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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국의문화 원문보기 글쓴이: 코로타코
생명 나무가 성장하며, 열매 맺는 삶
2007-06-10
(갈 5:13-24)
자유는 억압과 구속과는 반대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요 8:32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다시 이 자유로 사랑의 종 노릇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왜 자유를 갖고, 종 노릇을 하라는 것일까요?
이것은 주님의 구속하심 안에서 자유 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죄의 결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셨지만
우리가 그 자유로 말미암아 다시 육신의 욕심을 따라 행함으로 구속되지 말고,
주님의 구속하심 속에서 자유 함을 누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떠나서는 자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그 자유는 저주와 질병의 결박됨과 멸망과 죽음의 구속함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만 존재의 가치를 느끼며,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가하며, 우리의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인이라 여기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종이 되고자 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종의 형상을 입고 순종의 행실로 보이신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14절에 바울이 말하는 바와 같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있다” 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인 율법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사랑의 종이 되어 종 노릇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 노릇은 원래 종이 아니지만 종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책이나 TV를 통해서 서로를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상대방에게 사랑 고백하는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에 포로 된 자입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은 나의 여왕입니다.”
(가히 병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극히 환자들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때는 여기 계신 여성분들도 이러한 고백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듣지 못한 분 계신가요?
예배 끝나고 두 분이 만나십시오.)
사랑을 하게 되면 이렇게 자신을 낮추고, 헌신적이며, 희생적이 됩니다.
그렇기에 사랑한다면서 권위 위에 군림하고 있는 것은 위선적인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리면서 내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종처럼 행동하는 종 노릇의 모습이 없었음을 회개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느 누구와 있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낮추고, 헌신하며, 희생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의 종은 사랑의 종 노릇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유인으로써 이 종 노릇 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주님의 종이라 하면서도 종 노릇은 어렵기만 합니다.
또 영적인 사람도 성령님의 뜻은 알지만 행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자신의 영적 권위만 높일 뿐 사랑을 심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손해인 것 같고, 남들로부터 멸시 당할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기에 사랑을 행해야 하지만 나의 육신은 이것을 실천하기를 꺼려 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바울은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율법이요, 뜻인 사랑을 행할 수 없지만,
성령님의 뜻에 따라 행하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의 육신을 죽이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에서 성령의 사람으로 그리고 성장하며, 열매 맺는 삶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와 생명나무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과실을 아담에게 주었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담은 결국 선악과를 먹게 됩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선악과로 자라게 되었습니다.
이 선악과는 자신이 자유한자라고 생각하였으며,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지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선악을 판단하면서 살았습니다.
서로에 대해서 옳고, 그름에 대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
악의 열매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은 악한 것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선악과가 선악을 분별하기에 하나님의 뜻인 선을 행하기를 원하셔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선악과는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알지만 사실 선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 선악과는 선악을 분별은 하지만 이 분별함으로 자신을 정죄하고,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분별하여 선악과는 악의 열매만 땅에 떨어뜨리면서 또 다른 선악과를 양산해냈고,
악의 열매가 땅에 떨어져 열매가 썩어짐에 따라 악독한 기운이 나무의 몸을 감싸게 되어 자기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 나무를 이 땅에 보냈습니다.
이 생명 나무는 선악과와는 달리 모든 생물에 생명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선악과는 이 생명 나무의 선악을 판단해 보았습니다.
선악과는 생명 나무의 흠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시기와 질투가 생겼습니다.
선악과는 선악의 올바른 분별이 아닌 단지 자신들과 다른 행동과 생명 나무의 생명력으로 많은 식물이 자라 울창한 숲을 이루는 것을 보고 시기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생명나무를 선악과 나무에 엉겅퀴로 묶고, 가시덩굴로 찔렀습니다.
이로 인해 생명 나무는 죽었지만 그 생명력은 영원하였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의 기운은 생명 나무의 진액을 받아 들이는 모든 나무에게 생명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의 가지라 할지라도 그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나무는 생명나무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가지가 생명나무의 생명력을 받고 있지만 근본 뿌리가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이 나무는 생명의 열매를 맺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나무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선악의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 생명나무에 온전히 접목되지 않고, 생명나무의 기운이 흐르지 않는 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 본성들을 꺾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나무의 생명력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생명나무에 온전히 접목된 선악과 가지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 사랑의 열매는 여러 종류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사랑의 열매들은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양보)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인 선악을 아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능력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과분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이 지혜로 말미암아 죽어 간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선악과의 가지로써 악의 열매만을 생산해 냈습니다.
