관한 많은 얘깃거리가 전해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항복은 농담, 재담이 전매특허인 ‘유머꾼’이었다고 할 수 있으니 요즘으로 본다면 인기 개그맨 수준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백사 이항복과 윈스턴 처칠.
이항복 후손들의 장수와 유머 이항복의 유머는 후손들의 삶에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항복은 사람들과 어울려 재담으로 좌중을 휘어잡는 ‘분위기 메이커’의 역할을 했으니 그의 인맥은 엄청 넓었을 것이고, 집안사람들에게도 그의 면모가 발휘되었을 것입니다. 유머가 있는 분위기에서 웃음과 더불어 살아온 후손들은 어려움에 처했어도 여유를 잃지 않으며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삶의 지혜를 스스로 터득했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폭넓은 교유 관계를 가졌을 것이니 벗들과 잘 어울린 것도 장수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웃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면 그것이 바로 활성산소를 억제하는 항산화제가 되기 때문이죠. 실제로 웃음이 면역력 증강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정신신경 면역학에 의하면 스트레스와 불안, 초조, 욕심 등은 교감신경을 항진시켜 면역력이 억제되고, 웃음은 부교감신경을 항진시켜 면역력이 증강된다고 합니다. 웃으며 삽시다. 그렇지만 너무 많이 웃거나 억지로 웃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장수와 유머의 연관 미국의 보스턴 의대 신경과 마저리 실버 교수팀은 “백세가 넘게 장수하는 사람들은 힘든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사고와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등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공통점이 많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백세 넘게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건강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흡연, 운동, 교육 수준, 사회적 지위 등 어느 항목에서도 공통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50년 동안 하루에 두 갑 이상의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었고, 집안 일 외에는 따로 운동이라곤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죠. 건강에 관련된 특징적인 공통점이 별로 없지만 모두들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잘 웃는다는 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경주이씨 백사공파의 장수는 이것과 연관되지 않나 싶습니다. 웃으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면 그것이 바로 활성산소를 억제하는 항산화제가 되기 때문이죠.
억지로 웃거나 심하게 웃는 것도 좋을까? 영국 옥스퍼드대와 브링엄대 공동 연구팀은 웃음이 신체에 긍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영국의학저널(2013년 크리스마스판)’에 발표했습니다. 1946년부터 게재된 웃음이 주는 신체 영향에 관한 논문을 분석한 결과 긍정적인 영향도 주지만 자칫하면 신체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죠. 특히 심장 질환이 있는 사람이 갑자기 크게 웃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는데, 어느 심장병 여성은 갑자기 폭소를 여러 차례 한 후 심장 파열에 이르러 사망했다고 합니다. 또한 갑자기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웃는 웃음은 천식을 유발할 수 있고 과도하게 웃으면 두통, 간질성 발작, 탈장 등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중용(中庸)과 조화(調和)를 기본으로 하는 한의학에서도 당연히 어느 감정이든 지나치면 해로운 것으로 봅니다. 당나라의 명의로 102세까지 장수했던 손사막(581~682) 선생의 양생 장수비법에 12가지를 적게 하라는 것이 있는데, 많을수록 좋다고 알려져 있는 즐거움, 기쁨, 좋아함은 물론이고 웃음도 적게 하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탈이 생기기 때문이죠. 한의서에는 “심장에 나쁜 기운이 많으면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심장병의 외부적인 증상은 얼굴이 붉고 입이 마르며 잘 웃는다” 등 심장의 이상에 의해 웃음이 많이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중풍에 걸린 환자 중에 이유 없이 자꾸 웃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지나치면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기에 감정은 우리 몸 오장에 직접 영향을 줍니다. 화내는 것은 간장, 기쁜 것은 심장, 생각하는 것은 비장, 두려움이나 놀라는 것은 신장에 연계되고 슬픔과 근심은 폐와 연계됩니다. 그래서 우울하고 슬픔에 빠져 지내는 사람은 폐 건강이 좋지 못한 편이죠. 슬픔이 생기면 폐포엽이 모두 위로 들려서 인체 상부의 기도를 막아버리기 때문에 기(氣)가 흩어지지 못해 열기가 흉중에 머물러 기가 소모되어 버립니다.
