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23 다해 연중7주일
창세 45:3-11, 15 / 1고린 15:35-38, 42-50 / 루가 6:27-38
그리스도인의 생활윤리
지난주일 우리는 예수님께서 평지에서 설교하신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주일은 예수님이 참 행복을 선언하신 후, 제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윤리에 대하여 말씀하신 걸 들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히브리 백성들이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후, 시나이 산에서 야훼 하느님과 계약으로 십계명을 받고, 그 계명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행할지 구체적인 윤리지침을 받은 것과 비슷한 구조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참 행복을 들은 제자들이 이제 그 행복을 일상에서 어떻게 행해야 하는 지침이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그리스도인의 황금률을 포함한 다수의 생활윤리들이 있습니다. 이 생활윤리에 열거된 지침을 보면, 다른 종교와 유사한 면도 있지만, 그들과 다른 우리 그리스도교만의 독특한 특징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컨대, 황금률(Golden Rule)로 알려진 루가복음 6장 31절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말씀은 다른 종교와 사상들에도 있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경전이기도 한 구약의 토비트서 4장 15절에는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아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탈무드에는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은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모두 이것에 대한 주석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한 당시 금욕주의 철학으로 알려진 스토아 철학자들도 “너에게 행해지길 원치 않은 것은 타인에게도 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이 황금률은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논어>에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이 아니면 타인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欲勿施於人)”라는 공자의 말씀도 있습니다. 이처럼 황금률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지향하고 있는 대표적인 생활윤리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황금률과 다른 문헌에 나오는 황금률 간의 차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긍정적인 형태인 반면에, 다른 교훈들은 부정적인 형태라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그 사랑은 마지못해 하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인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 윤리는 타 종교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와도 다르며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근본적(radical)인 차원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오늘 복음에 나오는 29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마라.”입니다. 이 지침은 출애굽기 21장 24절의 말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는 구약성서와 유대교의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넘어서는 윤리로서 이웃사랑의 끝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악을 감수하여 악순환을 차단하라는 이 말씀은 하나같이 지키기 어려운 충격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가혹한 윤리를 제자들에게 제시하신 걸까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무한하시고, 그러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속성을 원초적으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의 속성을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물려받은 신적인 속성이 세상으로부터 왜곡되어 버렸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안에 잠재된 신성한 속성이 망각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다시 되찾기 위해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사랑의 윤리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요구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루가 6:32-34)”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해야만 이유와 이렇게 했을 때 우리는 무슨 이익을 얻는 걸까요? 예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자비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하십니다.(루가 6:36 참조) 이 말씀은 자비하신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무자비해지는 걸 원치 않으실 뿐만 아니라, 원래 창조하신 목적으로 반드시 복원시킬 거라는 의지가 담긴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세상에서 우리와 함께 참된 행복을 나누며 살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 위해선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판’입니다. 오늘 들은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이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이러한 이유입니다. 즉,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 나라에 걸맞은 자격을 갖춰야 하는데, 그것은 심판이란 자격심사를 거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십니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루가 6:37)”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을 궁극적 이익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원래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은 물론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함께 궁극적인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역설의 신비’를 설파하고 있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1고린 15:42-43, 50)
이처럼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심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성품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희망하며 왜곡되고 뒤틀린 세상 속에서 주님의 제자로서 살기 위하여 고군분투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이 세상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여 우리의 심성도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퍅(剛愎)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의 백성들처럼 내가 당하면 그만큼 아니 어떤 때는 그 보다 더 갚아야 직성이 풀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올바른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심판은 늘 불완전합니다. 그것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불완전한 심판을 할 수 밖에 없는 필요악을 요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판을 행할 때도 그것이 완전무결할 수 없다는 점도 동시에 인식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불완전함을 인식할 때, 우리는 타인을 급하게 단죄하려는 조급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좀 더 신중해 질 수 있고,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나와 너의 관계도 용서와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들은 요셉과 그 형제들 간의 이야기가 그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질투와 미움으로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을 다시 만났을 때 인간적으로 보면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었기 때문에 그는 형들의 악행을 준엄하게 단죄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형들을 용서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그 관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그 역시 한때 자신을 악랄하게 괴롭힌 형들을 미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고난을 통해 그를 더 높은 차원, 더 원대한 차원으로 눈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요셉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게 되자, 그는 그것이 하느님의 원대한 섭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은 그러한 하느님의 커다란 섭리를 위해 부름 받은 하느님의 도구였음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도 복수의 응어리가 풀어지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를 통해 요셉을 치유해 주셨고, 회복된 요셉은 형들을 용서해 줌으로써 형들을 치유시켰습니다.
오늘날 우리사회는 갈등이 극에 달해 사분오열로 분열되어 서로를 죽일 듯이 저주하고 있습니다. 더 불행한 것은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을 전하는 성직자들이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로 미움과 복수를 조장하는데 앞장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예배에서 우리는 요셉이야기를 통해, 사도 바울이 설파하는 역설의 신비를 통해,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황금률과 사랑의 윤리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참된 윤리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갈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갈라지고 분열되고 미움과 증오가 난무한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 밝고 부패되지 않고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도덕과 윤리를 알려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