자신의 열매로 자신을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슬퍼했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심령은 곤고해졌습니다.
우리가 선악과에 계속 붙어 있는다면 결국 악의 열매의 악독이 나무를 썩게 만들어 스스로를 죽게 만들 것입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오직 선악과 나무에서 벗어나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지는 나무의 본체를 벗어나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곤고한 선악과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나무 가지를 꺾으시고 접붙이는 방법을 계획하셨습니다.
자신의 가지인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시고 악의 열매를 맺는 선악과 가지를 취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생명나무는 여기저기 꺾이고, 잘라진 흉터들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자신을 자르면서까지 접붙이고자 하는 것은 생명나무는 사랑의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선악과 가지는 더 이상 선악과 나무로 불리지 않습니다.
생명나무로 불립니다.
그리스도의 사람,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면 예전의 세상적인 이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생명나무가 접붙임을 위해 가지를 잘라내었듯이 선악과도 옛 사람의 자신을 잘라내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선악과에서 자신을 쳐서 꺾어야 합니다.
선악과 나무에서 분리됨으로 더 이상 악의 열매를 맺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아픔이 있지만 생명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생명 나무에 접붙임을 해야만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열매 맺기 위해서는 분리되고, 절단되어야 합니다.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선악과 나무의 본체였다면 이로부터 분리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인 주님보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을 잘라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생명의 본체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 세상으로부터 찍히고, 상처를 내면서까지 우리를 생명나무에 접붙여 주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나무의 상처를 바라보고, 그 흘리는 진액을 바라보며, 내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드디어 선악과 가지는 생명나무에 접목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가지는 꽃과 열매를 맺으며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명나무도, 그리스도의 사람도, 성령의 사람도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가지에 꽃을 피울 수도 열매 맺을 수도 없습니다.
나무의 본체에서 보내주는 영양분을 받지 않으면 가지는 말라 죽게 됩니다.
또 예전의 선악과 나무로부터 받았던 진액들을 뽑아내지 않게 되면 생명나무의 영양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욕심과 습관들을 버려야 합니다.
생명나무의 진액과 선악과의 진액은 서로 융합이 되지 않습니다.
선악과 나무에서 잘린 것처럼 예전의 자신의 생명이 되었던 진액들을 쏟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영양분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액들을 뽑아 내면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겠지만
이 진액을 내 보냄과 동시에 생명나무의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질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곧 가지가 생명나무와 하나가 되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몸 속에 피가 전체 몸을 운행하듯이 이 생명나무의 생명력이 가지를 몇 차례 운행할 때 마다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 나는 더 이상 선악과 나뭇가지가 아니야! 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예전과 다른 생명이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 생명이 가지 속에서 움직일 때마다 옛 진액들을 버리며, 점차 생명나무와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 생명력은 성령님이십니다.
선악과 가지가 생명 나무와 하나게 되게 하는 것을 성령님은 도와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연약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롬 8:3절은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가지 않는 다면 우리는 율법으로 완전해지기 위해서 노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지혜는 선악을 분별하는 율법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사람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이 없기에 악의 열매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율법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본문 16절에서 18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사도 바울은 육신의 욕심과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행하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지만 성령님은 하나님 나라의 살아있는 법이며, 진리를 말하는 영이시며, 가르치고,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면 성령님은 끊임없이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도록 가르치십니다.
영이 깨어있는 사람은 성령님의 말씀하심과 인도하심으로 영적인 진리를 더욱 알게 됩니다.
그것을 들음으로 알 수 있으며, 보게 됨으로 알 수 있고,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체험하게 하시며,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으로 성령님은 알게 하시지만 그 뜻에 따라 사람이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거장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종 노릇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이 없는 사람입니다.
영적으로 많은 것을 알고, 분별할지라도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본문 25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성령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무익한 사람입니다.
