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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회장은 산전수전, 온갖 경험을 한 사람이거든요. 부자라고 하지만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 사람은 죽음 앞에서 문제가 다를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죽기 전 저를 찾아온 것이에요.”
⊙ “인간에게 양심이 최고의 존재인데, 그 양심을 준 존재는 더 클 수밖에 없어”
⊙ “과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神이 창조한 極微·極大 세계에 비하면 인간이 아는 것은 극히 적어”
⊙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神이 준 것이 아니라 人間이 불러들인 것”
⊙ “스탈린·히틀러는 神이 되려고 한 사람. 스탈린은 하느님 행세하며 세계 압박해”
⊙ “공산주의… 당대에서 아무리 강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시간 속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어”
鄭義采
1925년 평북 정주(定州) 출생. 덕원신학교 고등부, 가톨릭대 졸업, 로마 우르바노대학 철학박사 / 가톨릭대·서강대 교수, 가톨릭대 대학원장, 가톨릭대 총장 역임 / 국민훈장 모란장 /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라틴·한글 번역상 외 다수, 《형이상학》 《존재의 근거 문제》 《인류공통문화 지각변동 속의 한국》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외 다수
한국 천주교의 대표적 지성인 정의채(鄭義采·94) 몬시뇰(Monseigneur)을 만난 것은 지난 2월 28일과 3월 7일이었다. 주 교황청 한국대사를 지낸 정종휴(鄭鍾休) 전남대 명예교수와 함께 정 몬시뇰을 만나 신(神)과 영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랑스어가 어원인 ‘몬시뇰’은 가톨릭 고위 성직자에 대한 경칭으로 ‘나의 주님’이라는 의미가 있다.
정 몬시뇰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李秉喆·1910~1987)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쓴 ‘사생결단식’ 질문 24가지를 받은 분이다. 갑작스런 이 회장의 죽음으로 정 몬시뇰은 답할 기회를 잃었다고 한다. 다만, 2012년 그의 제자인 차동엽 신부가 《잊혀진 질문》이란 책으로 답한 적이 있다.
기자는 정 몬시뇰에게 이병철 회장 질문의 답을 듣고 싶었다. 30여 년 전 이 회장이 건넨 ‘숙제’를 정 몬시뇰이 마무리 짓기를 기대하는 ‘외람된’ 바람도 있었다.
정 몬시뇰은 “이병철 회장이 돌아가시기 전인 1987년 9월 중순경, 절두산 성지 박희봉 신부를 통해 ‘인생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는 말씀을 들었다”며 “저는 그보다 몇 년 전 이 회장의 형님인 이병각씨의 임종을 도와 천주교에 귀의시킨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에게서 만남의 제안이 왔기에 ‘그냥 불쑥 만나 이런저런 말을 하기보다는 사전에 (얘기 나눌) 문제점을 정리해서 보내주면, 저도 준비해 심도(深度) 있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질문
삼성 창업주인 故 이병철 회장이 필경사를 통해 쓴 신과 영혼에 관한 24가지 질문. |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박 신부를 통해 “논리정연하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또박또박 필경(筆耕)한 24문제의 질문지를 그해 10월 초순에 받게 되었다”고 한다.
“24가지 질문을 받고 이 회장과 만날 날과 시각을 조절하던 중에 ‘이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치료를 받고 회복된 후 다시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어요. 저는 그분이 암인 것은 몰랐고, 더욱이 말기라는 것을 몰랐기에 호전의 좋은 소식만 기다리고 있었죠.
만일 그때 그분이 세상을 떠나실 것을 알았다면 어떻게든 찾아가서 제게 보낸 문제들을 풀고, 세례를 베풀어 하느님께 가시는 길을 도왔을 것입니다.”
이 회장은 병이 급속도로 악화돼 1987년 11월 19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 몬시뇰은 이 회장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이 회장은 구원을 받았다고 봅니다. 왜냐? 마지막에 길을 찾았는데 정상적으로 길을 열 수 있는 시간을 못 가진 것이죠.”
정 몬시뇰은 이 회장이 죽기 직전 “논리정연하고 놀라운 통찰력으로” 쓴 24가지 질문에 하나씩 답했다.
기자는 정 몬시뇰의 방대한 사고와 행간을 따라가기 벅찼음을 밝혀둔다. 말씀이 빨랐고, 톤이 낮아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다 쓴 기사를 정종휴 전 대사에게 보내어 ‘검증’의 과정을 거쳤다고는 하나 요령부득(要領不得)이었다. 일부 답변은 그가 쓴 저서 일부를 인용했다.
1. 신(神)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몇 시간을 말해도 (설명하기) 부족한 질문입니다. 신이 존재한다…. 믿는다는 게 뭔가요? 사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감각적 존재죠.
