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60726주일설교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요한복음16:1-11)
제목: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본문: 요한복음16:1-11
오늘은 요한복음16:1-11의 말씀을 가지고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세상에는 신비한 일이 많지만
아이가 임신 되어 출산하는 일만큼 신비한 일은 없습니다.
남자라서 그것을 직접 체험을 못해 보았지만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참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 작은 생명체가 자라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엄마 뱃속에서 먹고 자고 놀면서 성장합니다.
그리고 엄마와 이야기도 하고
밖의 상황에 맞춰 즐겁기도 하며
두려움으로 움츠러 들기도 합니다.
발을 내밀기도 하고
손을 내밀기도 하여
자신의 존재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엄마의 태 속은
참으로 충분한 곳이고 평안한 곳이고
풍성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계속해서 아이는
엄마 뱃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 뱃속이 좋다고 계속 있는다면
그 아이도 엄마도 위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는 뱃속에 계속 있기 위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밖으로 나와
진짜 생명의 삶을 살기 위해서 태어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은
태속처럼 안전하고 따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자리에 안주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거친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진짜 제자로 세우기 위해,
육신의 옷을 벗고 떠나시며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는 것은
우리를 혼자 버려두는 ‘홀로서기’가 아니라,
성령님을 통해 우리 안에 영원히 들어오셔서
세상의 어떤 핍박도
이기게 하시려는 더 큰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이 떠날 것이고 떠나서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떠나는 것이
그리고 성령이 오시는 것이
제자들과 우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어떻게 예수님이 아닌
성령님과 함께하는 것이 좋겠냐고 할 것입니다.
오늘 저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그 사실을 말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의도
곧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1.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1-3절)
참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푯대 되신 주님만 바라보면서 살면
그 얼마나 좋고 멋진 신앙인이겠습니까?
도종환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교회 마당에 백합이 화려하게 피어났다가 지고 있습니다.
어찌 그냥 피었겠습니까?
바람에, 비에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도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내기는 어렵습니다.
평안할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좋을 때 우리 믿음은 탄탄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환란이 오고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날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때가 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들리는 때가 온다는 것을
감당하기가 어려운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 어려움이 없고 지금 흔들림이 없을 때
왜 우리에게 말씀하실까요?
지금 본문의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죽어도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때가 온다는 것을
반드시 바람이 불면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을 흔드는 것들이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유지해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흔들어 그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하와를 흔들었던
뱀으로 위장한 사탄처럼 말입니다.
그 흔들림에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은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나누는 말씀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나를 믿으라, 내 이름으로 구하라,
서로 사랑하라, 내 안에 거하라, 나의 친구라,
내가 너를 택하여 세웠나니, 수없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믿음을 흔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교와 죽음입니다.
지금은 혼자서도 돈만 있다면
별 어려움 없이 잘 사는 사회입니다.
돈만 있으면 결혼식도, 장례식도,
농사도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1세기 예수님이 계셨던 유대사회의 출교
곧 회당에서 쫓겨나는 일은
종교 모임에 못 나가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 경제적 인격적
매장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100년 전만 해도
마을 대동계에서 쫓겨나는 것은 그와 비슷했습니다.
당시 대동계는 마을의 경조사 부조, 공동 노동,
재산 관리를 담당하던 생활 공동체였습니다.
그렇기에 대동계에서 쫓겨나는 것은 상여나 잔치 기구를 빌릴 수 없어서 경조사를 치를 수 없고
품앗이 해줄 사람이 없어 혼자 치러야 했으며
마을 공동묘지에도 묻힐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유대교는 대동계보다
더 탄탄한 조직이었는데
그러한 곳에서 출교는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로 유대교에서 쫓겨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믿음을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흔들릴 수 있는 마을에 있기보다는
고향을 떠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디아스포라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살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핍박하던 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수를 믿는 이유로 핍박을 하면서
그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믿는 자들을 핍박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을까요?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분명 그들은 하나님은 섬긴다는 자들이고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자들인데
어떻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적이었고 그것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고
자신을 꾸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 속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음성도 듣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마음도 모르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는
더더욱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모르니 바르게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주절거리는 것입니다.
2.믿음의 목적지를 알아야 한다.(4-7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신앙에는 목적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하는 일에도 목적지가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시작하면 그 일을 하는 목적이 있듯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목적지가 있고
그 목적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이렇게 여러 가지로 계속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시작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지
시작했다고 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가 어느 때입니까?
환란을 당하는 때입니다.
핍박을 받는 때입니다.
죽음의 고통이 오는 때입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피해야 할까요?
맞서 싸워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평상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예수님께 기도해서
예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는 일을 닥쳤을 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는 환란 속에서 기도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때는 환란이나 핍박을 극복해야 합니다.
느헤미야2:4을 보면 느헤미야가
페르시아 왕인 아닥사스다 왕에게
중요한 청원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철야기도 했을까요? 금식기도 했을까요?
성경은 묵도했다고 합니다. 잠깐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느헤미야 1:4을 보면
나라의 어려운 상황을 듣고
그는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또한 일상 속에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 앞에 느헤미야는 자신의 나라의 어려운 형편을
왕에게 아뢰었을 때 곧바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환란을 당할 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평상시에 듣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해야 합니다.
