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70년 어느 노인을 추억하며◎
노인은 마지막에 신앙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였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그의 선택은 필시 자녀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가 떠나기 한 달쯤 전이었다.
노인은 장손(長孫)을 불러 빛바랜 기억을 꺼내 보였다.
노인의 시간은 스무 살 청년 시절로 역류했다.
와세다대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일본에 갔고,
조선인 하숙촌에서 정치학부 선배들이 기거하는 집에 짐을 부렸다.
보란 듯이 대학에 합격했지만, 식민지의 젊은이에겐 학과 공부보다
선배들과의 독서가 훨씬 소중했다.
새로운 지식은 세계사의 모순을 들여다보게 했고,
사회주의 이념에 청년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야간학교를 열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했다. 그러다 해방을 맞았다.
강토의 허리가 잘린 반쪽짜리 광복이었다.
약소국의 백성들은 또다시 가차 없는 역사의 ‘을(乙)’로 내쳐졌다.
1950년 6월, 동족상잔의 비극이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잠시 완장을 차기도 했지만,
그가 꿈꿨던 이상은 여지없이 허약했다. 청년은 도망자가 되었다.
사위 대신 잡혀간 장모는 모진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청년이 섬겼던 가난하고 힘없는 여러 벗도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전쟁이 끝나고 시대는 격변했지만, 청년은 노인이 될 때까지
직장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홀로 운동을 열심히 했다.
병치레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자식들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다.
아들, 딸들이 나름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지만,
그는 신앙 얘기에 항상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동시대인들이 살아낸 야만의 세월과 ‘사랑의 신’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깊은 불신을 알기에 막판에 받아들인 그의 믿음이
자녀들을 위한 배려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그 또한 주님이 노인을 품어 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밤새워 노인의 고백을 들었던 손자는 ‘하느님 방송’의 PD가 되었다.
그리고 20여 년이 흘러 지금 이 칼럼을 쓰고 있다.
그간 수많은 복음 프로그램을 만들었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할아버지의 무신론에 대꾸할 답을 찾지 못했다.
6ㆍ25 전쟁을 전후해 200만 명 가까운 무고한 목숨이 스러져 갔고,
1000만 명 이상이 가족과 생이별했다.
그에 비하면 나의 조부는 호사(?)를 누렸다.
살아남은 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고, 혈육과 헤어지지도 않았으니까.
가혹한 역사 안에서 그의 기구함은 오히려 평범하다.
분단 70년, 질곡의 시간을 헤쳐 온 이들이 저마다 가슴에 묻은
피 울음을 어떻게 인간의 언어로 새기겠는가.
그들 중 상당수가 이미 이승에서의 삶을 끝낸 지금도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을 잠시 쉬는(休戰)’ 증오의 대결장이다.
남과 북 모두 불안을 호흡하며 살아간다.
이 악몽을 끝내려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묵주기도
8000만 단’이 봉헌되고 있다.
그 간절한 염원 안에 70년을 관통하는 고통의 연대가
애처롭게 빛난다.
세상을 떠난 이들과 함께 간구하는 통공의 기원이다.
주님께서 응답을 주시는 그 날, 현대사의 잔인한 그늘에서 차마
‘사랑의 하느님’을 맞이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뒤늦게나마 이 오랜
시련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변승우 명서 베드로(평화방송 TV국장)
첫댓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묵주기도 신자들이 많이 바치시길 바랍니다.
제가 자주 가톨릭 방을 찾는 이유는? 그래도 들렸다 가면 하루 일과가 행복해 짐을 느낄수 있기 때문입니다.
회장님 늘 감사합니다. 제가 쉬어갈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를 제공해 주시니 분단의 아픔도 다시 한번 느껴보면서 제가 저를 사랑하는 방법도 터득해 갑니다.
우리 가톨릭 방의 단골이신 청담골님께서 함께 하는 여정에서 행복을 느끼고 계시다면 저도 너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