그러면 인간이 감각세계에 만족할까요. 동물은 감각세계에 만족하고 말아요. 주인이 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주인이 모르는 이가 오면 경계하고요. 인간은 감각에 만족하지 않아요. 저게 무엇인지, 왜 그런지 생각하고 배후가 무엇인지 따집니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배경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배후를 항상 묻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 물음을 통해 인간은 발전합니다. 결국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하는 거예요.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삽니다. 시공 속에서 사람은 시간을 초월해요. 시간 속에 살면서도 시간 속에 묶이지 않아요. 또 인간은 자기만 생각하지 않아요. 선조(先祖)도 생각하고 후손(後孫)도 생각하지요. 혼자 살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 사니까요. 가족과 이웃, 직장, 마을, 사회활동이 종합돼 일생을 삽니다. 그 삶에 사람의 일관된 무엇이 있어요. 시공간에서만 살면 동물과 다름없지요. 그러나 인간은 시공간을 완전히 넘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하느님의 존재를 두고 사람에 따라 긍정·부정할 수 있어요. 부정하는 이도, 긍정하는 이도 많은데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마음이 불안하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뭔가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아 혼란을 겪습니다. 이것이 현재 인간의 한계예요. 그러나 달리 보면 (한계가) 좋은 기회죠.
한계가 없으면 발전이 없거든요. 인간성이 어떻게 됐든 시공간 속에서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 한계를 미래로 열어가야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실재하느냐’고 묻습니다. 있다면 인간은 창조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고, 없다면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죠. 그런데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사는 존재예요. 그러니 나도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야 해요. 받기만 하면 도둑놈 심보니까요. 인류 문화 속에서 해결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신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한계를 가두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부터 어디를 향하는지 봐야 합니다. 나를 넘는 데서 무엇을 만납니까. 허공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거기서 신의 존재라는 게 나와요.”
― 그럼, 신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신의 존재는 시작과 끝의 문제입니다. 무(無)에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존재가 없던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생각하지 못할 어떤 존재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물질은 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럼, 물질적인 것을 넘는 게 무엇이냐. 그 세계를 ‘신의 세계’라고 말하죠. 그 세계는 막연한 허공을 의미하지 않아요. 논리정연하고 놀라운 질서가 운행되는, 놀라운 지혜가 작용할 수밖에 없는 세계지요. 시공간 이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뭐라고 하느냐, 저는 ‘신’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동양에서는 그 존재를 하늘과 땅에서 찾으니까 하늘의 임자, 천주(天主)라고 하지요. 이 말은 중국에서 만들었는데 서양에는 그런 단어가 없어요.”
― 고 이병철 회장은 ‘왜 신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만약 신이 자기 존재를 똑똑히 드러낸다면 인간은 할 일이 없어요. 자기 나름의 능력을 스스로 발현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요.”
2. 신은 우주 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정의채 몬시뇰은 자신의 사제서품 50주년(2003년)을 기념하는 모임에서 김수환·정진석 추기경과 만났다. |
“사실 하느님은 당신의 한없이 선하심을 주시고자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는 하느님 사랑의 작업입니다.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심이, 다시 말해 하느님의 뜻이 이뤄진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순교자들에게서 창조주를 증명할 수 있어요. 창조의 거룩함에, 또 하느님의 완전성에 완전히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하느님의 거룩함에서 떼어놓지 못했습니다. 죽음으로도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선하심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하느님이 강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유에서 연유하였습니다.”
―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신을 증명할 수 없습니까.
“과학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하느님께서 오묘한 지혜로 창조하신 극미(極微) 세계와 극대(極大) 세계에 비하면 인간이 아는 것은 극히 적은 것입니다. 예컨대 인체에 대해, 특히 뇌와 신경계통에 대해 입문에 들어선 정도밖에 안 됩니다. 또 생명의 깊은 세계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상태여서 다만 그 현상의 일부분을 알 뿐이고,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창조주가 사랑으로 창조해주신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에 대해 인간은 이기심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자연을 죽이고 인간 자신도 파멸의 길을 걸으며, 과학기술로 배아 조작을 통해 인간 생명의 비경(秘境)까지 마음대로 조작하려 들면서 하느님 창조 의지에 역행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창조 의지에 따라 선한 마음으로 자연을 올바로 쓰면 자연은 무한한 혜택을 줄 것이나, 역행하면 하느님이 보복하시기에 앞서 자연이 먼저 인간을 보복할 것입니다.”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 아닌가?
“진화론이 무엇인지, 그 법칙은 어디서 나오는지 묻지만, 진화론은 그 자체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에요. 무엇인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에요. 만들어진 것을 놓고 정리하다 보니 진화론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먼저 있고 그곳에서 (진화론이) 출발한 것이죠. 진화론이 갑자기 지구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있어서 진화론이 나온 것이거든요.