만약 근심, 걱정과 슬픔이 지나친 경우가 계속되면 기운을 아래로 내려가게 하여 한숨이 나오게 하고 폐 기운을 손상시킵니다. 그래서 폐가 있는 어깨 부위가 축 쳐지게 되고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집니다. 이어서 간장, 심장, 비장까지 상해서 몸과 마음이 크게 나빠져 중병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특히 근심과 슬픔이 심하면 기의 소통을 막아 기울(氣鬱)을 일으키는데, 이렇게 되면 폐가 크게 상하게 되고 의욕도 떨어져 생기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폐에 병이 생기면 다른 장기에 비하여 유달리 빠르게 진행되고 다른 곳으로도 빠르게 옮겨지게 되는 것이 문제죠. 실제로 폐암의 진행은 다른 암에 비해 매우 빠릅니다. 그것은 폐가 우리 몸을 순환하는 기(氣)를 주관하기 때문이죠.
지나친 감정은 다른 감정으로 조절해야 특정한 감정이 지나칠 경우 다른 감정으로 조절해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동의보감>에 오행(五行 : 木火土金水)의 상극(相剋) 관계에 따라 감정으로 치료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근심과 슬픔은 오행 중에서 금(金)에 속하므로 ‘화극금(火克金)’에 의하여 상극이 되는 화(火)로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화(火)에 속하는 기쁜 감정이 근심과 슬픔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우울하고 슬플 때는 크게 웃고 나면 마음이 풀어지게 됩니다. 코미디, 개그를 보면 되는 것이죠. 특히 가을은 오행 중에 금(金)에 속하므로 우울한 감정이 많은 편이니 웃는 일이 자주 있으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선의 임금들도 막중한 국사의 중요 사항을 결정해야 하고 신하들의 도전, 그리고 왕비와 후궁 및 왕자들의 문제 등으로 스트레스가 엄청났는데, 내시 중에 ‘웃음내시’가 있었다고 합니다. 웃음내시는 오로지 임금을 웃기는 일을 맡았으니 웃음거리를 이야기해 주거나 웃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줌으로써 왕의 스트레스와 근심을 풀어주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죠.
웃음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웃음이 명약이란 사실은 틀림없지만 모든 감정을 웃음으로 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화가 많이 나서 간장이 상하게 될 때는 웃기보다 오히려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목(木)에 속하는데 금(金)에 해당되는 슬픈 감정이 ‘금극목(金克木)’으로 억제하기 때문이죠. 실제로 크게 화날 때는 웃을 것이 아니라 울어버려야 마음이 풀어지고 속이 후련해지면서 가라앉게 됩니다.
가난한 살림살이로 온갖 짜증날 일이 많았던 70년대에 주부들은 밤이면 이웃집의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멜로드라마를 보면서 눈물 흘리며 그날그날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바람에 화병(火病)이 생기는 것도 어느 정도 예방이 되었을 겁니다. 한편, 기쁨이 넘쳐서 주체할 수 없을 때에는 공포 영화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기쁨은 화(火)에 해당되는데 수(水)에 해당되는 무서운 감정이 ‘수극화(水克火)’로서 화(火)를 제압하기 때문이죠. 오성과 한음 이야기 어느 날, 웬 농부 하나가 오성과 한음을 찾아왔다. “도련님들, 소문에 두 분이 신동이시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부디 제 억울한 사정 좀 해결해주십시오.” 농부는 코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며 간청했다.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관청의 사또께 찾아가야 왜 우리를 찾아왔지?” 한음이 말했다. “사또께 찾아가야 해결되지 않을 일이기에 도련님들을 찾아왔습지요.” “그래? 도대체 무슨 일인지 들어보기나 하지.” 오성은 농부에게 사연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그러자 농부가 자초자종을 털어 놓았다.
