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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명시감상
거풍
김병호
회갑을 넘긴 윤년의 생신에
어머니는 길지 않은 하루 해 안에서
당신 수의를 준비하셨다
당신이 이 별로 자리를 옮기던
그날의 하늘빛과 구름, 바람의 방향과 햇살의 농도
그리고 당신을 처음 맞았던 뒤안 살구나무의 체온을 천천히 짚으며
어머니는, 윤달은 왠지 덤인 것 같다 하셨다
너무 촘촘하지도 성기지도 않은 삼베에
어머니는 치자로 물을 들여
실매듭도 짓지 않고 주머니도 만들지 않고
날개옷 한 벌을 지으셨다
그리고 매년 칠월 칠석이 되면
자개농 깊숙이 넣어둔 오동나무 함의
수의를 꺼내 말랑한 그늘에서 거풍시키신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다른 날보다 더 오래
공들여 뒤안의 장독들을 닦고
그런 날이면 햇살은 다른 날보다 더 오래
머뭇거리며 어머니의 등을 닦는다
----김병호,[거풍]({애지}, 2007년 겨울호) 전문
그 옛날 ‘마조 화상’은 문병을 온 원주가 “요사이 화상의 건강은 어떠하신지요”라고 묻자, “일면불 월면불一面佛 月面佛”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월면이라는 부처님은 그 수명이 하루낮과 하루밤이고, 일면이라는 부처님은 그 수명이 족히 8천 1백세나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일면불 월면불’이라는 마조 화상의 대답은 “걱정하지 마라.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다”(조오현 역해, {벽암록}, 불교시대사)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롭다면 그 어떠한 일에도 자유롭지 못한 것이 없고, 더 더군다나 이 세상의 부귀영화 때문에, 더 이상의 비굴한 아첨과 온갖 권모술수를 쓸 필요조차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나의 {행복의 깊이} 제1권 제3장, [하강의 깊이]에서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 바가 있다.
나는 ‘우리 인간들이 살아있는 한 죽음이란 없고 죽음이 찾아오면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명제를 나의 철학적 명제, 즉, ‘우리 인간들은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라고 바꾸어 놓고자 한다. 왜냐하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적 명제는 애써 죽음과의 연관성을 부정한 말에 지나지 않지만, 나의 철학적 명제는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없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죽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은 이 세상의 삶에 대한 옹호이며, 삶의 완성으로써의 예술적인 죽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태란 무엇인가? 그것은 더없이 지루한 것, 어떠한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허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존재의 근거가 텅 빈 ‘無’라는 것, 그리고 인생의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것을 말한다.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 그것은 死後에나 제대로 평가를 받게 되는 그의 예술적인 죽음과 그 사상(예술)을 토대로 하여, 언제나 늘 푸르고 새롭게 자라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말한다. 우리가 우리들의 인생을 한 편의 예술 작품으로 이해를 하게 되면, 예수의 부활처럼 어리석고 우매하기 짝이 없는 모조품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번 살고, 두 번 죽고, 그리고, 또다시 영원히 살아가겠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예술의 무대에서 그 아름다운 퇴장을 모르는 삼류 배우의 그것에 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라는 낙천주의의 죽음을 배우게 된다면, 우리 인간들의 질병인 삶의 공포와 죽음의 공포가 하나의 이적처럼, 그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권태롭지 않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허무하지 않다’라는 말을 다른 말로 설명해 본다면,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기쁘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행복하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목표가 있는 삶은 행복한 삶이고, 그것은 성공과 실패를 초월해 있다. 우리들의 인생은 회의되거나 부정되기 이전에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신체의 소멸을 뜻하고, 이 세상의 삶의 종말을 뜻한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너희들의 삶을 살고, 너희들의 죽음을 죽으라고 가르쳐 주고 싶다.