그럼 ‘진화론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질문할 수 있어요. 이 질문이 확장되면 신이 존재하느냐 마느냐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의 말씀’으로서 창조론이 나온 것이니까, 신의 존재를 말하지 않고 창조론을 이야기할 수 없단 말이에요. 논리적으로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고 또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이 우주가, 이 지구가, 이 대한민국이 없던 데서 생겨난 것인가요? 다시 말해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출발해 번성하고 갈라져 나라를 생성했는지는 인류학에서 정리가 다 되었어요. 없던 사람이 지구에 나타난 것이죠. 그것이 몇억 년, 몇천억 년 전인지는 몰라도 원시인이 나타난 것만은 확실해요. 그 사실을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류가 각지로 흩어져 사는 동안, 삶의 지대가 각기 다르고 형편이 다르다 보니 삶의 형태가 달라지고 생김새도 달라졌죠.
그러나 다르면서도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게 있어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살아도 양심이란 게 있어요. 그 양심 때문에 다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그럼, 양심은 무엇인가. 양심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인간 자체는 없다가 생겨난 것이 확실하니 어디서부터 주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럼 ‘주어졌다’는 것은, (생명을) 준 존재는 더 큰 존재라고 볼 수밖에 없어요.
인간에게 양심이 최고의 존재인데, 그 양심을 준 존재는 더 클 수밖에 없거든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을(양심을) 거부한다는 말이에요.”
― 왜 거부할까요.
“그래요, 왜 거부할까요. 양심대로 살고 싶지 않으니까, 제멋대로 살고 싶으니까, 남의 것 훔쳐 먹고 싶으니까 거부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성이 잘못됐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거든요. 누가 봐도 틀렸다고 할 것인데, 힘이 있으니까 자기 맘대로 하고 싶거든요. 쉽게 말해 가져가고 싶은데 힘이 없어서 못 가져가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여기서 양심이 뭐냐. 얼굴도 다르고, 종족도 언어도 다르지만, 세계가 어울려 같이 살아가는 것은 결국 양심 하나로 살아가는 것이거든요. 그 양심은 태어나면서 스스로 가지거나 만든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느님이 주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1990년 10월 8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만난 정의채 신부. 당시 제8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서 교황 특명으로 ‘종합대학 안에서의 신학생 양성’을 주제로 발표해, 세계 교회의 대표들 앞에서 박수갈채를 받으며 요한 바오로 2세와 악수하고 있다. |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인간 생명의 존귀함마저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부추기며 가속화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놀라운 발전입니다. 본래 과학기술 자체는 주어진 물질세계의 법칙을 깊이 파악하고 이용하여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인간 지혜의 소산입니다. 그러므로 과학기술 자체는 좋은 것이며, 인간 삶에 크나큰 행복을 선사해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잘못된 인간 심성에 악용될 때 자연과 인간 생명의 놀라운 파괴 도구 역할을 하게 되며, 창조 의지에 전면 위배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현금(現今) 과학기술은 생명의 비경에까지 침입하여 생명을 조작하기에 이르렀으며, 더욱 심하게는 생명의 대량 살상을 마음대로 자행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했습니다.
생명,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하늘의 선물이며 은혜이며 기쁨입니다. 삶의 모든 가치의 근거입니다. 또한 인간 이전의 것이며 인간 이상의 것입니다. 생명을 사랑하며 풍요롭고 아름다운 삶을 실현하는 일이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일입니다.”
5.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신이 준 것이 아닙니다. 관점 자체가 다른 것이죠. 인간이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거저 받았어요. 없던 자기 존재가 생겨서 먹고살 수 있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러면 인간으로서 신에 대한 의무가 있는 것이에요. 그냥 받기만 할 수 없거든요. 인간이면, 은혜를 받았으면 갚아야지요.
인간으로서 도리, 인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도리, 조물주에게 지켜야 할 도리가 있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안 지켜서 문제가 생긴 것이에요. 왜?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 자리에 올라가려고 한 것이에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것이에요. 신이 의도한 인간과 다른 인간… 스스로 신이 돼버린 것이에요.”
6. 신은 왜 스탈린이나 히틀러 같은 악인을 만들었나?
“스탈린·히틀러가 바로 신이 되려고 한 사람들이죠. 특히 스탈린은 하느님 행세를 하며 세계를 압박했습니다. 유물론(唯物論)은 빵과 자유를 빼앗았으며,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贖罪)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두었는가?
염수정 추기경과 만난 정의채 몬시뇰. |
“죄는요, 근본적으로 마음의 문제입니다. 죄는 결국 인간이 가야 할 길을 가지 않고 딴 길을 가는 겁니다. 정도(正道)를 벗어나 반대로 가는 것을 의미하지요.
인간에게는 양심이란 게 있어요. 인간만이 양심을 가지고 태어나 더불어 삽니다. 개나 짐승에겐 양심이 없어요. 아무리 고등동물이라도 양심이 없어요. 양심은 책임과 권리를 동시에 갖고 있어요.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양심이 없으면 같이 살 수 없어요. 그러니까 양심은 가족에서 시작해 민족·인류의 개념으로 확장됩니다. 인간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에서 나타나는 것이 양심입니다.
