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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사
25. 최초의 육상 전투(1)
해상에서 교전이 있었던 것과 비슷한 시기에 육상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육상전은 제한된 수준에서 이루어졌는데, 러시아나 일본 모두 상대방의 주력부대가 전개하지 못하도록 최소한 교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극동총독 알렉세예프가 극동군 총지휘관이었으나, 개전 이후 육군대신 쿠로파트킨이 극동지역 육군지휘관에 임명되면서 짜르나 정부와 개별적으로 교신할 수 있는 권리마저 부여받았다. 그가 현지에 부임한 것은 1904년 3월 15일이었으며, 그 전까지는 리녜비츠 장군이 그의 직무를 대행했다.
개전 후 13일째에 극동총독은 리녜비츠에게 “ …… 뤼순에 총력을 투입하지 못하도록 일본군을 유인할 것, 또한 서시베리아와 유럽의 러시아로부터 이동중인 예비대가 집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군이 압록강을 도강하여 동청철도 방면으로 진군하는 것을 지연시킬 것, 그 외에도 랴오허(遼河)와 압록강 하구의 근안(近眼)에서 일본군이 상륙하지 못하도록 대책을 수립할 것, 만일 적군이 뤼순을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으로 랴오둥(遼東)에 상륙했을 경우 …… 한국방면에서 부대를 상륙시킨 후, 상황을 참작해 가며 …… 뤼순을 침공하고 있는 적의 후방교통을 교란할 것”을 명령했다.
위와 같이 만주에 주둔중인 러시아군의 임무는 랴오허와 압록강 하구 방면으로 일본군이 진격하는 것을 저지하고 서시베리아와 유럽의 러시아에서 만주까지 병력을 수송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전쟁터도 멀었고 시베리아 철도의 수송능력마저 낮았기 때문에 짧은 기간 내에 필요한 병력을 극동지역에 집결시킬 수 없었으며, 러시아군의 동원과 전개도 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개전 후 45일 동안 러시아 만주군의 일일 평균 증가량은 약 1개 대대, 1/2 백인기병대 그리고 대포 3문 정도에 불과했다.
3월 15일에 러시아 만주군의 전개가 완료되었다(현지 부대의 배치를 의미하며 증원군의 도착 완료를 의미하지는 않음). 만주군은 동부와 남부의 2개 전위대 및 총예비대로 구성되었다. 후자는 일본군 본대의 예상 침투로이자 한국으로부터 가장 근거리였던 랴오양(遼陽) 지역에 배치되었다.
남부 전위대는 18개 보병대대, 6개 기병중대 및 54문의 대포(총병력 2만 2천명)로 구성되어 쉬타겔베르크 장군의 지휘하에 배치되었다. 그들의 임무는 랴오둥 반도 해안에서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8개 보병대대, 포 38문, 기관총 중대로 구성된 동부 전위대는 카쉬탈린스키 장군의 지휘하에 압록강 방면에 전진배치되었으며, 그 임무는 최선의 방어위치를 확보하고 일본군이 우안으로 도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한반도의 북쪽에는 미트첸코 장군의 지휘하에 기마선견지대(22개 백인기병대와 코사크부대로 구성되었음)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 임무는 압록강 남쪽 100㎞ 지점까지 전지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적 정찰을 목적으로 일본군 좌측에 2개 백인기병대와 2개 의용기병대로 구성된 기병지대가 배치되어 마드리토프 중령의 지휘를 받았으며, 우측에는 2개 대대, 2개 백인부대와 포 4문 등이 배치되었다. 이 외에도 압록강 하구의 연안지대를 5개 백인부대가 수비했다.
총예비대는 7개 대대와 32문의 포, 랴오양에 위치하고 있었던 18.5개 대대, 9.5개 백인부대, 24문의 포, 봉천에 위치하고 있었던 3개 대대와 0.5개 백인부대 그리고 포 4문 등으로 구성되어서 전체 병력과 화력이 28.5개의 육전대대, 10개의 백인부대, 포 60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26. 최초의 육상 전투(2)
1904년 당시 보여준 일본군의 부대 전개는 1894~1895년 청일전쟁 당시의 그것과 거의 모든 부분에서 흡사했다. 1904년 2월 구로키 다메사바(黑木爲楨) 장군의 제1육전대에 소속된 선봉부대(제12사단)가 한국에 상륙했으며, 3월 하반기에는 평양을 점령했다. 나머지 근위사단과 2사단은 진남포에 상륙했다.
러시아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그나마 분산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한반도와 랴오둥 반도에서 예정보다 빨리 부대를 전개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제1육전대의 상륙과 집결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3월 22일이 되어서야 압록강에서 125㎞ 거리의 예정집결지인 진천강(청천강의 지류) 대안에 집결하여 중간기지의 건설에 착수했다.
계획에 따라 3개 육전대가 더 배치될 예정이었다. 제2군과 제3군의 동원은 2월 9일에 시작되어 3월 3일에 완료되었으며, 뤼순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제4육전대의 편성은 4월까지 연기되었다.