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 그 예술적인 죽음을 너희들은 죽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김병호 시인은 1971년 광주에서 태어났고,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달 안을 걷다}가 있으며, 현재 협성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거풍]은 회갑을 넘긴 어머니가 이승의 삶을 마감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의 경건함과 그 엄숙함을 노래하고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생물학적으로 신체의소멸을 뜻하고, 이 세상의 삶의 종말을 뜻한다. 하지만 죽음은 그처럼 단순하지만은 않은 데, 왜냐하면 죽음이란 삶의 완성이며, 또다른 생(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고, 삶은 죽음의 완성이다. 따라서 죽음으로써 이 세상의 삶을 완성한 자는 윤회사상에 따라서 또다른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죽어도 즐겁고 기쁜 것이고, 내일 죽어도 즐겁고 기쁜 것이다. 죽음은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의 이사감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벌벌벌, 떨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거꾸로, 우리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을 환송해주고 있듯이, 이 세상에서의 떠나감을 더없이 즐겁고 기쁘게 환송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죽음으로써 삶을 완성하고 삶으로써 죽음을 완성하는 자가 그 대단원의 막을 즐겁고 기쁘게 받아 들이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이 세상의 삶을 완성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죽음을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그처럼 서럽고 슬프게 울 수가 있겠는가? 김병호 시인의 [거풍]은 생사를 떠난 경지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죽음맞이의 노래’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경건함과 엄숙함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면서도, 그 내면에는 고대 오후의 행복같은 즐거움과 기쁨이 넘쳐나고 있는 시가 바로 이 [거풍]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김병호 시인은 “회갑을 넘긴 윤년의 생신에/ 어머니는 길지 않은 하루 해 안에서/ 당신의 수의를 준비하셨다”라고 노래하고, “당신이 이 별로 자리를 옮기던/ 그날의 하늘빛과 구름, 바람의 방향과 햇살의 농도/ 그리고 당신을 처음 맞았던 뒤안의 살구나무의 체온을 천천히 짚으며/ 어머니는, 윤달은 왠지 덤인 것 같다 하셨다"라고 노래한다. 회갑이란 무엇이고, 윤년이란 무엇이며, 또한, 수의란 무엇이란 말인가? 회갑이란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합쳐서 60갑자가 되므로, 태어난 간지干支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을 뜻하고, ‘축 수연壽宴의 회갑 잔치'를 하는 해를 뜻한다. 윤년이란 양력으로는 4년마다 돌아오는 윤일과 음력으로는 5년에 두 번의 비율로 윤달이 드는 해를 뜻하고, 그 상서로운 해에 조상의 산소를 돌보거나 노부모의 수의와 관을 만들어 놓을 수 있는 해를 뜻한다. 수의란 염할 때 망자의 시체에 입히는 옷을 말하고, 그 수의는 주로 윤달에, 그것도 하루 안에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옷을 말한다. [거풍]의 어머니는 회갑을 갓 넘기신 어머니이며, 윤년의 생신을맞이하여 당신의 수의를 손수 만드시는 어머니이다. 회갑을 갓 넘기신 어머니는 스스로 떠나가야 할 때를 알고 있는 어머니이며, ’축 수연의 회갑 잔치‘를 뒤로 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입고 갈 ”날개옷“을 만드시는 어머니이다. ’축 수연의 회갑 잔치‘가 벌어지면 상서로운 윤년이 춤을 추고, 상서로운 윤년이 춤을 추면, 우화등선의 날개옷이 그 어머니를 하늘 나라로 모셔가고 있는 것이다. 그 어머니는 날개옷을 만드시기 전에, ”당신이 이 별로 자리를 옮기던/ 그날의 하늘빛과 구름, 바람의 방향과 햇살의 농도“를 생각해보고, 또한, 그 어머니는 그 날개옷을 만드시기 전에, ”당신을 처음 맞았던 뒤안의 살구나무의 체온을 천천히 짚으며/ 어머니는, 윤달은 왠지 덤인 것 같다”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다. 이때에 “이 별로 자리를 옮기던”이라는 시구는 전생을 이은 재생의 삶을 뜻하고, ”당신을 처음 맞았던 뒤안의 살구나무“는 친정을 떠나와 최초로 시집왔을 때의 ’살구나무‘를 뜻한다. ”당신이 이 별로 자리를 옮기던/ 그날의 하늘빛과 구름, 바람의 방향과 햇살의 농도“는 힌두교와 불교의 문맥 속에서만 이해되고 있는 데, 왜냐하면 ”당신이 이 별로 자리를 옮기던“이라는 시구는 윤회사상 속에 그 역사 철학적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신을 처음 맞았던 뒤안의 살구나무“는 결혼제도의 전통 속에서만 이해되고 있는 데, 왜냐하면 ”당신을 처음 맞았던 뒤안의 살구나무“는 시댁의 살구나무이기 때문이다. 