인간 사회를 깊숙이 분석하면 여러 가지 삶의 다른 형태로 살아가지만, 인간의 삶은 동서양이 모두 같습니다. 인간 삶의 기본은 같지만, 그 양태가 다를 뿐이에요.
죄라는 것은… 인간 양심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대충 구분이 돼요. 동서양이 다 같아요. 그럼, 여기서부터 창조주라는 것을 상정하고 설명할 수밖에 없어요. 그게 없으면 설명이 안 돼요. 우연에서 우연히 생겼다는 설명만으로 인간을 설명할 수 없어요.”
8. 《성경(聖經)》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성경》은 인류를 창조하신 하느님과 인류와의 관계가 어떻게 시작되느냐의 물음과 같습니다. 인류는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확실히 시작은 어디서부터 (인류가) 시작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인류학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가… ‘인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거든요. 생김새는 달라도 머리가 하나요 눈이 두 개, 팔다리가 대칭되는 것은 인류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한 조상에서 출발한 것임을 다 알 수 있거든요. 그럴 때에 근원적으로 하나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밖에 없고, 그 출발을 아담과 이브로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과 이브를 다시 봐야 합니다. 옛날에는 신화와 종교를 학문 영역에서 분리해서 보려고 했어요. 지금은 학문이 전설에서 얻은 것을 거의 증명하고 있어요. 특히 인류 문제에서 말이에요. 인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온 종교와 학문적 연구(과학)가 합쳐지고 있는데, 두 분야가 모순된 게 거의 안 나오고 있어요. 어떤 면에서 보면 과학이 종교가 말한 것을 개척해 들어간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왜? 맞으니까요.
물론 부분적으로 조금 지대가 다른 것은 있지만 별것 아닙니다. 과학은 인간의 출발점까지는 증명할 수 있지만, 출발 자체를 설명할 순 없습니다. 어떻게 출발하는지 누구도 출발 이전은 몰라요. 바로 그 지점에서 창조주 문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2013년 3월 2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사제서품 60주년 축하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정 몬시뇰 오른쪽은 염수정 추기경(당시엔 대주교). |
“먼저 하늘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인간만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거기에서 희망을 보고 마음을 한없이 열어가는 존재입니다. 하늘은 인간이 언젠가는 가야 할 고향처럼 느껴집니다. 하늘에는 인간의 희망이 있고 꿈이 있습니다. 만일 인간에게 하늘이 없다면 이 각박한 지상의 삶을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 것입니다.
인간은 하늘을 향해 심호흡하며 생기를 얻습니다. 하늘에는 태양이 있고, 흰 구름이 있고, 달이 있고, 무수한 별들이 있습니다. 땅과 하늘, 우주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함을 보며 동양에서는 음(陰)과 양(陽), 오행(五行), 도(道), 기(氣) 등의 원리를 생각했습니다. 하늘에는 생명의 원천이 있습니다. 천지만물의 창조주이며 주재자인 하느님이 계십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하늘에는 하늘과 땅을 주재하는 분이 있음을 일반적으로 믿어 왔습니다. 그런 하느님을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창조하고 움직이는 분, 하늘과 땅의 모든 조화를 지배하는 분, 인간의 선과 악을 심판하는 분, 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는 분으로 생각합니다. 이교(異敎) 세계에서 이런 분은 아주 무서운 존재이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은 바로 우리 마음이 그분께로 움직여 가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보잘것없는 존재인데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처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친근하게 더 큰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그것이 병들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심정인 것입니다.”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이 먼저입니까, 육신이 먼저입니까’ 묻는데, 그야 영(靈)이 앞서죠.
물질세계가 생성된 과정을 인간이 어느 정도 증명하게 됐어요. 지구 생성부터 시작해서 우주 생성도 거의 정리가 됐어요. 그런데 물질세계에 어떤 법칙이 있는데, 그 법칙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 법칙은 물질을 넘어선 것이에요.
인간에게는 양심이 육체를 넘어선다고 볼 수 있어요. 육체적으로 훔치고 싶어도 양심이 못 하게 막거든요. 아이부터 노인까지 다 마찬가지예요.
그럼, 영혼이 육신 속에 있는 것은 확실한데, 육신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거든요. 이 소스(source)를 가지고 우리는 영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영의 세계(물질을 넘는 세계)와 물질에 속하는 세계… 이 두 가지가 모두 인간에게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영의 세계가 육신의 세계에 지시하는 것이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이죠.”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기독교, 유대교, 불교, 회교, 유교, 도교
“종교는 인간 마음의 개심(改心)을 이루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또 강한 집결력이 있기에 종교는 사회에 지대한 영향, 근본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종교에 있어서 무엇보다 강한 힘은 솔선수범입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본연의 순수한 모습, 본모습을 구현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無神論者), 타 종교인들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정의채 신부가 2004년 11월 9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강연하고 있다. |
“천주교를 믿지 않으면 다 지옥에 간다는 것은 천주교 교리에 없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엔 별의별 종교가 다 있잖아요. 그러나 종교라도 일률적으로 다 같지 않아요. 인간이 똑같이 살지 않는 것처럼요. 같은 사회 테두리 안에 살아도 사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잖아요. 선인도 악인도 있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거든요.