4만 5천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구로키의 제1육전대는 4월 10일 압록강 좌안에 집결했다. 미트첸코 장군의 기병대는 수차례에 걸친 일본 척후병과의 소규모 전투 후에 압록강 대안으로 퇴각했다. 결과적으로 압록강의 한반도 쪽 연안에는 단 한 명의 러시아군도 존재하지 않았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본국으로부터 새로운 병력이 충원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압록강에서의 적극적인 방어를 포기하고, 자술리츠 장군 예하의 동부 분견대를 이용하여 시위적인 방어에 국한하기로 결정했다. 동부 분견대는 제6동시베리아사단과 동시베리아포병여단 소속의 포병중대 등으로 보강된 동부 전위대의 병력으로 2월 28일에 편성되었다. 위 분견대는 21개 대대와 24개 백인부대, 6개 보병포중대, 1개 산악포중대와 동바이칼 코사크부대 소속의 1개 포병중대(총 62문의 포) 등으로 구성되었다. 미트첸코의 기병대 또한 동부 분견대에 배속되었다.
동부 분견대에 부여된 임무는 첫째,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일본군의 압록강 도하와 진군을 저지할 것, 둘째, 침공중인 일본군의 군사력, 구성, 진군방향 등을 조사할 것 등이었다.
그 외에도 “전력이 월등한 적군과의 전면전을 피해야 했으며, 아군의 주력부대와 합류할 때까지 패해서는 안 되었으며,” 동시에 “적군에게 지능적이면서도 불굴의 저항력을 보여 주어야만 했다.”
동부 분견대에게는 수동적인 방어임무가 부과되었다. 즉 일본군이 압록강을 도하하는 중에는 소총과 중화기를 이용하여 그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다. 그러나 일단 도하가 완료된 후에는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을 추가로 도하시키기 전에 후퇴한다는 것이었다.
압록강과 그 지류인 에이호 강은 도하에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압록강은 수량이 풍부한 몇 개의 지류로 나뉘어지는데 얕은 여울이 없었으며, 특히 에이호 강에는 기병만이 도하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깊은 여울이 있었다.
동부 분견대의 압록강 방어는 사호즤와 쭈렌첸의 두 구역으로 나눠진다. 17㎞에 달하는 사호즤 구역의 방어에는 4.5개의 대대, 제3동시베리아포병여단의 대포 16문, 기관총중대의 기관총 8정 등이 투입되었다. 4㎞에 걸친 쭈렌첸 구역에는 제6동시베리아포병연대 소속의 2개 포병중대(포 16문)와 함께 6개 대대가 배당되었다.
75㎞에 달하는 방어지역 우측 전선에는 3개 육전대대, 제6동시베리아포병여단 소속의 제1포병중대와 동바이칼 코사크부대 소속의 포병중대, 11개 백인기병대 등으로 구성된 미트첸코 장군의 분견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주요 임무는 경계와 동시에 압록강 하구 그리고 한국 만 연안에 이르는 지역에서 최선을 다해 일본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에이호 강으로부터 압록강을 따라 계속해서 위쪽으로 이어지는, 80㎞에 걸친 좌측 전선의 방어에는 레치츠키 대령과 트루힌 대령 그리고 마드리토프 중령을 각각의 지휘관으로 하는 3개 부대가 할당되었는데, 대대 규모를 능가하는 1개 육전대와 13개 백인기병대 그리고 8문의 산악포로 구성되었다.
동부군의 총예비대는 5.5개 대대와 제3동시베리아포병여단 소속의 1개 포병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카쉬탈린스키 장군이 위 두 구역 전진전선의 총지휘관이었다.
일본군에 대한 정찰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술리츠 장군은 일본군의 계획이나 의도를 몰라서, 쭈렌첸 전투가 끝날 때까지도 사호즤 구역이 일본군의 주요 공격대상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쭈렌첸 구역이 주 전장이었다. 이 구역을 방어중이던 부대는 강 연안에서 쭈렌첸 촌의 양쪽에 포진하고 있었다. 에이호 강 좌안에서 절벽을 이루는 언덕은 쭈렌첸에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시계(視界)에 장해를 주어 주둔지 방어를 어렵게 했다. 압록강 하류 북쪽 연안의 열악한 도로사정과 산악조건 또한 일본군의 도하지점에 대한 공격을 어렵게 만들었다.
압록강과 그 지류인 에이호 강은 하천 국경선을 견고하게 방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두 강의 높은 우안(만주)은 좌안(한국)의 고도를 압도했고 , 따라서 러시아 포병에게 확실히 유리했다.
압록강의 천연조건은 러시아군의 매우 강력한 장점이 되었다. 아미 지적한 바와 같이 러시아군은 험준하고 가파른 언덕에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류에 의해 형성된 여러 개의 섬(삼각주)을 포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의 진지가 공병에 의해 특별히 보강되지 않아서 보병, 포사수 그리고 전투예비대를 보호하기 위한 엄폐부나 엄폐개 및 기타 인공적 시설이 없었으며, 9개 중대가 사용할 수 있는 반(半) 참호만이 있었으나, 거의 위장되지 않았고 엄폐된 교통호조차 없었다.
개활지에서는 포병중대와 보병이 하나의 선을 이루며 배치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일본군에 의해 러시아 보병과 포병이 동시에 괴멸된 원인이었으며, 적군의 배치에 관한 정보수집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장술 교육을 받지 못한 러시아군 병사들이 참호 근처에서 불을 때움으로써 부대의 배치상황이 적에게 금방 노출되었다.
각 부대간의 통신선이 잘못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압록강 연안 및 일부 섬을 따라 설치된 전신선은 전투 초기에 절단되었다.
이와 같이 압록강변에 배치된 러시아 측 진지는 지휘부의 잘못으로 인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쭈렌첸 구역의 참모장 린다 중령의 술회에서도 잘 나타난다.
