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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이전 뉴욕일원 한인사회에서 은행 거래를 하며 비즈니스를 한 사람들은 누구나 우상영을 기억할 것이다. 그는 한국계 은행 창설 작업에만 5차례나 주역으로 참여한 뱅커로 유명하다. 1975년 한국의 시중은행인 상업은행의 뉴욕지점 창설을 비롯해 리테일 뱅크로서의 현지법인, 브로드웨이 내셔널 뱅크(BNB), 캐톨릭 한미연방신용조합, 리버티 뱅크 등 창설에 주역을 담당했고 그중 CEO 행장만 20년을 기록했다.
그때까지 은행거래에 익숙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거래관행에 물든 비즈니스맨들에게 뱅킹(은행거래)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지도적인 역할도 했다. 은행생활 통산 43년의 경력을 끝으로 지난 2002년 은퇴한 그는 현재 웨스체스터 카운티 스카스데일에서 가족과 함께 골프와 수영으로 건강을 다지며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그의 미국 입국은 연수, 유학, 지점 설립 등 모두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번째는 1966년 상업은행 외국영업부 행원으로 미국 연수차 입국한 것으로 그는 7개월간 뉴욕의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 뱅크(현 체이스 뱅크)에서 간부급에게 실시하는 이그재큐티브 트레이닝 프로그램과 온더 잡(OTJ) 트레이닝을 마치고 귀국해 국제부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 정식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의 두번째 미국 입국은 대학시절부터 꾸어오던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었다. 첫번 입국 때 부인(전몽은, 정신과 의사)의 취업준비(ECFMG)를 해놨기 때문에 두번째 입국에는 부인을 동반했다. 상업은행에는 휴직계를 냈고 NYU에서 MBA 코스(경영학 석사과정)를 택했다. 서울상대에서 배운 것 갖고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만치 어려웠던 코스를 밟느라 힘겨웠던 그에게 사공일 교수는 때로 격려가 되었다. 사공교수는 때마침 남가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NYU에 부교수르 부임해 매니지리얼 이코노믹스라는 상급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우상영이 도서관에서 머리를 싸매고 있을때 다가와 “선배님 고생하시는군요”라며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던 실력파 교수였다.
우상영이 MBA 코스를 밟을 때 부인은 맨하탄 15가 3애비뉴에 있는 뉴욕 인포말 병원에 인턴으로 근무했다. 이대 의대에서 이미 밟았던 인턴을 인정받지 못해 다시 시작하면서 연봉 4,500 달러를 받고 있었다. 병원 아파트가 제공됐으므로 부부는 기초생활은 해결 할 수 있었지만 하루 걸러 전화로 불러내는 이머전시 콜에 밤잠을 설치며 고생하는 날이 많았다. 비싼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뉴팩처러스 하노버 트러스트 은행에 들어가 신용장 업무를 보며 야간대학에 다니다보니 코스를 마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72년 대망의 MBA 학위를 받고 귀국해 상업은행에 복귀해보니 뉴욕지점 설치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이던 시기로 시중은행들에게도 외환업무 취급 인가를 내주기 시작하던 때였다. 을종에서 갑종은행으로 승격된 상업은행이 외환은행 출신 김봉은 행장을 맞아 해외로 눈을 돌리며 런던과 뉴욕지점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미국계 은행 경험에 MBA 학위를 가진 우상영이 적임자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세번째 미국행은 이때 이루어졌다. 75년 지점 설립 기초조사 임무를 띠고 뉴욕에 내린 것이었다. 뉴욕주 은행국 라이슨즈 담당 가건이라는 사람이 좀 까다롭기는 했지만 설립 역사가 100년에 가까운 은행의 지점 설치는 비교적 순조로왔다. 우상영의 노력으로 한국계 시중은행으로선 처음으로 한국상업은행 뉴욕지점 인가가 나와 75년 6월 외환은행 뉴욕지점이 임대해 사용하던 다운타운 140 브로드웨이 빌딩에 입주하면서 영업을 개시했다. 2년 후 한일은행, 조흥은행이 뉴욕지점을 설치했고 다음해에는 서울신탁은행, 제일은행도 진출해 한국계 은행들의 춘추전국 시대가 전개됐다. 그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한국은행(1953년), 외환은행(67년), 한국산업은행(69년)등 국책은행들도 활동하고 있었다.
조용춘 지점장과 함께 상업은행 뉴욕지점 차장으로 8년간 근무한 우상영은 1983년 현지법인 행장으로 임명되면서 다시 리테일 뱅크 설립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때 워싱턴의 연방은행 헤드오피스가 당시 금융스캔들에 휘말린 명성사건을 문제삼았으나 이때도 장구한 은행의 역사가 참고되어 무사히 통과되었다. 또 한가지 문제는 맨하탄 32가 브로드웨이 코너 건물에 입주할 때 건물 외벽에 내리닫이로 걸게 된 간판이었다. 건물주가 ‘노’라고 하자 리스 자체를 취소하겠다고 나서 어렵사리 허가를 받아낸 것이 오늘날 상업은행의 후신으로 ‘우리아메리카 뱅크’라고 길게 내리닫이로 걸리게 된 간판이다. 32가 한인상가 입구에 상징처럼 되어버린 이 간판에 대해 우상영은 “한인들의 프라이드를 위해 싸운 결과였다”고 회상했다.
그와같은 은행 경력을 인정받아 그는 1986년 뉴욕한인경제인협회원들이 주주로 설립한 브로드웨이 내셔널 뱅크(BNB)의 초대 행장에 추대되면서 정든 상업은행을 떠나게 되었다. 1959년 서울상대를 졸업하면서 입행한 상업은행에서 고스란히 청춘을 보낸 27년 세월이었다. 사실상 그는 ‘상업은행 맨’으로서의 프라이드를 지금도 갖고 있다.
뉴욕에 현존하는 최초의 동포은행 BNB에서 그는 보람을 갖고 한인사회에 뭔가 기여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기초를 닦는데 성공했다. 이사장은 정삼찬이 맡았고 김희동이 여신담당 부행장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7년간의 BNB 행장을 마치고 그는 창설 당시 정토마스 신부의 당부로 참여했던 코리안 아메리칸 캐톨릭 크레딧 유니온(연방 신용조합) 조합장으로 2년간 몸담았다. 이어 98년에 창설된 리버티 뱅크의 초대 행장으로 역할을 맡다가 2002년 임기를 마치고 은퇴의 길에 접어들었다. 실로 기나긴 43년간의 은행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은퇴 후에도 동생의 무역회사를 돕는 등 놀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얼마전 은퇴한 부인과 함께 3녀(선형, 지형, 숙형), 1남(잔 우, 하버드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의 자녀들을 이 땅에서 훌륭하게 키워낸 보람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은행 창설 때마다 도움을 주셨던 분들과 특히 고객이 되어주신 많은 분들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전했다.
▲ 1984년1월 맨하탄 32가 B’way 코너에 개점한 한국상업은행 현지법인 간판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우측부터 우상영 행장, 본부에서 출장 나온 박경휘 외국부장, 임창무 뉴욕지점장 겸 현지법인 회장.
조종무<국사편찬위 해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