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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
예슈아께서는 우리가 자유하기 원하신다. 누구의 종도 되길 원치 않으신다. 그렇다면 자유가 무엇인가? 국립국어원 정의에 따르면 ‘자유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인간이 지향해야 할 최상의 가치로 여겨진다’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이다. 예슈아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 자유 때문이다. 어떻게 자유를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인가? 예슈아께서 죄에 종되었던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의의 종으로 살게 하신다(롬6:16). 의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이라면 죄의 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종이다. 즉 의의 종은 하나님의 종이고 죄의 종은 사람의 종인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느냐 아니면 사람의 명령을 따르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린 때로 이렇게 생각한다.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결정해주시지 않으실까? 그냥 "이렇게 해 이것이 내 뜻이야"라고 말해주시면 편할 것을 왜 우리에게 결정하라고 하시는 걸까? '결정 장애'가 있다고 할 만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어쩌면 그래서 사람들은 리더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나대신 선택해줄 사람 나를 이끌어줄 사람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택이라는 숙제를 우리에게 주셨다. '생사화복 중에 생명과 복을 택하여 살라‘(신30:15,16)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택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모두 내어주고 리더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사람들을 조정하고 머리가 되고자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거역했을 때 따라올 정죄와 비난, 외로움 등이 두려워 그들에게 자신의 머리를 내어준다. 그래서 기도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누구도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두어서도 안된다. 가치 판단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신30:15,16)
2 자유의 가치
자유란 너무나도 중요하다. 만약 자유가 없는 아름다운 2층집과 자유가 있는 원룸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우린 주저하지 않고 원룸을 고를 것이다. 만약 사온 아름다운 물건과 내가 직접 만든 물건이 있다면 덜 예뻐도 내가 만든 물건이 더 귀하게 느껴질 것이다. 사람들의 인생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름대로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며 살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만든 그림과 같다. 그것이 심각한 범죄가 아닌 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린 무엇이든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다(롬8:28). 심지어 실패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에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고 실패도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이다. 우리는 자유를 선택한다. 그것이 심지어 죄를 짓는 것일지라도 자유가 없는 순종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억압과 협박에 의한 순종은 진정한 의미의 순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셨지만 그럼에도 순종은 개인의 몫이다. 선택을 억압하고 강제하고 협박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며 인격으로 대하는 것도 아니며 그 사람에게 일하시는 성령도 부인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오래 걸릴 수 있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순종하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런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책을 사주지 말고 고르는 법을 가르쳐라.' 이말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책을 사주는 것은 자신이 이 사람의 머리가 되는 것이고 고르는 법을 가르치는 것은 스스로 삶의 머리가 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냐 독립하게 하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6-28)
3 인생사 새옹지마 (나무위키에서 퍼옴)
탈무드에서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말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기쁜일이 꼭 기쁜 일이 아닐 수 있고 슬픈 일이 꼭 슬픈 일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게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새옹지마'라는 고사성어를 생각나게 한다. 인생의 일은 변방 노인의 말과 같다는 뜻이다. 유래는 전쟁이 자주 일어나던 북쪽 변방에 노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노인이 기르던 말 한 마리가 어느 날에 도망가자 사람들은 "말이 도망가서 어쩝니까? 정말 안되셨습니다." 하고 위로했더니 이 노인은 오히려 "글쎄요, 이 일이 복이 될지 어찌 알겠소?"라며 낙심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도망갔던 말이 많은 야생마들을 이끌고 노인에게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이제 부자가 되셨구려! 축하합니다!"라고 환호했지만, 이 노인은 또 "글쎄요, 이 일이 재앙이 될지도 모르지요."라며 기뻐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그 뒤 노인의 아들이 그 말들 가운데에서 좋은 말 하나를 골라 타고 다녔는데,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크게 다치고 절름발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아드님이 다리를 다쳐서 저 지경이 되었으니 어떡합니까? 정말 안됐습니다." 하고 걱정하며 위로하자 노인은 "글쎄요. 이게 다시 복이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라며 덤덤한 태도를 보였다. 얼마 뒤, 오랑캐들이 쳐들어왔다. 그래서 마을마다 관리들이 찾아와서 남자들을 데려갔고 집집마다 아들, 동생, 오빠들을 전쟁터로 보내느라 울음바다였다. 징집된 남자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냐면 대부분이 전장에서 전사하였고,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 역시 상당수가 장애를 안고 돌아왔다. 이 때문에 마을 내에선 멀쩡한 청년을 찾아보기가 거의 힘들 정도였고, 마을에서는 전사한 군인들의 유족들의 울부짖음과 살아남았어도 장애를 입은 상이군인들의 한숨, 그리고 상이군인들을 걱정하는 가족들의 한숨이 뒤섞였다. 