…… 왜 연안의 진지를 강화해야 하는가? 진지가 보강되어 있었다면 과연 일본군이 이에 대항하여 도하할 수 있었겠는가? 못했을 것이 확연하다. 쓸데없이 병사들을 지치게 한 것은 …… 지휘관의 실수였다.
27. 최초의 육상 전투(3)
미트첸코 장군의 부대가 한국에서 후퇴한 후, 일본군 제1육전대는 압록강 하류 좌안에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전개할 수 있었다. 당시 사호즤와 쭈렌첸 구역 및 총예비대에 포진하고 있었던 러시아군은 약 16개 보병대대와 5개 포병중대였는데, 일본군은 이에 대항하여 48개 보병대대, 24개 사단포병중대 그리고 5개 유탄포병중대(총 대포 수 174문)을 전개했다.
일본군은 관측과 첩보원을 이용하여 에이호 강 하구 위쪽에 투입된 러시아 측 수비병력이 기병척후에 불과함을 확인했다. 그곳은 도하에 적합한 지역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구로키는 3개 사단을 도하시키기로 결정했다. 제12사단이 우선 도하하고, 제2, 근위사단이 그 뒤를 잇기로 예정되었다.
도하에 성공한 제12사단의 임무는 남서쪽으로 진군하면서 만나는 러시아군을 격퇴함으로써 근위사단의 임무는 포테틴자 지역에 배치된 러시아군을 쳐부수고 계속해서 쭈렌첸-핀후안첸 전선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제2 사단의 임무는 쭈렌첸을 점령한 후, 사호즤 전선으로 방향을 바꾸어 12사단이 러시아군의 퇴로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러시아군의 사호즤 집결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일본군은 에이호 강 하류에서 전개한 후 쭈렌첸 구역의 러시아군 진지를 공격하여, 그 구역의 좌익을 점령해야 했다.
병력 먼에서 5배나 우월하며, 수적으로 3배나 앞서있는 중화기를 배치한 구로키의 부대는 4월 13일에 공격에 나섰다. 심야에 사말린두와 키우리의 두 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바로 참호와 포병용의 엄폐된 진지 구축에 착수했다. 두 섬을 점령한 일본군은 실제 사격거리를 좁힐 수 있었는데, 이것이 이후의 전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본군의 키우리 섬 점령으로 인해 레치츠키 대령의 분견대와 쭈렌첸 구역 양자간의 연락이 단절되었다.
4월 17일 아침 일본군이 압록강을 도하하려는 의도에서 시설물 건설에 착수했다. 러시아 포병은 이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일본군 보트를 포격했으나, 오히려 사말린두 섬에 배치된 일본군의 유탄포와 야전포 중대의 화력에 압도되었다. 이 섬에 배치된 병력은 육군포병연대 소속의 5개 포병중대, 2사단 소속의 3개 포병중대 및 근위사단 소속의 6개 포병중대 등이었다. 각 포병중대는 엄폐되어 있었으며, 포수를 위한 엄폐개가 구축되어 있었다. 포병간의 기술적인 통신관계를 수립한 가장 노련한 장교들이 각 포병중대의 지휘권을 장악했다. 각 포병중대 및 쭈렌첸 진지에 대한 시계가 잘 확보된 관측소에는 러시아군 진지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가 비치되었다.
도하하기 전의 일본군 사단의 상황을 보면, 우선 제12사단과 2사단이 전방에 배치되었으며, 2사단의 뒤에서 진군중이던 근위사단은 2사단보다 약간 오른쪽에 전개하면서 배치되었고, 예비대는 키우리 섬에 위치하고 있었다.
4월 18일 07시에 영구토치카 파괴용 대포 20문과 야전포 75문이 쭈렌첸 구역의 러시아군 진지를 포격하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일본군 보병이 밀집된 전선을 형성하며 동시에 진군하였다. 이 당시 쭈렌첸 구역에 배치된 러시아군은 병력 4개 대대와 포 7문, 기관총 8정에 불과했다. 총 12㎞에 달하는 전선에 배치된 러시아군은 보병 5천명에 불과했다.
쭈렌첸에서 전투중이던 러시아 부대와 포병은 사호즤에 배치된 예비대와 전투부대 그리고 포병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자술리츠 장군은 종전과 같이 사호즤를 일본군의 주공격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쭈렌첸을 강화하려는 실질적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
일본 보병대는 도보로 에이호 강을 도하한 후, 08시에 쭈렌첸 진지를 점령했다. 일본의 근위사단이 러시아군의 우익을 포위한 지 1시간 만에 러시아군은 진지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쭈렌첸 구역의 총지휘관인 카쉬탈린스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12연대의 후퇴를 엄호하고 있었던 동시베리아포병여단 소속의 제3포병중대와 총예비대의 제11연대를 급파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제6동시베리아포병여단 소속의 제2포병여단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포위되었는데, 수송할 수 없는 무기는 폐기하면서 포위망을 정면돌파하여 산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4월 23일에 핀후안첸을 점령했으며, 랴오양-하이첸 전선에 전개되어 있던 러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동부군은 펜슐린 산맥의 고갯길로 후퇴했다. 압록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군사적 손실은 병력 약 3천 명, 포 21문 그리고 기관총 8정이었다. 일본군의 병력손실은 1,036명이었다.
