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능력주의 반비판'의 문제점
[정의로운 경제] 시장이 요구하는 능력만 인정돼
왜 능력주의는 문제가 되고 있는가?
작년에 마이클 샌델의 책 <공정이라는 착각>이 번역 출판되면서 한국에서도 이른바 ‘능력주의 부작용’ 이슈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특히 진보쪽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주장과 글들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 가운데 교육평론가 이범씨가 특이하게도 이와같은 세간의 다양한 ‘능력주의 비판’에 대해 제동을 거는 비판글과 인터뷰를 올려 관심을 모았다.
분위기에 휩쓸린 능력주의 비판을 다시 성찰해보자고 제안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범씨가 지적하는 능력주의 비판의 문제점들 가운데에서 두 가지는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하나는 그가 7월 17일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능력주의가 아니라 능력주의를 강제하는 구조적 경쟁” 문제라면서 능력주의 자체를 문제 삼지 말라는 뉘앙스로 주장을 편 지점이다.
또 다른 논쟁점은 그가 ‘능력주의는 곧 시장주의이고, 그렇기에 나쁘다’는 식으로 진보에서 능력주의를 게으른 방식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지적한 대목이다. 이 두 가지 쟁점은 능력주의와 시장주의가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대한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능력에 따른 인원 선발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사실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마이클 샌델이 거의 끝물로 제기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샌델 자신에게 능력주의 비판에 관한 텍스트를 제공했던 것은 이미 2019년에 출판된 다니엘 마코비치의 <엘리트 세습>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 2010년대 초부터, 이미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공부의 배신』, 스티븐 맥나미의 『능력주의는 허구다』, 크리스토퍼 헤이즈의 『똑똑함의 숭배』,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 매튜 스튜어트의 『부당세습』, 그리고 로버트 프랭크의 『실력과 노력으로 성공했다는 당신에게』 등 대중도서만 해도 수두룩하게 쌓여왔던 터다. 지난 10여년 동안 학술적 영역을 넘어 대중적 공론장에서도 꽤 능력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광범위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누구도 능력에 따른 선발을 배제하고 ‘추첨제’로 가자고 강하게 고집하는 사람들은 없다. 심지어 샌델조차도 추첨제를 능력주의 주요 대안으로 확고하게 지지한 것은 아니다. 한 마디로 이범씨가 지적한 “능력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지만 본질적으로 기업은 생존과 성장을 위해 능력 있는 사원을 모집·채용한다. 이를 도외시하면 기업 경쟁력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크게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문제는 뭔가? 문제는 무엇보다도, 과거와 달리 지금은 각자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부모의 능력(재력과 학력)에 의해 자녀들의 능력이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다니엘 마코비츠에 따르면, 20세기 중반까지의 ‘유한 귀족(leisured aristocracy)’ 자녀들의 특권이 ‘타고나는(being born)’ 것이었다면, 오늘날 현대 능력주의 엘리트(meritocratic elites) 자녀들의 특권은 ‘만들어지는(being made)’ 것이란다. 이제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주는 핵심적인 유산은 부모가 사망 후에 유산으로 남겨주는 ‘물질자본’보다는, 부모가 생전에 자녀에게 다양하게 투자하는 ‘인적자본’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과거 ‘귀족주의 세습’과 대비되는 ‘능력주의 세습’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 비판이 강하게 등장한 배경에 2019년 9월 이른바 ‘조국사태’가 있었던 이유도 여기도 있다. 이를 두고 스티븐 맥나미는 현대의 경쟁구조가 마치 세대 간의 릴레이 경주와 비슷해서 부유한 부모의 아이는 거의 결승점에서 인생을 출발하지만, 가난한 부모의 아이는 처음부터 경주를 시작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고 비유한다.
이런 세습주의적 능력주의을 부채질하는 지독한 경쟁구조를 없애면 되지 않겠냐고? 이를 위해 대학의 서열구조를 타파하자고? 대학의 서열구조는 왜 생겼을까? 그것은 대학 졸업 후 진출한 사회의 노동시장이 지독하게 서열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와 달리 임금격차가 수십배, 수백배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각종 고용안정성이나 사회보장 혜택 등 비임금 격차 역시 크게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안정된 소수 상위기업 취업을 위한 경쟁은 치열해질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 다시 대학의 서열화가 억지로라도 만들어진다. 노동시장의 지독한 서열구조를 깨지 않으면 대학서열을 억제하는 것이 대단히 힘들것이라는 얘기다.
능력주의와 시장주의를 일치시킨다고?
이 대목에서 두 번째 논점으로 옮겨간다. 능력주의와 시장주의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범씨는 ‘능력주의는 곧 시장주의이고, 그렇기에 나쁘다’는 식으로 단순화시키지 말라고 지적하는 듯하다. 당연하게도 능력주의와 시장주의는 다른 범주의 얘기다. 여기서 핵심은 능력주의를 시장주의로 등치시킨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가 시장만능주의와 잘못 만나게 되었을 때 발생할 결과다.
예를 들어 개인주의적 능력주의가 직접 시장경제의 보상체계와 결합되면, 모든 개인은 시장경제에서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을 것이므로 그 격차는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정당화된다. 다시말해서 시장경제 안에서 각자의 노동소득 격차나 노동과 자본소득 격차가 아무리 벌어져도 그것은 능력에 따른 자연스런 귀결이라고 주장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이유에서든 시장에서 가치를 저평가하는 직업이나, 아예 가치를 평가해주지 않는 사람의 활동은 아예 사회적으로 가치가 적거나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처럼 ‘시장의 보상 차이 = 능력 차이’로 간주되는 사회가 문제라는 것이 샌델이나 능력주의 비판자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여기에서 샌델은 “시장 수요에 부응하는 일이 반드시 사회에 가치있는 기여를 하는 걸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샌델이 주장하는 ‘기여적 정의론’이 나온 배경이다. 한편 전 영란은행 총재 마크 카니는 최근 출판된 저서 『가치(들)』에서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는 “시장은 옳다”는 신념 아래 시장에서 초래되는 거품‘가격’을 숭배하다가, 정작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공정성, 사회적 책임성 등과 같은 ‘가치들’을 내팽게치고 있다고 한탄했다.
요약하면, 시장에서 매겨지는 임금가격 격차가 한없이 벌어져도 이를 ‘능력 차이’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수많은 시민들의 ‘능력’들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자는 것이 능력주의 비판의 요지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세습에 의해 만들어지는 능력의 문제도, 시장에서의 과도한 성과 차이를 능력 차이로 합리화하는 문제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소득과 자산의 불평등 문제로 귀결된다. 능력주의를 제대로 옹호하지 못하고 능력과 무관한 반칙이나 특권 등을 동원했기 때문에 불평등이 생겼을까? 아니다. 능력주의 자체가 서열과 불평등을 촉진시키는 특징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 능력주의 비판의 핵심이다. 바로 이점이 ‘능력주의’라는 용어를 만들었던 마이클 영이 말하고 싶었던 대목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