(죄는) 육신에 의해 혼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물건을 훔쳐선 안 되는데 훔치고, 죽여선 안 되는데 죽이고 말이에요. ‘안 된다’는 지시가 어디서 나오느냐고 할 때는 다른 세계를 상정할 수밖에 없어요. 모든 것이 육신에서 나온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개에게도 비슷한 것이 있어야 해요. 그러나 개나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이거든요. 정신세계라는 것이 개한테는 없단 말이에요.
‘죽어서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데, 사람이 죽으면 ‘결산(決算)’을 해야 합니다. 타인(他人)을 죽여놓고 아무렇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벌 안 받고 같이 죽고 만단 말이에요. 그럼 안 되잖아요. 양심에 모순이 되는 것이에요.
그럼, 죽을 때 사람이 회심(回心)하며 갑니다. 후회하고 잘못을 뉘우치고 가는 경우가 많거든요. 죽을 때 제대로 양심이 돌아온 것이지요.
이 (회심의) 과정을 이교 세계에선 설명을 못 해요. 그러나 그리스도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배경이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겁내지 말고,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라고 하셨어요.
‘죄인이 회개(悔改)하고 죽을 때 어떻게 되느냐’를 생각할 수 있어요. 죄인으로 죽어도 회개하고 죽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그거(죄)에 대한 값을 치러야 해요. 무효다! 없다! 이것은 아니거든요. 그럼, 무엇이냐. 연옥(煉獄)이 게재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공평하지 않아요.
일생 동안 나쁜 짓은 다 하고 마음껏 다 해먹고, 죽은 다음에 ‘잘못되었습니다’ 하고 끝나면 너무 억울한 것이지요. 세상 것을 모두 돌려주고 회개하면 알아듣겠는데, 갑자기 죽게 되니까 천당(天堂)에 갔다? 말이 안 되거든요. 양심에 어긋납니다.”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일이고 다른 종교는 이단시하나?
“천주교 교리의 깊은 뜻은 이런 것을 의미해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면 양심(良心)대로 살아야 합니다. 양심이 하는(아는) 대로 살아야 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세속적으로 훌륭하다고 해도 못 할 일이 있거든요.
인간으로서 제일 좋은 길이 무엇인가. 남을 해치지 않고 나쁜 짓을 해선 안 돼요. 또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세상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나름대로 할 일이 따로 있어요. 가족이나 직장, 사회에서 주어진 몫이 있어요. 거기서 인간답게 사는 것이에요. 그것이 양심이에요. 좀 더 양심을 올바로 이끄는 일은 교회가 잘할 수 있어요. 그런 바탕 위에서 좋은 세상을 만들자, 구원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법당이나 사원도 다 좋아요. 사람은 누구나 자유가 있기에 그 자유를 침해해선 안 돼요. 자유를 침해하면 왜 안 되는가. 자유를 해치면 근본적인 양심까지 빼앗아버리는 것이 인간의 세력… 세속의 세력이에요. 공산주의처럼 무신론이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어요.
어떤 사람이 불교를 믿기에 천국에 못 간다? 그 사람을 나쁘다고 할 수 없어요. 양심에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에요. 하느님을 알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으니까요. (종교가 달라도)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살았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에요. ‘왜 천주교 신자가 안 되었느냐’고 말할 수 없어요.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으니까요.”
― 가톨릭은 다른 종교를 이단시하는 것은 아니죠.
“그것도 구분해야지요. 알 만한데도 고집을 부리는 수가 있거든요.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러니까 세속적인 것이 있잖아요. 순전히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 그런 양심은 인정 안 하죠. 그것은 기만이죠. 어디까지나 자기기만이죠. 그러나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확신하며 가는 길에 대해선 말하면 안 돼요.
다만, 그것보다 이게 더 나은 길이라고 말할 수는 있죠. 기회가 생기면 가르쳐줄 수 있는 의무는 있지요. 올바로 가야 하니까 말이죠.”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어쩌면 당연한 질문이에요. 단순한 사람은, 어린이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은 이렇게 묻지 않을 겁니다.
이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느님 앞에서 각자가 ‘결산’해야 한다는 표현이에요.
모든 사람이 죽을 때 똑같이 나타나요. 살 때는 몰라요.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독대해보면 누구에게나 다 나옵니다. ‘나 어떻게 됩니까’, 죽기 싫으니까. 인간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 살아 있는 사람 중에 천국의 실체를 봤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죠. 인간의 한계인데, 하지만 천국이 없다면 그리스도 구속[救贖·예수가 십자가의 성혈(聖血)로 인류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 사업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자기가 알아서 다 하게 돼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속할 필요가 없거든요.