그런데 노인의 아들은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이 오히려 약이 되어서 징집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노인이 왜 그리 모든 일에 덤덤했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4 자유가 토라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정죄와 비난때문이다. 그래서 자유를 지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북한을 보자. 그들이 자유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된다. 자유의 가치는 그와 같다. 자유를 얻기 위해 비난 정죄는 물론이고 죽음을 불사해야할 만큼 귀한 가치이다.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 어찌 토라가 주어질 수 있겠는가! 자유의 가치가 바로 토라의 가치이다. 선악을 말하나 그것에 자유가 없다면 토라가 아니다. 선악을 말하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사랑이고 긍휼이고 우리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다. 북한에 자유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이 종노릇한다. 그러나 남한에는 자유가 없어서 수많은 사람이 동일하게 리더들에게 종노릇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르지 않다. 심지어 북한은 남한 노래나 영화를 봐도 그것을 노동교화형에 처하게 하거나 사형에 처한다. 그러한 정죄가 북한을 공의로운 나라라고 말하는가? 연예인이 불륜을 저질렀다고 공개처형을 당한 일도 있다. 그러한 북한은 공의로운 나라인가? 오직 심하게 도덕을 강조하는 나라인가? 공의를 떠나 그곳에 자유가 없는것 만으로도 북한은 인권이 없는 나라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나라일 뿐이다. 자유의 가치는 우리가 인간이 되게 한다. 그러나 토라를 한다고 말하면서 선택의 자유를 주지 않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이고 심판의 자리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사람을 종으로 삼던 자들은 심지어 토라를 알게 되더라도 여전히 많은 사람을 자신의 종으로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자신의 권위로 사용할 때 사람들은 말씀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자유가 없어서 돌아설 수 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자유가 없는 토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공포정치를 누가 따르겠는가? 물론 선악을 분별해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선악이 아닌 이상 우린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가 있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까지 비난할 권리는 그 누구도 없고 없어야 한다. 심지어 악을 선택한다고 해도 우리는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변함없이 기다려주는 것이 아버지 마음이다.
성령이 우리를 자유케하는 이유가 있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의 정죄와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죄로 인해 끌려다니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은 바람과도 같다. 자연스럽고 바람이 부는 대로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성령의 자유케 하심이고 토라의 자유케 하심이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선택을 없애고 억압하고 강요한다면 우린 성령에서 끊어지고 성령의 호흡도 막힐 것이다. 죽을 거 같은 답답함을 느끼게 할 것이다. 자유가 토라여야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8:32-34)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골2:22)
# 갈라디아서 5: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할례파의 종이 되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 와서 가르치기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로써 큰 말다툼이 일어났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로 인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로 파송되었다. 과연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그러면 할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가?(행15:1-3) 아니다! 구원의 문제는 할례의 여부로 결정되지 않는다. 또한, 당시 할례당은 할례받은 육체만 자랑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갈6:13). 그러나 할례의 목적은 하나님의 명령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생명을 걸고 힘써 지키겠다는 충성을 맹세하는 표증이였다. 그러나 당시 할례당의 가르침은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서도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께 충성하지 않아도 되게 하는 이단적 가르침이었다. 다윗은 구원을 바라며 계명을 지켰다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에 할례당의 교리는 틀렸다(시119:166). 이처럼 계명을 버린 할례당의 가르침은 초대 교회의 큰 골칫거리였고 사도들은 이를 바로 잡으려 했다. 그러므로 만약 당시 할례파를 따른다는 것은 사람의 명령(가르침, 교리, 전통)을 따르는 종이 되는 것이었고 율법을 범하므로 죄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바울은 할례를 거절한 것이 아니다. 할례는 여러가지 면에서 유익이 많다(롬2:25). 그러나 의의 종이 되야 할 예슈아의 제자들이 할례파의 종이 되어 여호와의 율법이 아닌 사람의 교리와 가르침을 따르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을 거절한 것이다. 누구의 명령을 따르느냐 누구의 가치 판단을 따르느냐에 따라 우린 하나님의 종이 되기도 하고 사람의 종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행15:1)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시119:166)
6 생각의 어떠함이 그 사람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그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행동으로 판단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율례와 규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켰기 때문에 유업을 얻었음을 말씀하고 있다(창26:4,5). 그러나 할례파는 유업을 얻기위해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육체의 할례만을 말하고 있다. 사실 온전히 순종한 아브라함과 순종이 없던 할례파의 차이는 이들의 생각에서 비롯된다. 유업을 위해 온전한 순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통해 순종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유업을 위해 할례만 필요하다고 생각한 할례파는 율법을 지킬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사람의 전통이 율법을 폐한다고 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우리의 가치관은 반드시 바르게 세울 필요가 있다. 만약 성경과 다르다면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도 옳은 행실을 가진 신부가 될 수 있다.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갈6:13)