본 전투에서 일본군 참모부는 매우 더디고 소심하게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러시아군의 주요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한다는 원래의 의도를 완수할 수 없었다. 일본군 역시 러시아군과 같이 수비대의 화력을 증강하지 않았다. 일본군 보병은 지형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밀집된 전투대형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 밀집된 공격대형의 300~400m 후방에서는 각 중대가 종대 또는 전개한 상태로 그 뒤를 따랐으며, 약진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러시아군 참호에 근접하면, 앞에서 전진중이던 전개대형에 끼어들었다. 그 결과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라이플총과 기관총에 의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압록강 전투의 결과 전쟁 전에 갖고 있던 견해, 즉 적 화력에 대한 과소평가, 밀집대형에 대한 집착, 진지 보강을 위한 일련의 공병적 설비(개인참호의 직접 구축, 포병용 엄폐물)에 대한 경시 등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압록강 전투는 러시아군의 첫 패전이었다. 짜르체제의 장교들은 급속하게 변화하는 전투상황에 대처하며, 부대를 통제하는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압록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러시아군으로 하여금 이번 전쟁이 힘들 것이라는 인상을 갖도록 함으로써, 이후의 전투수행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패배로 인해 병사들은 지휘부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적군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잘못된 견해도 형성되었다.
쿠로파트킨은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결전을 피하려 했으며, 황제에게는 압록강 전투가 지휘부는 물론 부대원의 입장에서도 우발적인 것이었다고 보고했다.
28. 최초의 육상 전투(4)
압록강에서의 승리는 일본군의 전투의지와 사기를 상승시켰다. 구로키 장군의 5월 1일자 보고서에는 “친왕(親王)과 장교들이 매우 고무되어 있으며, 각 부대 전투원의 사기 또한 현저히 진작되어 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전략적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군의 제2군은 4월 22일 관둥 반도의 비쯰보 지역에서 상륙하기 시작했다. 뤼순 포위의 임무를 띠고 있었던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제3군이 그 뒤를 이어 상륙하기로 되어 있었다. 제2군의 임무는 제3군이 북쪽에서 전개한 후, 군사행동에 임할 수 있도록 보장해 주는 것이었다.
이때 다구샨 지역에서는 노즈 장군 휘하의 제4군이 상륙 준비중이었다. 제4군은 제1,제2군과 함께 러시아군 주력부대에 대응함으로써 제3군의 뤼순 점령전투가 승리로 장식될 수 있도록 원조해 주는 것이었다.
4월 말 헤이룽 강 연안 군관구와 자바이칼 주(州)로부터 부대가 증원됨에 따라 만주 주둔 러시아군이 보강되었다. 시베리아로부터 제4시베리아군단과 러시아의 유럽지역으로부터 제10, 제17군단이 도착할 예정이었다. 각 부대는 이전과 같이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중요한 거점에서의 러시아 측 군사력은 일본군에 비해 훨씬 미약했다.
5월 1일 만주군은 남부군과 동부군 그리고 총예비대로 분리되었다. 남부군(제1시베리아군단)은 랴오둥 만 연안을 점령중이었다. 남부군 소속의 각 부대는 잉커우, 가이조우, 하이첸 그리고 다롄 사이의 구릉 등지에 배치되었다.
동부군(제3시베리아군단)은 쭈렌첸에서의 패전 이후 주력부대의 집결지역을 일본군 제1군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면서 펜슐린과 모둘린 사이의 구릉을 점거하고 있었다. 동부군은 18.5개의 보병대대와 14.5개의 백인(百人)부대 그리고 대포 32문으로 구성되었다.
만주군 총예비대는 28.5개의 대대와 2개의 백인부대 그리고 84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다구샨, 샨얀, 하이첸 방면에 위치한 동부군 우익은 미트첸코 장군 부대(11개 백인부대, 대포 6문)의 엄호를 받고 있었으며, 좌익은 렌넨캄프 장군 부대(3개 대대, 22개 백인부대, 대포 16문)의 엄호를 받고 있었다.
랴오허 부대(1.5개 대대, 9개 백인중대, 포 16문)가 만주군의 우익을 수비하고 있었으며, 봉천(奉天)으로 향하는 도로에 위치한 최좌익은 쿠셀레프스키 중령의 부대(2개 보병중대, 2개 코사크백인중대, 대포 2문)에 의해 수비되고 있었다.
5월 13일 오쿠 야스가다 장군 휘하의 제2군이 진저우(金州)를 점령하자 뤼순과 만주군 사이의 연락이 단절되었다.
진저우 전투에서의 패전 그리고 일본군 제3군이 뤼순을 포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러시아정부는 불안했다. 육군대신 사하로프는 패전을 걱정하며, 쿠로파트킨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뤼순의 함락은 “극동에서뿐만 아니라 근,중동은 물론 유럽에서 러시아의 정치,군사적 권위를 훼손시키는 새롭고도 보다 치명적인 일격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러시아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최대한 그 상황을 이용할 것이며, 의심할 바 없이 우리의 우방들은 무력한 동맹국 러시아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쿠로파트킨은 군의 집결이 완료되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뤼순의 상황이 모종의 원조를 해야 할 만큼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와 그의 참모부는 뤼순이 2~3개월밖에 버티지 못할 것으로 보았으며, “비록 군의 집결이 완료되지 않았고 금번 작전이 일정한 모험을 감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뤼순이 갖는 배타적 중요성을 감안할 때 봉쇄를 풀 수 있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육군 총참모부는 쿠로파트킨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만주 주둔군이 공격으로 전환하는 문제로 의논드립니다. 여기 두 가지 계획을 개진하오니 장군의 판단을 바랍니다. ① 충분한 군사력을 남부전선에 잔류시키고, 나머지 군사력을 동원하여 구로키 다메사바의 제1군을 압록강 이남까지 격퇴시킨다. ② 일본군 제1군의 측면에 아군을 엄호할 수비대를 적절하게 배치한 후,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하여 뤼순을 포위중인 일본군을 공격한다.