며칠 전, 농부의 아내가 들판을 가다가 소변이 너무 급한 나머지 길옆에서 용무를 보았다. 그런데 용변을 본 곳이 하필 그 마을의 세도가인 황 대감네 밭 옆이었고 마침 황 대감이 그길로 지나가는 중이었다. “이런 무식한 것이 있나? 남의 밭에다 함부로 소변을 보다니 이런 고약한 계집 같으니!” 황 대감은 예전에 정승을 지낸 세도가로서 자기 집 밭에다 오줌을 눈 것은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길길이 날뛰었다. 자기 집 안방에다 오줌을 눈 것도 아니고 길바닥에다 더구나 거름이 필요한 밭에다가 잠깐 실례를 한 것뿐인데도 늙은 대감은 이만 저만 성을 내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마음보가 뒤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늙은 구렁이 같은 대감이 이 일을 그냥 넘길리가 없었다. 황 대감은 농부의 집에 일 잘하는 황소가 한 마리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이야기는 뻔한 것이었다. “당장 관가로 가서 곤장을 맞든지 네 집의 황소를 끌고 오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 늙은이 망령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라고 생긴 것이 분명했다. 오줌 한번 잘못 누었다고 황소 한 마리를 바치라니 이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소리인가? 하지만 힘없는 농부의 아내는 우선 살고보자는 생각에 황소를 바치겠다고 약속을 했다. 관가에 가보아야 사또도 쩔쩔매는 황 대감을 이길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농부는 그래도 설마설마 하며 조마조마한 날들을 보냈는데 바로 오늘 아침에 황 대감 집 하인들이 몰려와 황소를 끌어갔다는 것이었다.
“저런 못된 사람들이 있나?” “그러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지?” 이야기를 다 들은 오성과 한음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니 도련님들께서 머리를 쓰셔서 제 황소 좀 찾아주십시오 저는 그 놈 없으면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농부는 눈물을 질금거리며 매달리듯 애원했다. “알겠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소를 찾아줄 테니 돌아가 있게.” “정말 고맙습니다.”
농부가 돌아가고 난 뒤 오성과 한음은 머리를 맞대고 황소 찾을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좋아 이렇게 한번 해보자.” 오성이 방법을 한 가지를 찾아내고는 한음에게 일러주었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일단 한번 해보자.” 한음도 좋다며 맞장구를 쳤다. 이튿날 아침, 오성과 한음은 황 대감이 가마를 타고 행차를 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그 길목인 황 대감 집밭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황 대감의 가마가 저만치에서 보이자 둘은 서로 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아니, 웬 꼬마 녀석들이 대감님 행차를 막고 싸우고 있느냐? 어서 길을 비켜라!” 그래도 둘은 못들은 척하며 싸움을 계속했다.
그러니 황 대감의 행차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바로 한양에서 왔다던 그 꼬마들이냐? 그런데 왜 길을 막고 싸우고 있느냐?” 황 대감이 가마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예, 저희가 한양에서 온 것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가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에다가 오줌을 누려고 하니까 이 친구가 말하기를, 여기다 오줌을 누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말리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고 오줌을 누려고 하니까 그래도 말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 친구가 떼를 쓰는 바람에 제 바지에 오줌을 싸 버렸지 뭡니까? 그래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성이 또박또박 얘기하자 황 대감은 뜨끔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 어르신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이번에는 한음이 맞장구를 치자 황 대감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저것 보십시오. 저 친구가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 된 짓을 하는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암행어사라는 말을 듣자 황 대감은표정이 굳어졌다 애들아 가마를 돌려라. 갑자기 속이 좋지 않구나. 황 대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농부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농부에게 황소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자네 부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잠시 황소를 맡아두었던 것이니 오해는 말게 자네도 생각해 보게, 아직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서 치마를 벌렁 까내리고 일을 보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겠나. 그래 내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니 그리 알게.” 황 대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농부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