이 선악과는 아직 자신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기에 생명나무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또 이 사람은 성령의 법을 거스리는 사람입니다.
법은 알지만 행하지 않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요?
아니면 법은 모르지만 사람의 행동이 법이 말하는 것과 같이 행하는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요?
네! 후자의 경우가 좋은 사회 입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반드시 성령의 법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성령의 종 노릇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이제 성령님의 뜻에 따라 행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하나요?
이것은 성령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를 알게 되면 쉽게 해결 됩니다.
성령님의 뜻은 생명나무의 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먼저 꽃을 내고, 그 다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꽃과 열매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과 꽃은 사과를, 배 꽃은 배를, 딸기 꽃은 딸기를 맺습니다.
그러하기에 성령의 열매는 성령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영적인 사람 안에는 많은 음성들이 존재 합니다.
이 음성은 자신에게서 오는 소리와 내가 아닌 존재로부터 오는 소리도 있습니다.
내 자신의 소리는 양심의 소리와 자신의 의지에 대한 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내 자신의 소리가 아닌 것은 성령의 음성과 악한 영의 소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가? 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실 성령님의 음성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양은 그 목자의 음성을 안다 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의 음성은 명확합니다.
직관적으로 이것을 우리는 압니다.
의심스러운 마음이 들면 그것은 성령님의 음성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별을 요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본문 22절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를 생각하면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음성이 이에 비추어 열매를 담고 있는 것인가? 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열매가 성령님의 뜻이기에 우리는 이 열매를 맺기 위해 행해야 합니다.
이 열매들은 사랑 안에 모두 담겨져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 8가지 열매들은 모습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주님의 사랑의 씨앗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씨앗이 열매에 없다면 나의 의지요, 자랑이 되어 내가 영광을 취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의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또한 이 열매들을 나의 열매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파종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이 열매는 관계적인 열매들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나와 주님의 관계에 있어서 열매이며,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열매입니다.
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암술과 수술이 만나야 하는 것처럼 주님과 만나서 열매의 생명의 씨앗을 만들고, 나는 8가지 모양으로 타인에게 제공함으로써 온전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이 열매는 먼저는 내 안에서 맺히고, 그 후 타인에게서 맺힙니다.
이 열매가 맺히는데 있어서 성령님은 씨앗과 열매를 결정하십니다.
성령님은 생명력으로 충만하게 하시며, 주님을 믿는 믿음을 주십니다.
또 성령님은 타인에게 어떠한 형태의 열매로 맺혀서 전달되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뒤로부터 생명나무 가지로 온전히 붙여지도록 하시며, 자라고 성장하게 하며, 열매 맺는 모든 전 과정을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온전히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며,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타인은 8가지 열매 중 한 개 또는 몇 개를 먹습니다.
사실 타인은 열매의 8가지 모양만 보고 먹지만, 중요한 것은 씨앗입니다.
씨앗은 그 사람 안에서 자라기 시작합니다.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고, 점점 자라납니다.
이제 눈이 떠져 선악과 나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도 결국 생명 나무에 접붙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마 7:17-19절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또 막 11:14절에 주님은 베다니에서 시장하여 무화과 나무 열매를 먹기 위해 갔지만
열매가 없음을 보고 저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그렇기에 열매 맺지 않으면 저주를 당하게 되며, 찍힘을 당하고, 불에 태워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의 본체에서 자신의 분신인 가지를 꺾어서 우리를 접붙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접붙인 것을 다시 떼어낼 수 없다고 보십니까?
오히려 꺾인 자리는 더욱 더 잘 떼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먼저는 주님과 나의 관계이지만,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만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성령의 8가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선악과의 본성들을 제하시고, 성령님의 생명력으로 채우며,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우리는 생명나무가 성장하고, 열매 맺는 것에 대하여 말씀 드렸습니다.
선악과 나뭇가지였던 우리를 생명나무에 접붙이기 위해 주님이 꺾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는 아픔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외치시며, 숨을 거두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우리들에게 사랑의 씨앗을 심었기에 우리가 생명나무에 접목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성령님의 임재 안에 항상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여러분이 생명나무에서 성장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뜻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여기 저기에서 생명나무 씨앗들이 자라고, 성장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