쿠로파트킨은 5월 1일자 일기에서 위의 계획에 대해 “육군을 상대로 한 전략적 모험 …… 파멸”이라는 평가를 내린 후, 황제와 총참모부 그리고 만주 주둔군 참모부에 발송하는 전신에서 “폐하의 의지를 완수하기 위하여 쑹화 강까지도 후퇴할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알렉세예프는 만주 주둔군이 언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령하기를 주저했다. 그 이유는 알렉세예프 자신이 해전에서 그랬던 것처럼 육상전에도 능숙하지 못했으며, 둘째는 쿠로파트킨이 자신의 모든 계획을 의도적으로 부정할 것인 반면 패전의 경우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쿠로파트킨은 총참모부에 보고할 답변을 준비하기 위해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본회의 석상에서 만주 주둔군 참모장 사하로프 장군(육군대신 사하로프의 형제)은 극동에서의 전황 때문에 격앙된 러시아 국내 여론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소규모 병력으로 뤼순까지 무력시위를 하자고 제안했다.
쿠로파트킨은 회의 후 알렉세예프에게 발송한 답신에서 “양측의 군사력을 비교하건대 현 상황에서 압록강으로 진군해서는 안 되며, 아군의 측면과 후방이 일본군의 위협을 받고 있는 만큼 뤼순으로 출병하는 것 역시 모험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언급한 후, 소규모 군사력으로라도 뤼순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전신을 별도로 발송했다.
총참모부와 만주 주둔군 사령관 사이에 벌어진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개입해야 했다. 쿠로파트킨은 육군대신 사하로프에게 서신을 발송했고 알렉세예프는 황제에게 소망서를 제출했으며, 두 사람에게 각각 개별적인 답신이 발송되었다.
극동총독에게 발송된 답신을 보면 “짐은 뤼순으로 진군하려는 총독의 견해에 찬성한다.”고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접수한 알렉세예프는 “폐하의 뜻에 따라 즉각 작전을 이행하라”는 내용의 전문을 만주 주둔 러시아군 지휘관에게 발송했다.
육군대신은 쿠로파트킨에게 발송한 전문에서 황제의 윤허임을 밝히면서 “뤼순을 구출하기 위해 적에게 적절히 대항할 수 있도록 역동적으로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알렉세예프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모든 계획에 황제의 윤허를 구해내었으며, 쿠로파트킨은 항상 자기 형제를 지지했던 육군대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총참모부와 상반되는 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런 알력과 상호 음모는 만주 주둔군 참모부의 활동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29. 최초의 육상 전투(5)
5월 말이 되자 만주에 주둔중인 러시아의 지상군 병력이 일본과 비슷한 수준으로 증원되었으며, 병력배치 면에서도 산재해 있는 적군에 비해 유리했다. 따라서 러시아군은 자신의 작전방침대로 행동할 수 있었으나 참모부는 방어태세만을 고집했다. 쿠로파트킨은 진지 고수와 증원군을 이용한 진지강화가 자신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했다.
뤼순 요새가 함락되면 어려운 결과가 초래될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짜르정부는 극동군 지휘부에 뤼순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렉세예프는 뤼순에 필요불가결한 포병과 기병대를 지원한 것 외에도 4개 사단(48개 대대)을 추가로 배치하라는 공식 명령을 5월 23일부로 만주군 지휘관에게 하달했다. 쿠로파트킨은 자신의 계획이나 의도와 맞지 않았지만, 뤼순으로 제1시베리아군단을 이동시켜야 했다
만주군 참모부로부터 군단장 슈타겔베르크 중장에게 하달된 임무는 아래에서 보듯이 실로 애매했다.
뤼순으로 진군하면서 최대한 많은 적군을 유인하여 관둥 반도에서 작전중인 적의 육군을 약화시킬 것. 따라서 아군의 행동을 방해하기 위해 북쪽으로 파견된 적에 대응할 때, 단시간 내에 상대를 격파한다는 계획에 따라 신속하고 결정적으로 행동해야 하지만, 이는 적의 선봉대가 약체로 판명될 경우에 한정된다. 아군의 군사력이 월등할지라도 결정적 충돌을 피하고 전투시 절대 아군 예비대를 투입하지 말라.
실제 뤼순으로 파견된 부대는 알렉세예프의 명령과는 달리 32개 대대에 불과했다. 32개 대대와 98문의 포로 구성된 제1시베리아군단을 상대로 배치된 일본군은 48개 보병대대, 3개 사단포연대와 3개 육군포연대(포 216문) 등으로 군사력에서 일본이 유리했다.
바판고우로 진군중이던 슈타겔베르크의 군단에 합류한 삼소노프의 기병대는 기존에 배치된 기병대와 함께 시모노프 장군의 지휘하에 코사크 사단을 구성했다. 5월 24일 군단 선봉대가 일본 제2군의 선봉대를 격퇴하여 바판잔역을 점령했는데, 이때 군단 주력부대는 바판고우로 접근하는 중이었다.
