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목차
1. 개요
2. 내용
2.1. 전형필의 손에 들어가기 까지
2.2. 상세
3. 문화재청 홈페이지 설명 내용
1. 개요
靑磁 象嵌蓮池鴛鴦文 淨甁.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고려청자로, 표면에 여러 문양이 새겨진 정병이다.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이라는 이름을 풀이하자면, 원앙이 있는 연못 문양을 상감 기법으로 새겨 넣은 청자로 된 정병이란 뜻이다. 상감 기법이란 흙으로 도자기를 빗어낸 뒤에 칼로 흙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이 홈을 백토(하얀 흙)와 같은 색이 있는 흙으로 채우고 유약을 발라 도자기를 구워서 완성시키는 방식의 세공 기술이다. 상감 기법은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도자 장식 기법으로, 고려 후기인 13세기에 크게 발달하였다. 정병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기구인 법구 중 하나인데, 부처님께 바치는 깨끗한 물을 담는 병을 가리킨다. 고려시대의 정병은 금속이나 도자기 등으로 만들어졌는데, 금속 정병으로는 국보 제92호로 지정된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이 유명하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정병은 현재 몇 점이 전해지는데,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은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과 함께 고려시대 정병 가운데서 쌍벽을 이룬다고 평가된다. 하지만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게 팔려가기 전에 간송 전형필이 거액을 주고 사서 가까스로 지켜낸 유물이라, 유감스럽게도 본 정병의 출처나 제작시기와 같은 정보는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다.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은 1962년에 국보 제66호로 지정되었으며,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2. 내용
2.1. 전형필의 손에 들어가기 까지
앞서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을 간송 전형필이 거액을 주고 구매하여 일본인에게 넘어갈 뻔한 것을 막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을 정확히 짚자면, 본 정병은 이미 한 번 일본인 손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 자세한 내역은 다음과 같다.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은 개스비 컬렉션의 일부였는데, 개스비 컬렉션이란 영국 귀족 출신의 변호사 존 개스비(John Gadsby)가 일본 제국 시기 도쿄에 거주하면서 수집한 고려청자 수집품들을 말한다. 존 개스비는 일본 제국으로 25살때 이주해와서 변호사 일을 했는데, 귀족 출신이니만큼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도쿄에서 골동품 수집을 시작했고 처음에는 일본의 유물들을 사모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되었고 여러 경로를 통해 최상급 고려청자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헌데, 도쿄의 골동품 시장에 풀려있던 고려청자나 일본인 수집가들로부터 구입한 고려청자들은 죄다 도굴로 불법적으로 유출된 것들이었다. 개스비 컬렉션의 유물들만 해도, 개스비 이전 소장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도굴로 유출된 유물들이라는 심증이 굳어진다. 본 유물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의 이전 소유주는 조선총독부 재판소 고등법원장인 요코다 고로였고, 현재 국보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의 이전 주인은 경성 고등법원 검사 아유카이 후사노신이었으며, 역시 현재 국보 제270호로 지정되어 있는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의 이전 소장자는 주 대한제국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였다. 어쨌든 개스비 자신의 뛰어난 안목을 토대로 사모은 명품들이니만큼 그의 고려청자 컬렉션은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일본 제국은 제국주의의 광기에 점차 휩싸이게 되고, 1936년 일본 육군 장병들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 시도인 2.26 사건이 일어나자 개스비는 사태가 돌아가는 모양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일본을 뜰 채비를 하게 된다. 개스비는 일본을 뜨면서 가지고 있던 소장품을 다 처분하고 돌아가기로 결심하여 1937년에 본인 소유의 유물들을 내놓기로 했고, 여기에는 고려청자 컬렉션이 포함되어 있었다. 전형필은 개스비의 고려청자 컬렉션에 이미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었기에, 개스비가 고려청자들을 다 처분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개스비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는 40만원의 엄청난 거액을 주고 개스비로부터 본 유물을 포함한 고려청자 20점을 인수한다.
