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4주간 금요일
히브리 13,1-8 마르코 6,14-29
오늘 복음에는 세상의 사람 “헤로데”의 이름이 일곱 번, 하느님의 사람 “요한”의 이름이 일곱 번
거듭됩니다. 이는 마르코 복음사가가 이 두 이름을 일곱 번씩 드러냄으로써 두 삶을 철저히
대조하고 서로 맞서게 하려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가 이 가운데 어떤 삶을 살지를
곱씹어 보라는 것 같습니다. 또 오늘 복음에는 체포, 감옥, 구금, 처형, 죽음, 무덤과 같은 표현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표하듯 등장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
라는 말씀대로 세례자 요한은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 앞서 하느님의 길을 걸어간
선구자였습니다.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중에서부터 성모님의 태중에 계신 예수님을 반기며 기뻐하던
요한은(루카 1,44 참조), 예수님에 앞서 광야에 나가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분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분에 앞서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이사야 예언서 53장 참조)
살아야 할 자신의 운명을 느끼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지만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마르코 1,3)인 요한의
외침과 선구자다운 증언의 삶을 우리 삶에서 재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세례자 요한이 외친 회개의 삶을 기억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죄를 씻고 악습을 끊어 내는 회개의 삶, 헛된 욕망을 정화하는 기도와 절제의 모범을 배울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처럼 진리를 상대화하고 복음의 가치를 희석시키며
세상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이 세상에(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
강론 참조) 대하여 복음의 진리를 담대히 증언하는 그의 용기와 정의를 위한
희생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참된 겸손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늘 좋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고 그분께 희망이 되어 주었을 테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코 1,7)라고 말하며 늘 스스로
낮추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기 위하여 먼저 요한에게서 배웁시다.
그러고 나서 요한의 정신과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걸어 갑시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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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순 바오로 신부
연중 제4주간 금요일
히브리 13,1-8 마르코 6,14-29
구약의 구원 역사를 마무리하며, 신약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인물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자들의 시대는 요한까지다.”
(루카 16,16)라고 확인해 주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바로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헤로데라는 권력자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참수를 당합니다. 이는 구약의 이사야 예언자의 삶과
비슷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는 이사야의 선포를 수용합니다
(마르 1,2-4 참조).
그 옛날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칩니다. 이사야와 세례자 요한은
삶의 마지막 모습도 닮았습니다. 이사야는 므나쎄 임금의 폭정을 거슬러 하느님 말씀을
전하다가 참수를 당하였고,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임금에게 참수를 당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과 외침은 참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세례자 요한이나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목숨을 걸고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선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가 너무나 약한 사람입니다.
공정과 정의를 추구하면서 살아가기에 고려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생계에 대한 걱정, 돌보아야 하는 가족들,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얽히고설켜서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이렇게 약한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예언자적 삶을 살아갈 수 없을지라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예언자적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어떨까요? 그 음성과 그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나를 변화시켜 봅시다.
나만을 위하고 나만을 향하였던 마음을 주님께 돌리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 외치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회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입니다.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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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4주간 금요일
히브리 13,1-8 마르코 6,14-29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해줍니다.
엘리야의 영과 권능을 지닌 세레자 요한은 엘리야가 아합 임금과 이제벨 여왕을 꾸짖었던 것처럼,
헤로데와 헤로디아를 무섭게 꾸짖었습니다.
그들의 결혼이 합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까닭입니다.
사실, 더러운 이들에게 정결함은 오히려 적수가 되고, 타락한 이들에게는 고결함이 오히려
괴로움이 됩니다. 잔인한 이들은 자비를 보면 참지 못하고, 인정 없는 이들은 사랑과 진실을 참지
못하고, 불의한 이들은 정의를 참지 못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곤경에 빠집니다.
오늘 <복음>에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음모를 꾸미며 속임수를 쓰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강직하며, 그 어떤 거짓에도 굴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폭군이지만 무능력한 헤로데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참수당하지만 힘 있는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가 있고, 그의 혀는 잔치에서 맹세하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을 부르고 불의를 가져옵니다.
다른 한편에는 혀가 곧은 요한이 있고, 그의 혀는 감옥에 갇히지만 자신의 죽음을 허용하되
의로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헤로데가 받은 것은 요한의 머리지만 두려움이 되고,
세례자 요한이 받은 것은 쟁반이지만 월계관이 됩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표해 줍니다.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세례자 요한의 목숨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억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마치, 은전 30냥에 팔려버린 예수님의 목숨처럼 말입니다.
헤로디아의 조정을 받은 소녀가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주기를” 요청하듯,
사제들과 유대 원로들의 조정을 받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외치게 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머리가 쟁반에 올려 지듯, 예수님의 온몸이 십자가 위에 올려 질 것입니다.
이처럼, 의인 요한의 죽음은 “야훼의 종”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거짓을 꾸미는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진실된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헤로데가 요한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감옥에 묶어 두어도 외치고,
죽어서 쟁반 위에서도 살아 외칩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박혀서도 있어도 침묵으로 외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우스는 말합니다.
“침묵 안에 완성되어 있는 하느님 사랑의 외침을 들으십시오.”
이제 우리도 진리와 정의를 위해 외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코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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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뼈 속에 새겨져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진실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힘으로 짓눌러 가라앉힐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가로막을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목이 베여도 결코 베어지지 않는 살아있는 말이 되게 하소서
울 줄을 알게 하소서.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