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화가 강원석을 처음 만난 것은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였다. 사람의 겉모습은 그가 살아온 흔적이다. 강원석 작가의 중성적인 용모와 광기어린 강렬한 눈빛에는 예술혼이 가득했다. 짧은 대화 속에서 그가 추구하는 예술론은 나와 일치했다. 얼마 후 강작가의 작업실에 들러 그가 완성한 작품들과 하나하나 조우하며 밤을 지새웠고, 오로지 작품 감상에 몰입했다. 그 작품들은 오감을 뒤흔들기에(shake) 충분했다. 내 머릿속에 유성처럼 쏟아지는 수많은 시들 가운데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Wisława Szymborska의 시가 그의 그림과 일치했다.
작은 별 아래에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우연이여, 너를 필연이라 부른 것을 용서해다오.
필연이여, 내가 결국 잘못 생각한 것이라면 사과하노라.
행운이여, 내가 너를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화내지 말라.
고인들이여, 나의 기억이 차츰 희미해지는 것에 짜증내지 마시길.
시간이여, 매 순간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친 이 세상의 많은 것들에 대해 용서해다오.지난 사랑이여, 가장 최근의 사랑을 첫사랑으로 여기는 것을 용서해다오.
먼 나라의 전쟁들이여, 집에 꽃을 사 들고 들어가는 나를 용서하라.
벌어진 상처여, 손가락을 쑤셔서 고통을 확인하는 나를 용서하라.
절망의 구렁에서 울부짖는 이들이여, 여유롭게 미뉴에트 음반을 감상하고 있는 나를 용서해다오.
Under One Small Star
Wisława Szymborska
My apologies to chance for calling it necessity.
My apologies to necessity if I'm mistaken, after all.
Please, don't be angry, happiness, that I take you as my due.
May my dead be patient with the way my memories fade.
My apologies to time for all the world I overlook each second.
My apologies to past loves for thinking that the latest is the first.
Forgive me, distant wars, for bringing flowers home.
Forgive me, open wounds, for pricking my finger.
I apologize for my record of minuets to those who cry from the depths.
강원석의 그림을 한 마디로 표현 하면 해체-분열-융합이다. 구상은 정해진 목표를 찾고 비구상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조형의 균형을 찾는 게 아닐까. 비구상 작품은 작가의 철학과 맑은 영혼, 탁월한 데생 실력이 없이는 지루하고 천박해지기 쉽다. 강원석 작가는 "익숙한 것은 소통되고 표현이 된다."고 하며 조형의 틀을 깨면 공감이 형성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가 가식적인 터치가 아닌 살아있는 느낌의 터치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순차적인 계열색보다는 극적인 대비를 이룰 수 있는 검정색과 흰색, 삼원색으로 포인트를 잡는다. 극과 극은 어울림이고 하모니다. 어울림은 곧 소통이다. 예술은 소통과 관계이며 소통과 관계가 제외된 예술은 독단에 불과하다. 점과 선은 원에 도달하기 위해 존재한다. 강원석 작가는 형상의 의도를 가지고 작업을 하지만 감정에 함몰되지 않는다. 붓의 터치가 세심한 완급조절이 필요한 것은 지나쳐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되기 때문이다. 과거의 작업이 각진 면의 작업이었다면 이번 출시된 작품들 중에는 입체를 꿈꾸는 원의 형태가 유난히 많다. 점이 선을 넘어 원에 이르는 차원에 도달하기 위해 진화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그 변화의 흐름은 매끄럽고 연속성을 유지한다. 그의 작업이 군더더기를 떨치고 함축적인 조형미를 나타내는 것은 작가의 사고가 급격히 바뀌지 않고 도도한 일관성을 갖기 때문이다.
비구상은 상상을 전제로 하기에 상상에서 답을 찾을 수 없을 때는 허무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강 작가의 그림은 벗겨지는 상상(revealing imagination)이기에 가히 역동적이라 할 수 있다. 사물에서 벗어나 인간을 주제로 하여 인간만이 교감할 수 있는 에로틱의 정수를 그는 과감히 노출했다. 서양에서는 색을 단순히 빛의 굴절로 보지만 동양에서는 색을 우주로 해석하고 그 안에 만물을 담고 있다. 화가 강원석이 오방색을 통해 표현한 여체는 에로틱하지만 자극적이지 않다. 미에 대한 찬사가 그의 손끝에서 그렇게 독특하게 표현되어 나온다는 사실이 신비롭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인간이 물질문명에 영혼을 팔고 점점 좀비가 되어가는 이때에 그의 작품을 대하는 이마다 감각적 세포가 부활하고 왕성한 생명력을 되찾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