아마 전형필이 본 컬렉션을 사지 않았다면, 귀중한 고려청자 명품들은 다시 일본인들의 손에 넘어가 뿔뿔이 흩어졌을 것이다. 또한 일본으로 넘어간 우리나라 문화재들의 현황을 고려해보면, 지금에 와서는 그 소재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전형필이 구입한 20점의 고려청자들 가운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총 9점으로,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국보 제65호 청자 기린형뚜껑 향로
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국보 제74호 청자 오리모양 연적
국보 제270호 청자 모자원숭이모양 연적
보물 제238호 백자 박산형뚜껑 향로
보물 제286호 청자 상감포도동자문 매병
보물 제349호 청자 상감국화모란당초문 모자합
보물 제1954호 청자 음각환문 병
보물 제1955호 청자 양각도철문 정형 향로
2.2. 상세
높이 37.2cm, 입지름 1.5cm, 밑지름 8.9cm의 정병으로, 상감기법이 발달하였던 고려시대 11~13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정병은 전체적으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담녹색의 비색과 은은한 광택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병의 조형 형태는 병에 꼭 필요한 부분만 있고 과한 장식이 없어서 단정하며 정갈한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정병의 외형은 일견 주전자와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사용법은 일반적인 주전자와는 다르다. 보통 주전자는 물을 담는 몸체 위로 물을 넣는 병입(주입구)을 만들고 몸체에는 물을 따르는 주구(주둥이)를 붙이는데, 본 정병의 몸체에 작게 달려 있는 것은 물을 따르는 주구가 아니라 바로 물을 넣는 병입이다. 즉, 병 몸체에 달린 주입구에 물을 넣어서 몸체 위로 길게 빠져 있는 병목으로 물을 따르는 방식이다. 주입구에는 고리모양의 귀와 같이 주입구를 덮는 뚜껑이 있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현재는 소실되고 없다.
병의 몸체에는 연못 주변의 갈대와 버드나무, 연못에 피어난 연꽃이 묘사되어 있고, 원앙 한 마리가 물결을 일으키며 헤엄치고 있는 모습을 백토 상감으로 새겨놨다. 몸체에 새겨진 문양은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으로 전체적인 분위기에서는 소박함과 서정성까지 느껴지는데, 일종의 풍경화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병의 목과 병의 몸체가 만나는 부분에는 구름 모양과 같은 여의두무늬[5]가 새겨져 있고, 병목의 앞뒤로는 역시 백토 상감으로 단아한 모란꽃을 하나씩 새겨놨다.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은 몸체에 새겨진 회화적인 문양과 반듯하고 단정한 도자기의 조형 형태에서 고려의 높은 청자 제작 수준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의 정병 중에서 금속 정병인 청동 은입사 포류수금문 정병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고려청자 정병의 걸작으로 꼽힌다.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그 미적인 수준과 세련된 청자 제작 수준을 보여주는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를 높게 인정 받아,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66호로 지정되었다.
3. 문화재청 홈페이지 설명 내용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 (靑磁 象嵌蓮池鴛鴦文 淨甁)
고려시대의 청자 정병으로 높이 37.0㎝, 밑지름 8.9㎝의 크기이다. 원래 정병은 불교에서 모든 악을 씻어 버리는 의식에서 사용하던 용기의 하나로 중국을 거쳐 전해진 서방(西方) 양식이었으나, 고려에 와서 가장 세련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유물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으로 청아한 담록색 계통의 비취색 유약에 백토(白土) 상감만으로 새겨진 버드나무와 갈대, 연꽃, 원앙새 1쌍을 회화적으로 배치해 놓고 있다. 병 목에는 앞뒤 양면에 모란꽃을 하나씩 상감했다. 물을 따르는 부리는 8각으로 기품있게 만들어 병 목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았다. 물을 넣는 아가리는 둥근 어깨 한쪽에 아담하게 붙어 있는데, 원래 뚜껑이 있었으나 없어진 상태이다.
대체로 이른 시기의 상감청자는 유약이나 바탕흙이 매우 정선되어 있고, 청아한 비취색 유약이 세련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색인데, 이러한 바탕 위에 상감무늬가 곁들여졌던 만큼 한층 더 장식 효과를 높일 수 있었다. 이 정병 또한 이러한 이른 시기의 상감청자로 매우 정제되고 세련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국보 제66호
청자 상감연지원앙문 정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