인간은 ‘앎의 욕구’가 있으면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대답을 다른 사람에게 듣고 싶은 게 인간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을 때에 자기가 없어진다는 생각을 안 해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표명하고 가요(죽어요).
‘나 죽어 어디로 갑니까, 나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무엇인가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어디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이죠. ‘여기가 끝이 아닌데…’ 하는 마음이 바닥에 깔려 있어요. 옛사람들이 명당 자리를 찾고 묘지를 이장하는 것도, 죽어서 좋은 곳에 가고 싶다는 심리가 부지불식간에 깔린 것이에요.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데라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죽을 땐 죽음 앞에선 달라지더라고요.
저는 가난한 분에서 최고의 사람까지 다 만나봤는데 똑같아요, 죽음 앞에선. ‘나 죽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묻습니다. 어떤 분은 ‘좋은 일만 하려고 했는데 왜 이렇게 죽어야 해요?’ 하는 이도 있어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 ‘나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십니까.
“그때그때 달라요. 환경이나 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적 능력이라든가, 지엽적으로 설명할 때도 포괄적으로 얘기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사람에 따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설명하면 거의 납득하지요. 납득 안 하고 죽음 앞에서 고집 피우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 봤어요.”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惡人)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죄는 다르게 나올 수 없고, 자기 양심에 근거하는 것이에요. 누구는 좀 더 교육받아 세련된 사람도 있고 좀 투박하지만 착하게 산 사람도 있지만, 양심에 있어선 교육을 받았든 받지 않았든 다 같아요. 남의 물건을 훔쳐선 안 되고, 사람을 죽여선 안 된다는 것은 다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 기초 위에서 일생을 ‘결산’해야 한다는 것이죠, 일생을.”
16. 《성경》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근본적으로 죽음 앞에선 누구나 같은 존재예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나 죽어 어디로 갑니까’ 하고 묻습니다. 적나라한 얘기지만 부자나 빈자나 다 마찬가지죠. 완전히 한 인간으로 돌아와 ‘나 어디로 갑니까’ 하는 것이죠. 내 사업이 (죽은 뒤) 어떻게 될 것인지, 거기에 대해선 한마디도 없거든요. 인간의 본모습이 그때 나오는 것이죠.”
― 이병철 회장은 종부성사(終傅聖事·임종 시 몸에 기름을 바르고 최후로 사죄의 은총을 받는 천주교 의식)를 받았습니까.
“돌아가실 때 저와 접촉이 안 됐어요. 그러나 훌륭한 사람이라고 봐요. 개인적으로 큰 부(富)를 이루려고 사업한 게 아니거든요. 말하자면 세계 속에서 큰 사업을 한 사람이에요.
제가 해외에 자주 다닐 때 한국에 진출하려던 해외 기업들이 ‘미스터 리가 누구냐’고 제게 묻곤 했어요. 한국에 진출하려면 이 회장과 부딪혀야 하거든요. 그냥 진출할 수는 없고 국내 기업과 합작해야 하니까, 그 끈이 필요해서입니다.”
― 신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던 이병철 회장은 천국에 갔을까요?
“제 생각에 구원을 받았다고 봅니다. 왜? 마지막에 길을 찾았는데 정상적으로 길을 열 수 있는 시간을 못 가진 것이죠.”
― 안타깝게도….
“(이 회장 건강을) 전하는 사람의 말이, ‘다 나으면 다시 만나게 돼 있다’고 했거든요. 기다리라고 해서 전 그런 줄만 알았죠. 전해주는 말만 믿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속수무책이었죠. 그분이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례(洗禮)를 주었겠지요. 그분도 세례받기를 원했고. 하느님의 섭리라는 게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이 있어요.”
―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된 것이니까….
“그쪽에서 막으려고 한 것도, 제가 막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나려고 했는데 안 된 것이니까. 어떻게 하겠어요.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의 생각과 상관없이 어떤 운명적으로 오는 것이 반드시 인간에게 있어요.”
― 인간은 운명을 타고나나요?
“그렇죠. 어쩌면 운명론자라 해도 할 수 없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섭리예요. 인간이 어느 한계를 항상 받고서 오는 것이에요. 모든 면에서…. 그런데 그 모습이 각양각색이에요. 그것(섭리)을 완전하게 식별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없어요.”
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 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왜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교황청이 있는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공산주의가 제일 강한 국가였어요. 가톨릭 국가에서 공산주의가 극성을 부리고 범죄가 왜 그리 많느냐는 질문인데,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더 깊이는 못 본 거예요.
인간이 건강해질 때가 언제일까? 중병을 앓고 나서 더 건강해집니다. 저항력이 생기니까요. 그것을 안 거치면 인간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요. 무신론에 근거한 공산주의가 결국 정신적인 유신론(有神論)을 강화시키는 작용을 한 거예요.