5월 25일 북쪽의 슈타겔베르크 부대를 향하여 진격하라는 명령을 접수한 오쿠 야스가다 장군의 부대가 진군에 나선 것은 5월 31일이었다. 제3사단과 제5사단은 바판고우 지역에 주둔중인 러시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철로를 따라 진군했으며, 제1시베리아군단의 선봉대를 격퇴하여 바판잔역을 재점령했다.
일본군이 공세로 전환한 것을 목격한 슈타겔베르크는 일단 바판고우 지역에서 방어전을 전개하다가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면 공세로 전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제1시베리아군단은 바판고우 남쪽 5㎞ 지점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러시아군은 3개 지역으로 분리되어 방어임무를 수행했다. 우측지역을 담당한 부대는 크루제의 통합지휘하에 제36동시베리아연대 소속의 3개 대대와 제33동시베리아연대 소속의 1개 대대 및 1개 중대 그리고 제9포병여단 소속의 1개 포병중대였다. 중앙지역에는 루츠코프스키 장군 지휘하에 제33동시베리아연대 소속의 3개 중대, 제9포병여단 소소의 2개 포병중대와 35포병여단 소속의 1개 포병중대가 배치되었다. 게른그로스 장군의 통합 지휘하에 제1동시베리아사단의 12개 대대, 4개 코사크 백인(百人)부대가 좌측지역의 방어를 담당했다.
후방에는 글라스코 장군의 통합 지휘하에 제35사단 제2여단 소속의 8개 대대와 제35포병여단 예하의 2개 포병중대로 구성된 군단 총예비대가 배치되었다.11개 백인중대와 2개 코사크여단으로 구성된 기병부대가 삼소노프 장군의 지휘를 받으며 우측지역의 노출된 측면을 방어했으며, 좌측지역의 노출된 측면 방어에는 2개 중대와 1개 기병부대가 배당되었다.
러시아군의 진지는 구릉 정상을 따라 12㎞에 걸쳐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진지 전방에는 평원이 전개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지형적 조건은 러시아군의 진지를 정면에서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러시아군은 진지 보강을 게을리 했다. 포병은 개방된 진지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각도계의 원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선임사령관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서, 엄폐된 진지에 대포를 배치할 수 없었다. 슈타겔베르크는 엄폐된 대포용 진지를 색출해서 부하들에게 부당하게 질책했으며, 독단으로 포병중대의 진지를 언덕 정상에 배치했다. 결국 러시아군의 대포용 진지는 적에 의해 쉽게 발견되었다. 포대간의 지원사격 역시 고려되지 않았으며, 포병 중대장용 관측소도 없었다.
6월 1일 공격에 나선 일본군은 우선 제3사단만을 동원하여 슈타겔베르크의 군단을 측면에서 공격한 후, 러시아 예비대가 좌측으로 이동하면 제5사단을 동원하여 러시아 제9사단의 우측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일본군 제4사단의 임무는 상대 군단 우측을 깊숙이(25㎞) 우회하여, 6월 2일 점심까지 러시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오쿠 장군은 본 전투를 단순한 군사력의 시험, 상대 약점의 탐색 그리고 결전을 위한 예비전 정도로 여겼던 만큼 전투개시 첫날부터 완승을 기대하지 않았다.
일본군의 공격은 포병의 맹렬한 화력지원하에 이루어졌다. 참전의 경험이 없었고 참호나 엄폐시설을 갖추지 못했던 러시아군은 전투개시와 동시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일본군 제3사단과 제1기병여단이 러시아 방어선 우측을 공격했고, 제5사단과 그 뒤를 따르던 독립포병여단이 중앙을, 러시아군의 우측을 우회하기로 되어 있던 제4사단이 좌측을 각각 공격했다.
일본군은 작전을 위장하기 위하여 제3사단과 제1기병여단이 먼저 전투를 시작했는데, 아카야마의 기병여단에 의해 러시아군의 후방퇴로가 위협을 당함으로써, 러시아군 방어선이 비관적 상황에 빠졌다.
제1동시베리아사단의 지휘관인 게른그로스 장군은 이 사실을 군단사령부에 보고한 후, 직접 제2보병연대를 동원하여 일본군 제34연대의 측면을 급습했다. 4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이 퇴각했으며, 제1보병사단의 상황이 완전히 복구되었다.
양측의 치열한 전투 속에 일몰이 찾아왔다. 6월 1일의 전투에서 일본군 제3사단이 약간 전진했지만 승자와 패자를 규정할 수는 없었다.
30. 최초의 육상 전투(6)
6월 2일 러시아와 일본 모두가 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1사단지역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친 직후부터 슈타겔베르크 진영에서는 2일 아침을 기해서 공세로 전환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군단사령관은 쿠로파트킨에게 이 계획을 보고했으나, 이미 실패를 확신하고 있었던 쿠로파트킨은 ‘모험적’인 계획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총참모부와 중앙정부로부터의 질책이 두려워 예정된 공격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쿠로파트킨은 전신에서 “승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제8토볼스키 보병연대를 철도편으로 파병하면 6월 2일 점심경에 도착할 것”이었지만, “동 연대는 6월 3일 이전에 출발지로 귀환행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었다. 결국 그는 공격에 성공한 연대장이 갑자기 적을 추격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슈타겔베르크는 허술한 첩보망으로 인하여 일본군 제4사단의 우회작전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러시아 진영 좌측을 공격중인 일본군 2개 사단만이 자신의 군단에 대항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군단의 좌측을 방어중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일본군 제2군의 주력부대를 공격하려 했다.
