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구요. 우리들은 유치원에 모여 살아요. 새벽유치원, 새벽유치원, 착하고 귀여운 아이들의 꽃동산.”
# 새벽유치원
아마도 교육기관에서 배운 첫 노래일것이다. 한없이 맑고 순수하기만 했던 그 시절, 내 나이 7살, 친구들과 아침마다 유치원에 모여 하루를 시작하기 전 매일같이 부르던 그 노래. 할머니손 붙들고 길을 걷다보면 넓다란 마당 넓은 집이 하나 나온다. 동네에서 보기 드문 2층집, 마당에 들어서면 한켠에는 구름사다리, 미끄럼틀, 뺑뺑이… 새벽유치원이다.
지금같이 어린이 놀이 시설이 잘 되어 있는 시대에 ‘그게 뭐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우리의 놀이터는 철탑이었다. 그 옆에 연신 외치는 ‘뻥이요…’소리와 함께 ‘펑’하고 터지는 튀밥 소리에 놀라고, 마을 소독한다고 동네 돌던 소독약 차를 쫓아다니던 그 시절, 그리고 헛 구역질. 누가 빨리 철탑을 한바퀴 도는지 시합하다 보면, 때로는 철 구조물에서 떨어져 손바닥 까이고, 무릎 멍들고, 그 위험 천만한 우리들의 놀이터. 그 시절 알록달록한 색과 아이들을 위한 울타리가 쳐진 유일한 공간, 새벽유치원이란 매일 우리가 부르던 노래와 같이 아이들의 꽃동산이었다.
마당에 들어서면 조잘조잘 친구들의 반가운 소리가 들린다. 이어 보이는 삼삼오오 모여 앉아 모래놀이하는 친구들, 한켠에선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대며 뜀박질하는 아이들, 저기 이미 정원초과된 뺑뺑이에는 계속 아이들이 붙고 있고, 구름사다리에는 위로, 아래로 아이들이 어찌나 달려 있는지, 미끄럼틀은 말할것도 없다. 그래도 여기는 산업화의 시대, 아이들을 미쳐 챙기지 못하는 시대에서도 새벽유치원은 우리를 꽃이라 불러주는 우리들의 세상이다.
# 내가 살던 도봉구
도봉구는 도봉산에서 유래된 지명으로 1973년에 행정구역으로 처음 이름이 만들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 양주목에 속해 있던 지역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노원과 함께 노해면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가 해방을 맞으며 서울의 성북구에 속하게 된 곳, 바로 이 곳 도봉구이다.
어떤이들은 도봉구가 너무 멀다 하여 시골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다. 도봉구는 서울의 동북쪽 맨 끝에 위치해 있다. 왼쪽으로는 북한산과 도봉산이 우뚝 서 있고, 오른쪽으로는 중랑천이 흘러 자연스레 경계를 짓고 있다.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모습, 서울이 도시팽창을 막기위해 만든 그린밸트와 인접한 지역이니 마치 시골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곳 도봉구는 전혀 시골 스럽지 않은 동네였다. 중랑천을 따라 1960년 전후로 세워진 많은 공장들. 대상그룹에서 만든 미원공장도,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 공장도 모두 이곳 중랑천변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산업화의 시대 얼마나 많은 이주자들이 이곳에 왔겠는가? 80년대 도봉구의 인구가 88만, 한때는 서울시의 인구 10/1이 이 곳에 살았다고 한다.
# 1980년 어느날
1980년 11월,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가족의 구성원이 바뀐 것이다.
“핵구야, 니 동생 생겨서 좋나?”
어른들이 내 기분을 묻는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새로운 식구가 들어온다는 것, 이미 내게는 한명의 동생이 있었다. 물론 동생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아플때 서로 걱정해 주고, 때로 동네 친구들과 시비가 붙으면 항상 내편이 되어주고, 그가 바로 동생이다.
하지만 때로는 내 기분과 상관없이 따라다니는 동생이 귀찮다. 어른들에게 받은 과자선물세트며, 용돈을 나눠야 한다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동생을 내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돌봐야 하는 것, 책임을 진다는 것이 여간 부담이 아니다. 새로운 동생이 태어나서 좋냐는 어른들의 질문은 나에게 이 양가감정이 생기는 묘한 경험을 하게 한다.
내 이름을 항상 이상하게 부르는 이분들, 이제는 그 말이 낯설지가 않다. 하도 들어서 였을까? 아니면 내 이름을 이상하게 부르는 이들이 많아서 였을까? 골목을 가운데 두고 양옆의 집들이 7가구 늘어서 있는 곳, 이 곳에는 각각 다른 언어들이 존재한다. 각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마을 공동체를 이루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산댁, 전주댁, 안성댁 등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아주머니들. 어머니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노라면 이 여인들이 마치 각 지역을 대표하여 이곳에 온 선수들과 같이 느껴진다.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 이제 이들은 다른 이들과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하기에 지역갈등은 있을 수 없다.
집집마다 돌아가며 반상회를 열게 되면, 동네 꼬마들도 어른들과는 다른 한 집에 모여 모임을 갖는다. 보다 재밌게 놀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어른들이 부여하는 권위때문일까? 자연스레 질서가 잡힌다. 나이 많은 친구들이 동생들을 함께 돌보며 각 자의 부모님이 이름을 호명하기전까지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문다. 이 꼬마들의 공동체에, 새 식구가 들어 오게 된 것이다. 내 막내 동생이.
# 변화하는 도봉구, 또 다른 이주자들의 동네
어느덧 도봉구가 50주년을 맞았다. 도봉문화원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봉옛길 걷기 문화전을 열어 지역주민들을 초대하였다. 사진전도 열었다. 여기에 오니 옛 추억들이 물 밀듯 밀려온다. 아버지의 자전거 뒤에 타고 창동초로 등하교했던 추억들, 처음 다녔던 루터교회, 철탑이 있었던 흔적, 할머니 손 붙들고 새벽유치원을 다녔던 그 길. 아련한 옛 향수.
“은찬아, 여기 아빠가 살던 곳이야!”
“진짜? 아빠 여기가 고향이야?”
“그래, 아빠 형제들도 모두 여기가 고향이야!”
“원영이 삼촌도?”원영이는 1980년에 태어난 막내동생이다.
“그래서 막내삼촌이 이곳으로 이사왔구나!”
“고향이 편한거겠지!”
이 곳도 많이 변했다. 논밭이 있던 자리, 중랑천 건너편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그 곳은 88년에 노원구로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95년에는 강북구가 생겨 도봉구의 일부가 갈라져 나갔다. 그렇게 옛 도봉구는 노도강 3구로 바뀌게 된 것이다.
행정구조가 바뀌며 더 많은 이주자들이 이 곳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이제는 예전의 마을 분위기는 사라졌다. 이주자들이 살던 동네는 점점 더 담벼락이 높아지고, 아파트들이 들어서며 산업화의 종식과 함께 점점 더 배드타운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주자들은 나그네와 같이 잠시 이 곳을 지나갈 뿐이고, 인사도 없이 이사를 오고 가며, 이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살고 있다.
어릴적 새벽유치원의 마당과 골목의 친구들과 같은 나의 작은 세상은 어느덧 도봉구와 노원구로 바뀌었다. 이제 더이상 나는 아이가 아닌 한 사회를 책임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 옛날 산업화의 시대에도 아이들을 위해 꽃동산을 만들어 주었던 어떤 어른들과 같이 이제 이 곳을 찾은 다른 이주자들과 다음 세대를 위해 나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