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74)
외상 약값
외상 탓 부친상 치른 천석이
우연히 아이를 구하는데…
천석이가 송 의원 대문을 두드리며 통곡했다. “의원님, 한번만 봐주십시오. 동짓달이 가기 전에 외상값을 모두 갚겠습니다.” 손이 터져서 피가 나도록 대문을 두드려도 기척도 없다. “아버지 숨이 넘어가요. 의원님, 우리 아버지 좀 살려주세요. 외상값은 동짓달을 넘기지 않겠습니다.” “컹컹컹” 삽살개만 요란하게 짖고 송 의원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문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깜빡 잠이 들었다. “천석아, 집으로 가자.”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천석이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천석이 아버지와 송 의원은 가까운 이웃으로 어릴 적에는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어른이 되자 송 의원은 제 아버지 가업을 물려받아 의원이 되고 천석이 아버지는 똥지게를 지고 들판으로 가며 두 친구의 거리도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천석이 아버지 지 생원의 장례식 빈소는 미어터졌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지 생원은 착했다.
봄이면 과부 모녀가 농사를 짓는 몇뙈기 밭에 소를 몰고 가서 쟁기질해주고, 장에 가서 동네 어른 만나면 대포 한잔 사드리고, 눈이 오면 동네 골목 다 쓸고, 소달구지 몰고 가며 아이들 가득 태우고…. 빈소엔 문상객들 곡소리가 끊어지질 않았다. 친구였던 송 의원은 끝내 문상을 오지 않았다. 삼일장을 지내고 빈소를 철상하려는데 한사람이 헐레벌떡 들어와 대성통곡을 하고 나서 젊은 시절 함께 보부상을 다닐 때 망자로부터 돈을 빌려 큰 부자가 됐다며 조의금으로 묵직한 돈주머니를 내놓았다.
동네 젊은이들이 동짓달 꽁꽁 언 땅에 밤새도록 불을 피워 광중(관을 넣을 구덩이)을 쉽게 파 무사히 장례를 마쳤다. 깜짝 놀라게 조의금이 많이 들어왔다. 천석이는 치부책을 펼쳐 선친 외상 약값 오백칠십팔냥을 들고 송 의원에게 달려가 모두 갚고 나서 남은 돈은 조의금을 낸 가난한 사람들을 한집 한집 찾아가서 정중하게 돌려줬다. 일상으로 돌아가 거름을 지고 몇뙈기 남은 밭으로 가려 저수지 뚝방 길을 걷는데 자지러진 비명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얼음판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깨진 얼음 사이에 빠진 아이는 머리가 잠겼다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천석이는 재빨리 바소쿠리의 거름을 쏟아 버리고 지게와 바소쿠리를 엎어 슬슬 밀면서 저수지 얼음 속으로 들어갔다.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그 부모가 달려왔다. 천석이가 얼음장에 빠진 녀석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냈다. 그 녀석은 물을 먹고 올챙이 배가 돼 기절했다. 저수지 가에 눕혀놓고 배를 누르자 입으로 물을 토하고 천석이가 그 녀석 입으로 숨을 불어넣자 한참 만에 깨어났다.
부모는 얼음물에 빠져 생쥐 꼴이 된 아들을 안고 집으로 달려가는데 그 애 할아버지는 천석이 두 손을 잡고 꿇어앉았다. 송 의원이다. “자…자자네가 삼대독자 내 손자를 살려냈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꼬.” 천석이는 송 의원 손에 이끌려 그 집 사랑방으로 갔다. 문전옥답 세마지기 땅문서를 다락에서 꺼내어 천석이 조끼 주머니에 찔러줬다. 못 이기는 척 받고서는 어둠이 내리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돈놀이 집으로 갔다.
황 영감이 놀랐다. “이 밤중에 자네가 어쩐 일인가?” 천석이는 송 의원이 준 세마지기 논 문서를 구백냥에 넘기고 무거운 전대를 차고 옥류네 집으로 갔다. 열여섯살 옥류는 천석이 친구 덕구의 약혼녀다. 내년 춘삼월에 혼례 날짜까지 받아놓았는데 삼년째 아파 누워 있는 어머니 외상 약값에 송 의원의 첩실로 팔려 가게 됐다. 옥류의 아버지는 자괴감에 곡기를 끊고 방바닥이 갈라져라 땅을 치고 있었다.
“아버님, 이 돈으로 송 의원 외상값을 갚으세요.” 옥류 아버지는 ‘이게 꿈인가 생신가?’ 자기 볼을 꼬집었다. 천석이는 옥류와 그 아버지를 데리고 주막으로 갔다. 보름째 주막 술독에 빠져 사는 친구 덕구가 정신을 차렸다. 그날 밤 주모가 간단하게 상을 차려 혼례를 당겨 치르고 주막에서 신방을 차렸다. 새신랑 덕구와 장인과 천석이와 주모는 새벽닭이 울도록 술을 마셨다. 송 의원은 대수롭지 않은 고뿔로 드러눕더니 손수 처방한 약 한첩도 다 먹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했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
항상 잘보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늘 좋은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귄선징악 ㅡㅡㅡ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