일본군의 우측을 동시에 두 곳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즉 게른그로스의 지휘하에 제1동시베리아사단이 정면에서 공격할 때, 제35사단의 예하부대로서 총예비대에 편입된 제2여단이 글라스코의 지휘하에 동쪽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우측과 중앙에 주둔중인 부대는 이전의 위치를 유지했다.
군단참모부는 반격에 대한 통일되고 합목적인 의견을 도출하지 못했다. 참모장 이바노프 장군은 슈타겔베르크와의 견해 차이로 공격명령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명령서는 일선부대에 하달되지 않았다. 6월 2일 아침이 되어서야 모든 부대원은 공격이 임박했음을 인식했으나, 누가 그리고 어디서, 언제 공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채 공격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6월 1일 늦은 저녁 슈타겔베르크는 글라스코에게 보내는 전신에서 이렇게 명령하였다.
귀관의 부대를 보강하기 위해 제34연대 예하의 1개 대대를 증파한다. 귀관의 임무는 …… 게른그로스 장군과 합의하여 게른그로스의 부대를 공격중인 일본군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이다. 퇴각이 불가피할 경우에는 북쪽으로 후퇴할 것이다.
반격이 임박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른그로스는 글라스코의 서신을 전달한 연락장교를 통해서 “본관과 하나의 고지를 향해 전진할 것을 제안합니다. 만약 군단장이 여명에 공격한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6월 2일 글라스코가 접수한 작전명령서에는 공격에 관한 사항이 전무했다. 바로 이런 사실들이 글라스코로 하여금 공격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으며, 제1보병사단 후방에 있던 그의 제2여단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전투 전야에 제9사단의 나머지 여단이 바판고우 역에 도착했다. 여단 소속의 일개 연대는 글라스코 장군의 주둔지역에 배치되었으며, 나머지 일개 연대는 예비대에 편입되었다. 현지 전황에 생소했던 여단장 콘트라토비츠가 우측 지역을 방어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결전이 이루어졌다.
일본군 참모부는 6월 1일에 전개된 전투상황을 분석한 결과, 제3사단과 제5사단 그리고 기병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정면 공격함으로써 슈타겔베르크 부대의 발을 묶어 놓은 후, 제4사단의 연대병력으로 우측방어지역을 침공하여 러시아군단 후방으로 연결된 철도를 파괴하여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포위하기로 결정했다.
6월 2일 일본군의 공격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우선 제5사단은 북쪽에서 고지를 공격할 것, 제4사단은 1개여단을 동원하여 러시아군 우측 방어지역의 서쪽을 공격하고 다른 부대는 우회할 것, 제3사단은 제5사단과의 연락을 유지하면서 제5사단 뒤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할 것, 예비대 중 단 2개 대대만이 군사령관의 직접명령을 받았다.
6월 2일 여명에 일본군 제2군 소속의 모든 포대가 포문을 열었다. 일본군 주력포대는 게른그로스의 제1사단을 향해 포화를 집중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관심을 일본군 제4사단이 우회하기로 되어 있는 우측 방어지역으로부터 유인하기 위한 전술의 일환이었다.
일본군의 집중포화는 게른그로스의 사단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엄폐물이 없었던 부대의 손실은 막대했다. 게른그로스는 글라스코의 여단이 약속대로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증원군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사단장은 일본군을 공격하고 지원해달라는 내용의 전신을 수차례에 걸쳐 글라스코에게 발송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원이 지체되고 있었다.
05시 30분에 게른그로스는 슈타겔베르크에게 “제2,3연대와 함께 글라스코의 여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현재까지도 여단은 공격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단이 우리와 함께 전선을 형성하는 즉시 공격에 나서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런데 글라스코의 부대는 그제야 이동에 착수하고 있었다.
이 사이 게른그로스의 사단은 매우 비관적인 상황에 처했다. 일본군의 포탄이 비 오듯 했기 때문에 제 위치에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더 이상 글라스코의 원군을 기다릴 수 없었던 게른그로스는 08시에 2개 연대를 동원하여 독자적으로 나섰으나, 40도의 무더위와 가파르고 돌이 많은 언덕 그리고 비탈길이 큰 장애물이 되었다.
08시 30분 게른그로스는 제2여단의 글라스코에게 “저돌적인 공격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따라서 귀 부대의 포격을 요청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3개 방향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어 있는 본관의 연대가 전멸할 것”이라는 의견을 전달했으며, 오전 10시에는 군단장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군단 소속의 총예비대는 이유 없이 후방으로 이동중이었다.
게른그로스의 공격은 성공적이었다.제2,3연대 소속의 모든 부대는 일본군의 제1선을 점령했으나 막대한 손실을 감당해야 했다. 약 12시경 게른그로스는 사단 휘하의 일개 연대를 추가로 전투에 투입했다. 일본군 제3사단의 선봉부대가 격퇴되었으며, 서쪽에 위치한 계곡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일본 제2군의 우측이 전반적으로 붕괴될 위험에 직면했다. 만약 이 순간에 글라스코의 여단이 도착했다면 전투를 결정지을 수 있었을 것이며, 러시아군의 우측을 포위하려던 일본군의 작전 또한 성공이 의문시되었을 것이다.
