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어항語港 / 김겨리
책 속에는 많은 어류(語類)들이 유영하고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활자들의 지느러미가 퍼덕거려 책 밖으로 물이 튄다 물비린내가 흥건한 대목을 읽다 접어놓은 갈피에 수초들이 무성한 건 슬어 놓은 은유들의 은폐, 모음이 자음을 낳고 자음이 묵음을 낳고 묵음이 촌음을… 낳는다는 구절에 이르러 수많은 나이테로 밑줄을 그어 놓은 책을 읽는 방향은 가로일까 세로일까
책의 두께를 지나면 높이에 다다른다 도입부를 벗어난 전개부는 현재형이라 과거형을 뒤적거리다 미래에 도착하는 일, 흔한 일이다 우수수 출렁거리는 낱말들은 행과 연 구분 없이 엮은 한 두름의 문장, 시제는 없다 있다손 치더라도 수심 수위 수압 중 어떤 게 과거 현재 미래인지 알 수 없다
책의 두께는 수심과 같아 깊이에 따라 어종이 달라지는 법, 오래전 퇴화된 고전의 어종과 진화를 거듭한 신간의 신어종이 도치를 갈마드는데
서표는 부표다 죽방렴 안이 빈 것은 여백의 美라 오히려 갇힌 것은 바깥의 어족(語族), 아가미로 집필된 슬픔을 또박또박 읽는 부레의 복화술을 받아쓰느라 책의 가두리는 모서리가 없다
전생은 나무, 후생은 책인 종이에 글자들이 수북하다 번지수를 잘 못 찾은 주소지로 송고된 문장처럼 어종을 알 수 없는 글꼴로 탈고될 무렵, 손안의 만선 한 척 귀항하는 지금은 독서의 시간
ㅡ웹진 《시산맥》 2024년 봄호
* 김겨리 시인(본명 김학중) 1962년 경기 안성 출생. 홍익대 졸업 2015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분홍잠』 『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 등 2021년 김명배문학상 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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