당대에 아무리 강할지라도 잘못된 것은 시간 속에 도태될 수밖에 없어요. 누구나 시간 속에 쓰러질 수밖에 다른 길이 없어요. 억지로 우기면 전쟁해야 하는데, 그럼 다 파괴되고 착한 사람도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들춰보면서 미래로 나가야 해요.”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결국엔 인간성의 문제예요. 인간성이 선한 길로 갈 수도, 악한 길로도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선악의 구별은 때에 따라 달라져요. 옛날에는 허용 안 되던 것이 지금은 허용되는 게 있잖아요. 인간 문화의 발전에 따라 어떻게 적용되느냐의 문제인데, 천편일률적으로 다 가야 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어요. 환경이 다르니까 선악의 유동성인데, 어느 기준에 맞춰 꼭 이렇게 봐야 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선악이라는 판단은 그 상황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에요. 제가 학교 다닐 때 ‘경평전’(1929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서울과 평양의 도시대항전)이란 게 있었어요. 그땐 몇 골 넣느냐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선수들이 다리를 몇 개 부러뜨리느냐가 관심사였어요. (하하하) 우리 학창시절엔 그게 관심사였지만 지금 아이들은 그런 것을 알지도 못하거든요.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게 있는데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 인간에게 안 되는 것은 다 있어요. 환경이 변했을 뿐이지 인간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相剋)이라고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산국이 되었나?
“실존주의를 비롯해 마르크스주의에서, 또 유럽 문화에서 통용되는 자유와 평등, 해방의 개념은 본래 그리스도, 특히 성서의 핵심 개념입니다. 그 개념의 근본 출처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런 개념들은 유럽 민중에게 수천 년간 친숙해지고 체질화된 개념입니다. 또한 이런 개념들은 인간 존재와 인간 본성에 근거한 개념들입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는 그 원천적 성격, 즉 초월적이고 존재론적인 성격을 거부하고 순전히 내재(內在)적 관점과 경제 현상적 측면에서만 풀이했죠.
그 결과, 변증법적 유물사관은 착취론, 사회정의론, 계급투쟁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으로 위세를 떨쳤습니다. 서구의 오랜 전통인 ‘자유’ 개념을 지배계급의 자유 개념으로 몰아붙였으며, 그런 자유를 무산자들에게는 적대 개념이라 낙인찍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마르크스주의 운명이 20세기와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리라는 어떤 확신이 있었어요. 그것은 자유 개념의 놀라운 확산과 민주화, 경제 부흥에 대한 세계의 열망이 무르익었기 때문이죠.
공산주의 종말은 이론적으로는 벌써 1950년대 후반기에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특히 가톨릭 학자들의 맹렬한 학문적 활동에 기인했습니다. 예컨대 서방 세계에서 세계 최대의 공산당을 자랑하던 이탈리아 공산당은 가톨릭 성직자 콜넬리오 파브로 교수의 강력한 이론적 공박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골격과 같은 변증법은 원래 헤겔 관념론에서 차용된 것이므로 변증법 자체가 정신적인 것이지 유물적일 수 없다는 강한 이론 앞에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휘청거렸습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은 관념론적 유물사관이란 모순된 개념이 되는 것입니다.
폴란드는 과거 강력한 가톨릭 국가였습니다. 자유노조가 결성되었고, 그들의 공산체제 거부와 자유·인권회복 운동 등은 결국 공산정권의 붕괴를 몰고 왔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全) 동유럽과 소련까지 공산정권 붕괴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 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교회가 많아지면 범죄가 줄어들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바람이죠.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도 인간들이 형성한 겁니다. 교회에 가면 사람이 완전히 변하고 욕심도 다 사라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교회는 인간이 어떻게든 노력해야 한다고 지시할 뿐이지, 교회 자체가 인간성을 완전히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세 끼 먹어야 하고, 8시간은 자야 하고, 육신이 요구하는 것은 다 뜻대로 해야 하니까요. 그러나 육신이 영혼의 지배를 받으니까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이 훔칠 때 나는 훔치지 않는다. 다른 사람 없는 데서 막 깎아내려도 착한 신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에도 문제가 있어요. 교회 안에서 통일이 안 되는 것이에요. 서로가 잘났어요. 세속에서 서로 다 잘났거나 교회 내에서 서로 다 잘났거나… 어쩌면 교회가 더 나쁠 때가 많아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니까 말이죠. 무슨 자신들이 천사나 되는 것처럼 말하거든요. 그럼 안 되는데 말이죠. 서로 자기가 부족한 것을 말하면서 협동할 생각은 안 하고 위에 서서 내 밑에 오기를 바라거든요. 하지만 그래도 교회는 발전합니다. 세계가 막지 못합니다.”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와전되었어요. 교황 개인의 결정인지, 교황좌(座)에서 하는 공적인 결정인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교황도 사람이니까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죠. 교황은 화도 안 냅니까, 화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교황직에서 교리적으로 세상을 끌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그럼, 교황직에서는 잘못이 없는가? 거기서도 분간을 해야 해요. 정치적인 문제,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선 잘못할 수 있어요. 그것이 중세(中世)의 역사예요. 그렇지만 영성적(靈性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리(代理)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요.”