러시아군의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결과 일본군 제4사단은 러시아군 제9사단 소속의 제33, 36연대의 측면을 우회할 수 있었으며, 결국 제9사단은 퇴각해야만 했다. 11시 30분 제9사단의 오른쪽 측면이 깊숙하게 점령되었으며, 퇴로도 차단되었다. 제1사단의 후방을 통해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군단참모부는 우측 방어지역에서 정찰업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쪽에 일본군이 출현한 사실과 관련하여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았다. 슈타겔베르크 또한 일본군이 러시아군의 좌측을 공격중인 2개 사단(제3, 제4사단) 외의 다른 새로운 부대를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지도 못했다. 우회작전에 대비하여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9사단이 제1사단 후방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이 러시아군의 예비대가 배치된 지역과 포진지를 점령하고 서쪽에서 대규모로 공격하고 있음이 명확해진 12시가 되어서야 군단 참모부는 실체가 파악되지 않은 새로운 부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전세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글라스코의 부대가 게른그로스 사단의 좌측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으나, 슈타겔베르크 장군은 후퇴명령을 하달했다. 결국 글라스코는 게른그로스 사단의 후퇴를 엄호해야 했다. 슈타겔베르크의 모든 군단병력은 후퇴했다.
6월 2일의 전투 결과 러시아군의 병력손실은 약 3,500명이었으며, 일본군은 1,163명의 병력손실을 입었다.
슈타겔베르크 군단이 상대적으로 손쉽게 후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일본군 제4사단의 우회속도가 늦었으며, 포위작전을 확대하기 위하여 오쿠 장군이 자신의 예비대를 동원했는데 그것이 시기상조였다는 것이며, 둘째는 러시아군이 보여준 불굴의 집념 때문이었다. 2일간의 치열한 전투로 쇠약해진 오쿠 장군의 부대는 제1시베리아군단 소속의 퇴각중인 부대를 추격하지 않았다.
31. 최초의 육상 전투(7)
바판고우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 전투의 불운한 결과는 전체 일본군을 상대로 단 일개군단을 파병한 것에서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사령관 알렉세예프의 훈령에 따라 보강된 제1시베리아군단이 바판고우 방면으로 향했으나 그의 훈령은 만주군 사령관 쿠로파트킨 장군의 의지와 상반되는 것이었다. 쿠로파트킨은 총사령실이 계획한 것보다 적은 소규모의 군사력으로 뤼순을 지원하려 했으나, 그나마 중국과 한반도에 새로운 부대가 상륙하여 일본군이 현저히 강화된 후에야 실행되었다.
쭈렌첸 전투에서와 같이 바판고우 전투에서도 러시아군 지휘부의 상황대처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짜르정권의 장군들은 대체로 우유부단했으며, 예비대를 적절하게 운용하지 못했다. 군사평론가 이그나치에프가 훗날 기술한 바에 따르면 “바판고우 전투에서 고급 지휘관의 양성에 중요한 결함 중의 하나가 드러났는데, 상호 지원정신의 결여와 상관의 이해력 부족이었다.”
바판고우 전투에서 러시아 포병은 절반만이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엄폐되지 않은 진지에서 포격을 실시했기 때문에 일본 포병에 압도당했다. 일본군 포병은 각 주둔지에 2~3개 중대씩 집단 배치되었다. 각 포병집단은 개별 관측소와 통일된 포격통제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집중포화 방식을 채택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의 기병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군 진지의 좌측을 점령함으로써 러시아군 지휘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주력부대가 그곳에 집중되었다는 인상을 갖게 했다. 러시아군 기병대의 역할은 전무해서 포위작전을 수행중인 일본군의 사단병력을 적절한 때에 발견하지 못했다.
바판고우 전투는 애초에 계획된 것이 아닌, 우발적 특성을 갖는 것이었으며, 뤼순을 구원하기 위하여 파견된 군단은 봉쇄해제를 위해 정확하고 분명한 임무를 부여받지 못했다.
뤼순을 지원하기 위한 만주 주둔군의 첫 시도가 비록 실패했지만, 제1시베리아군단이 바판고우 방면으로 진군한 결과 일본군 지휘부가 뤼순 공격에 배정되었던 제2군을 북쪽으로 파견했다는 점에서 성과를 찾을 수 있다.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하기 위하여 랴오둥(遼東) 반도로 파병된 제11사단과 제9사단 그리고 현지의 제1사단 군사력 중에서 6만 명의 병력과 4백 문의 대포로 구성된 제3군을 새로이 조직해야만 했다.
만주군 사령관 쿠로파트킨 장군은 하이첸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전을 안겨 줄 계획이었으나, 이후 결전의 장소를 랴오양으로 변경했으며, 결전을 치르기 위해 랴오양으로 향하는 도중에 수차례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일본군의 기습공격이 시작된 순간부터 6월 말 사이에 발생한 모든 사건들이 1904~1905년의 러일전쟁 초기를 형성한다. 전쟁 초기의 주요 내용은 군사력의 전략적 전개였는데, 러시아군의 입장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가 매우 곤란했다. 우선 전장이 너무 원거리에 위치해 있었으며, 둘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수송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부대집결이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고, 6월이 되어서야 강력한 부대를 전략적으로 집결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의 군사행동은 제한적 특성을 갖는다. 일본군 지휘부는 해상과 육상에서의 첫 교전에서 승리함으로써 부대의 전략적 전개를 위해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 러시아군보다 한달 먼저 전개를 완료한 일본군 지휘부는 예정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일본군 지휘부의 다음 목적은 뤼순 요새의 점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