별에서 또다른 별로의 우주적인 자리옮김은 시공간을 초월했다는 것을 뜻하고, 시집왔을 때의 살구나무와 아직도 살아 있는 살구나무는 시공간 속에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머니는 전생에서 이승으로 이사왔을 때, 즉, 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태어났을 때의 ”하늘빛과 구름, 바람의 방향과 햇살의 농도“를 생각해보신 것이고, 또, 그리고, 당신이 처음으로 시집왔을 때의 살구나무와 지금의 살구나무를 생각해보면서, ”얘야, 윤달은 왠지 덤인 것 같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얘야, 윤달은 왠지 덤인 것 같구나“라는 어머니의 말씀 속에는, ”얘아, 이제는 살만큼 살았구나. 덤으로 사는 인생이 너무너무 기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또한 그만큼 부끄럽구나“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달같은 인생, 덤같은 인생은 즐겁고 기쁜 인생이면서도, 그러나 그 무임승차의 죄과 때문에, 또한 그만큼 부끄러운 인생이기도 한 것이다.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이라는 말도 있고,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이라는 말도 있다. 육십은 그 모든 말들을 다 들어줄 수 있는 달관의 나이이며, 칠십은 그 어느 것을 해도 모자라거나 넘쳐남이 없는 나이이다. 그런데도 김병호 시인의 어머니는 육십을 덤같은 인생으로 규정하고, 그 행복감에 젖어서, “너무 촘촘하지도 성기지도 않은 삼베에/ 어머니는 치자로 물을 들여/ 실매듭도 짓지 않고 주머니도 만들지 않고/ 날개옷 한 벌을” 지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의란 망자의 시체에 입히는 옷을 말하고, 주로 윤년이 되는 윤달에 짓는 옷을 말한다. 수의의 종류로는 적삼과 바지와 속바지와 저고리와 허리띠 등이 있으며, 반드시 하루 안에 만들어야 하고, 그 옷감으로는 비단과 명주와 삼베 등을 사용한다. 그 어머니는 당신의 날개옷감으로 “너무 촘촘하지도 성기지도 않은 삼베”를 선택하신 것이고, 그 옷감에다가 치자나무의 열매로 물을 들이신 것이다. 치자나무는 상록활엽의 관목이며, 그 열매는 황갈색을 띠고 있어서, 천연의 색소(황색)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실매듭도 짓지 않고”는 매듭이 없는 맑고 깨끗하고 영원한 삶을 말하고, “주머니도 만들지 않고”는 모든 것을 다 놓아두고 가는 무소유의 떠나감을 뜻하고, 그리고, 또한, “날개옷 한 벌”은 이 세상의 삶과 유한한 존재의 한계를 떠나서, 모든 것이 가능하고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하늘나라(천국)’의 삶을 뜻한다. [거풍]의 어머니는 예의범절에 그 흠결이 없는 어머니이며, 살아야 할 때와 죽어가야 할 때를 알고 있는 고귀하고 우아한 성품의 어머니이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태어났을 때에도 기뻤고, 아들과 딸을 낳고 ‘축 수연의 잔치상’을 받았을 때에도 기뻤고, 윤년의 윤달을 맞이하여, 당신의 날개옷 한 벌을 만들 때에도 기뻤다. 언제, 어느 때나 졸졸졸, 넘쳐 흐르는 샘물처럼 늘 행복했었고, 이 세상과 타인들을 끊임없이 비방하고 헐뜯기보다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수의를 만드는 마음은 떠날 때를 아는 마음이며, 수의를 만드는 마음은 더 이상의 원망이나 후회가 없는 마음이다. 수의를 바라보는 마음도 모든 욕망에서 벗어난 행복한 마음이며, 그 수의를 거풍시키는 마음도 아름답고 행복한 삶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다. 꿀처럼 달콤한 행복과 이 세상의 삶에 대한 감사한 마음은 그 무소유의 기쁨을 향유하면서, “그리고 매년 칠월 칠석이 되면/ 자개농 깊숙이 넣어둔 오동나무 함의/ 수의를 꺼내 말랑한 그늘에서 거풍”시키게 되는 것이다. ‘칠월칠석’이란 무엇이고, ‘오동나무’란 무엇이며, 또한, ‘거풍擧風’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칠월칠석이란 명절 중의 하나이며, 견우와 직녀가 1년에 단 한 번 만날 수 있는 날을 말한다. 목동인 견우와 옥황상제의 손녀인 직녀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었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들의 임무를 소홀하게 한 댓가로 견우성과 직녀성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1년에 단 한 번, 그것도 칠월칠석날에만 만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견우성과 직녀성 사이에는 거대한 은하수가 있어서, 그들이 만날 수가 없게 되자, 수많은 까마귀와 까치들이 머리를 맞대어 ‘오작교’라는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오동나무란 대한민국의 특산종으로 평안남도와 경기도 이남의 따뜻한 곳에서 자생하고 있는 나무이며, 15년내지 20년 정도만 자라나게 되어도 그 목재로 유용하게 사용할 수가 있게 된다. 