― 사제들이 특정 이념에 따라서 탈핵(脫核)·반핵(反核) 등을 주장하며 ‘그리스도 소명이니 따라야 한다’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정의구현사제단(정구사)은 제가 어떤 면에선 초기에 키웠죠.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때는 유신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반대의 선봉에 섰죠. 그런데 박정희 유신이 무너질 때 정구사의 역할도 끝났어야 해요. 목표가 끝났는데도 다음 정권하고 어떻게 하는 데에는 난 찬성이 안 가요. 의견을 내놓을 수는 있으나 옛날식의 연장에서 집단적으로 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것이죠.”
22. 신부(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사제직이 뭐냐,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사명을 완수하는 데 시대의 문화에 따라서 어떤 것이 더 유효한지는 고민해볼 문제입니다. 독신이라는 것도 한 방편이지 독신 자체가 문제가 되는(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불교의 대처승(帶妻僧)처럼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세시대 가톨릭은 세상의 권리와 너무… 말하자면 교권(敎勸)이 세속화된 것이죠. 교회는 세속과 다를 수밖에 없는데 말이죠. 거기서 루터를 중심으로 싸움이 일어난 것이에요. 교권이 오버한 것이 있지요. 세속권과 영성적 문제를 혼돈해 일어난 것입니다. 반드시 교회라고 해서 세상 안에 있는 동안에 다 옳다? 말이 안 되는 것이죠.
그때까지 가톨릭이 잘한 점은 교육제도입니다. 수도원이나 교황청을 중심으로 교육이 잘 이뤄졌지요. 예수를 알리는 길은 교육밖에 없었으니까. 유럽에서 대학이 먼저 나왔는데 다 교회에서 이뤄진 것입니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는 것인가?
“모르고 하는 질문이에요. 어떤 면에서 출발과 다르게 나간 측면이 있지만, 어느 때나 일어나는 한계적인 문제로 봐야지 교회 자체의 문제로 비약할 수는 없어요.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명암이 같이 가게 돼 있어요. 아무리 좋아도, 인간적으로 부족한 것이 따르게 마련이어서 교회는 자만할 수 없어요. 좋은 일을 하면서도 어디서 잘못될 수 있는지 항상 염두에 둬야 해요. 사회도 그렇게 (교회를) 봐줘야 해요.”
― 천주교가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조국 근대화의 선봉 역할을 누가 했는가? 천주교가 확실하죠. 먼저 들어와 박해를 받아 쓰러졌으니까요. 구한말, 시대의 변화와 개방을 호소하며 경고한 것이 천주교죠. 경고하니까 잡아 죽였죠.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개국의 문을 열라고 했는데 박해로 답한 것이죠.
그때 (서구 문물을) 받아들였다면 우리가 일본보다 훨씬 앞서갈 수 있었는데 오히려 박해를 받아 한참 뒤떨어지게 된 것이죠. 만약 프랑스 식민지가 됐다면 서구 문명을 더 빨리 받아들여 일본보다 앞섰을 텐데 말이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게 얼마나 우둔한 짓입니까.
그러나 더 봐야 할 것이 있죠. 교회를 타고 식민지가 된 나라들도 있거든요. 나쁘다고 볼 것인가? 그 민족으로 볼 땐 나빠요. 왜? 식민지를 만들었으니까. 그럼 식민지가 안 됐다면 다 좋았을 것인가? 그것은 또 아니에요.”
―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독립통고서에 서명한 33인 중에 개신교·천도교·불교 대표는 포함됐으나 천주교 대표는 빠졌습니다.
“당시 천주교 주권을 쥔 사람이 프랑스 사람들인데, 프랑스는 일본처럼 식민지 지배국가였지요. 정치적으로 같은 유형의 국가였으니 서로 통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습니다. 당시 세계 상황 속에서 말이죠. 박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면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할 텐데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또 당시 신자들이 뛰어나다고 할 수도 없었죠. 왜냐? 다 죽여버렸으니까. 그런 바탕에서 보면 천주교가 당시 잘했다,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러나 민족적으로 보면 잘못했어요. 일본에 봉기를 못 했으니까. 왜? 할 만한 사람을 다 잡아 죽이고, 순교해버렸으니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죠. 천주교의 잘못이라기보다 정치가 다 잡아 죽여버렸으니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가 잃어버린 것이죠.”
24. 지구의 종말은 오는가?
“대답은 간단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시작은 있되 끝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요? 모든 시작은 끝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러니까 변화가 있는 거예요. 영원은 시공을 초월한 세계이니 변화가 없어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존재는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