우리 혼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서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조율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디로 가는지
가서 무엇을 하려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 자가 없고
단지 예수님이 그들을 떠난다는 사실로 인해
두려움과 근심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두려워하기 위해서
염려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시려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향하여 가시고
그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는 것은
구원의 완성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셔야
성령님을 보내주실 수 있고 성령님이 오셔야
우리를 완벽하게 어디서나 도울 수 있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에 관심이 없고
단지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현실에만 빠져서
두려움과 근심으로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주님이 설정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는 믿음의 자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 근심 걱정에 빠져
내가 어떻게 되지는 않을까에 빠져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떠나셔야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다고 하셨고
보혜사 성령님이 오셔야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
구원의 온전한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역할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을 완성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완성된 구원을 성도의 마음에 적용하고
깨닫게 하여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놀라운 계획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는 것이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목적이 됩니다.
3.성령님이 하시는 일(8-11절)
예수님은 이 땅을 떠나시면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성령님께서 무엇을 하실지
조목 조목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가 도움을 청할 때
무엇을 알려주실까요?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책망하신다는 말은 깨우친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
밝혀 준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 깨닫게 하신다고 바꿀 수 있다고 다른 번역 성경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폭로한다.
밝히 드러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책망한다는 말은
숨겨진 죄나 거짓을
환한 빛 아래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입증한다, 유죄를 선고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재판에서 유죄를 밝혀내는 것입니다.
성령님 오시면 단순히 세상 사람을
혼내거나 야단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옳다고 믿었던 가치관과 기준이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성령님이 오셔서
천하에 낱낱이 ‘폭로’하시고
법정에서처럼 ‘유죄 선고’를 내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일까요?
세상은 무엇에 대해서 착각하고 있을까요?
세상은 자신들이 정의이고 자신들이 옳다고 믿으며
그래서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오시면 그 판결이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그렇다면 죄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9절)
세상은 법을 잘 지키면 죄가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도 잘 지키고 도덕적으로 사니까
죄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폭로하십니다.
죄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본질적인 죄는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죄는 돌이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지만
예수님을 거절하여 믿지 않은 죄는 용서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예수를 믿고
그를 따라 삶으로 세상에서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바르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의란 무엇일까요?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10절)
세상은 말합니다.
내 판결이 맞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우리가 ‘의(옳음)을 행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것이 틀렸다고 폭로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부활시키고
승천하게 하셔서 아버지 옆에 두셨습니다.
진짜 ’의‘는 세상 권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 승천시키심으로
세상의 재판이 완전히 오판이었음으로 증명하셨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진짜 ‘의 (옳음)’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심판은 무엇일까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음이라”(11절)
세상은 생각합니다.
우리가 권력을 쥐고 있으니,
예수를 따르는 교회를 마음대로
심판하고 굴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폭로하십니다.
착각하지 마라!
교회를 흔드는 세상 뒤의 진짜 실세인 ’마귀(세상임금)‘는
이미 십자가에서 영적으로 완전한 패배와 심판을
받았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 자신들이 승리자인 줄 알고
교회를 핍박하지만,
성령님은 세상의 권세가 이미 십자가에서 파멸된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함을 밝혀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령님이 세상을 책망하심이
핍박받는 제자들에게나 우리에게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유익이 될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향해 ’너희가 틀렸다, 너희가 이상하다‘며
손가락질하고 우리를 불리하고 억울하고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러한 재판을 뒤집어 버리십니다.
세상은 자기가 옳다고 자랑하지만,
성령님은 불신과 예수님을 버림을 낱낱이 폭로하십니다.
그리고 이미 세상 임금이 심판받아 패배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똑똑하게 깨닫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 사실이 감동이 되십니까?
아 그래하고 동의가 되십니까?
실제로 우리가 듣는 것은 ’너는 틀렸다,
네가 잘못 살고 있다‘라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진짜 재판관이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속지마라.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정의는 틀렸다.
예수를 믿지 않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죄와 불의고
심판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 소리를 듣고 살아갈 때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으며
굳건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세상의 거친 풍파와 오해 속에서도
“너희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약속하시며
삶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라며
흔들림을 자연스러운 인생으로 위로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거친 바람 속에
그냥 방치해 두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 세상의 어떤 핍박과 흔들림도
이겨낼 수 있는 단단한 뿌리를
우리 마음에 내리게 하십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 가운데 살아갈 때
오늘 들은 말씀을 붙잡고 다음 3가지 영적 행동 지침을
꼭 삶에서 실천해 보시길 바랍니다.
1. 평상시 묵상으로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흔들기 위해 끊임없이
오해와 불이익, 냉대를 보냅니다.
환란이 닥친 후에는 기도하기도,
말씀을 떠올리기도 쉽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처럼 일상의 삶 속에서 평상시에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령님은 시련의 순간에 우리가 버텨낼 주님의 말씀을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게 해 주십니다.
2. 근심을 넘어 '하나님의 목적지'로 시선을 돌리십시오.
제자들은 주님이 떠나신다는 당장의 현실과 두려움에 갇혀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 계획을 보지 못했습니다.
상황에 마음을 빼앗겨 "어떡하지?" 하고 헤매지 마십시오.
주님의 떠나심이 성령의 오심이라는 더 큰 유익이 되었듯, 지금 내 삶의 어려움 뒤에 일하고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보며
믿음의 목적지를 향해 당당히 걸어가십시오.
3. 세상의 평가에 속지 말고
'성령의 확신'으로 당당해지십시오.
세상이 "너는 틀렸다, 너만 유별나다"며
재판관 노릇을 할 때 주눅 들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계신 진짜 재판관 성령님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이 진짜 죄요,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이
진짜 '의'이며, 세상의 권세는
이미 십자가에서 패배했음을 폭로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평판에 속지 말고
성령님이 주시는 승리의 확신을 품고 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힘과 의지로 버티려 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서 진짜 승리를 선포하시고
변호해 주시는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어떤 환란과 흔들림 속에서도 목적지를 놓치지 않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세상 속에서
당당히 승리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