오동나무는 목질이 부드럽고 습기나 불에 강하며, 바로 그 때문에 수많은 가구와 악기와 관 등을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거풍이란 책이나 옷같은 물건들을 꺼내어 바람을 쏘이는 것을 말하고, 이 거풍에 의하여 그 물건들이 썩어가거나 곰팡이가 피는 것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머니는 매년 칠월칠석날이면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이, “자개농 깊숙이 넣어둔 오동나무 함의/ 수의를 꺼내 말랑한 그늘에서 거풍”시키게 되는 것이다. 매년 칠월칠석날 그 수의를 거풍시킨다는 것은 아마도 이미 하늘나라로 승천하신 남편을 마치, 직녀처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을 것이고, 또한 그 아름다운 명절날에, 앞으로 죽어갈 당신의 모습을 또다시 만나본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칠월칠석날은 경건하고 엄숙한 날이며, 고대의 오후같이 행복한 날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다른 날보다 더 오래
공들여 뒤안의 장독들을 닦고
그런 날이면 햇살은 다른 날보다 더 오래
머뭇거리며 어머니의 등을 닦는다
김병호 시인의 [거풍]은 생사를 떠난 경지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죽음맞이의 노래’이며, 다른 한편, 그 ‘죽음맞이의 노래’를 통하여 아름답고 행복한 삶, 즉, ‘예술적인 삶’을 완성해가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회갑을 넘긴 윤년의 생신날에, 당신이 손수 수의를 만드시던 어머니, 그 수의를 치자로 물들이며 실매듭도 짓지 않고 주머니도 만들지 않으시던 어머니, 이 지구라는 별에서 처음으로 태어났을 때와 회갑을 갓 넘긴 현실을 생각해보고, 윤달은 왠지 덤인 것 같다고 말씀하시던 어머니, 그리고 매년 칠월칠석날이면 당신의 날개옷을 거풍시키며, 견우와 직녀를 생각해보시던 어머니----. 죽음은 삶의 완성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엄숙한 것이며, 또한 죽음은 삶의 완성이기 때문에, 고대 오후의 행복같이 즐거움과 기쁨이 넘쳐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죽음을 생각하면서 “다른 날보다 더 오래/ 공들여 뒤안의 장독을” 닦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그 아름다운 예술적인 삶을 완성해가는 한 여인을 바라보면서, 그 따뜻한 햇살마저도 “다른 날보다 더 오래/ 머뭇거리며 그 어머니의 등을” 닦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에너지 보존법칙에 의하면 무無(없는 것)에서 유有(있는 것)가 생겨날 수도 없고, 유가 무로 소멸되어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에너지는 그 형태만 바뀔 뿐 그 총량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죽는다면, 당신의 뼈와 살과 피와 머리카락마저도 4원소, 즉, ‘물, 불, 바람, 흙’으로 분해되어, 또다른 생명들의 모태가 되어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의 육체에 의해서 수많은 나무와 풀들이 생겨날 수도 있고, 당신의 육체에 의해서 수많은 개미와 구더기들도 생겨날 수도 있다. 당신의 육체에 의해서 수많은 가스가 생겨날 수도 있고, 당신의 육체에 의해서 맑은 샘물이 더욱 더 풍부한 영양만점의 샘물이 되어갈 수도 있다. 이 에너지 보존법칙은 윤회사상의 토대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들의 죽음은 최후의 종착역이 아니라, 또다른 탄생의 시작인 것이다. 죽음이란 또다른 별로 이사가는 것이며, 우리는 그 죽음을 위하여 아름다운 날개옷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니체는 그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 윤회사상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가 있다.
모든 것이 가고 모든 것이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회전한다. 모든 것이 죽고 모든 것이 새로 꽃피어난다. 존재의 해(年)는 영원히 계속된다.
모든 것이 부서져버리고 모든 것이 새로이 짜맞춰진다. 동일한 존재의 집이 영원히 세워진다. 모든 것이 헤어지고 모든 것이 다시 만나 인사한다. 존재의 환環은 영원히 자신에게 충실하다.
어느 찰나에나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의 공은 굴러간다. 중심은 곳곳에 있다. 영원의 오솔길은 곡선이다.
이 세상의 삶 중에서, 오오 시인이여, 죽음보다 더 즐겁고 행복한 것은 없다. 죽음이야말로 모든 슬픔과 고통과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이며, 그러한 죽음으로 인하여 인생 자체가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완성되고, 영원불멸의 삶이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오오, 시인이여, 너무나도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 앞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시인이여! 나는 당신처럼 살아가는 사람을 낙천주의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우리는 죽어갈 수가 있어서 기쁘고 또다시 태어날 수가 있어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