7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
바울은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았든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았든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의무가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주인이나 종이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차이가 없는 것과 동일하다. 이 땅에서 주인일 지라도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며 이 땅에서 종일 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할례는 어떤 면에서는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는 것은 오직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고전7:18,19,22).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전7:18,19,22)
8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할례파에게만 주어진 의무가 아니다. 그런데 바울이 굳이 할례파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들이 율법의 일부인 할례만 행하고 다른 율법은 행하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갈6:13). 모든 율법을 행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인 것이다. 또한 권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지킬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법도이다. 육체에 속한 자들은 법도를 지킬 수도 없다. 마귀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요일3:4,8,9).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3:4,8,9)
9 할례는 율법을 지키겠다는 표증이다
앞에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경고하다가, 갑자기 왜 할례를 받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할례를 전하는 할례당의 가르침 때문이다.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당시 할례에 대한 교리 때문이었다. 할례는 ‘거듭남’을 상징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할례는 아브라함이 99세 때 ‘더욱 행하여 완전하라’라는 명령과 함께 언약에 대한 증표로써 받은 것이다(창17:11). 여호와께서 희생 제물의 피로 언약을 세우신 것처럼,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하여 피의 언약을 맺으셨다. 할례는 사람에게 종 되었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예식이며 표증이다. 그래서 ‘할례받지 않은 자와 부정한 자는 거룩한 성에 들어갈 수 없다’(사52:1) 고 경고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증이기 때문에, 당시 육적이었던 할례당은 마치 이것을 구원의 표증인양 오해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의 준행하는 삶 위에, “더욱 행하여 완전하라”는 명령과 함께 주어진 것이 할례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종의 삶이 없는 할례는, 그 자체가 효력이 없고 무의미하다. 더욱이 이삭부터는 태어나서 8일 만에 할례를 행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다음 세대에게 할례의 의미는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는 표증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이 되겠다는 표증인 것이다. 즉 구원의 표증이 아니라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여호와의 백성이라는 표증이다.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사52:1)
10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가 유익이 없는 이유
바울은 앞서 우리에게 의로와지려는 두 부류의 사람을 말했다. 하나는 율법의 행위만으로 의로와지려는 사람과 믿음(행함이 있는)으로 의로와지려는 사람이다. 만일 율법의 행위만으로 의로워져서 둘째 사망이 없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예슈아의 죽으심과 부활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없이 율법의 행위만으로 의로워질 수 없게 하나님께서 만드셨다. 누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이 살아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의로워질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율법의 행위 만으로 의로워질 수 없게 만드셨고 믿음으로 의로워지게 만드셨기 때문에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할례파의 가르침처럼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할례만으로 구원을 얻는 의로움에 이른다면 예슈아의 죽으심이 필요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파들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받는 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행4:16)
11 할례파는 율법이 아닌 전통을 지켰다
어떤 믿는 바리새인들이 이방인도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많은 토론을 거친 후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라고 책망했다(행15:5,10).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율법이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멍에인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율법을 준행하는 것은 은혜에 반대되는 것인가? 율법을 준행하지 않고 구원받는 게 은혜인가?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모세의 율법이라고 말은 하지만, 사람의 멍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도 매지 못하는 멍에’가 힌트이다. 지나치게 많고 복잡한 전통을 만들어서 누구도 지킬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당시 종교인들이 한 일이었다(마23:4). 그래서 할례당이 지킨 것도 사실은 율법이 아니라 전통이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전통적인 교리를 만들어, 전통을 지키는 것이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들었다(막7:8,9). 기독교도 전통이 많다. 그러나 전통을 지킨다고 생각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율법은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지만 전통은 사람의 종이 되게 한다. (계명을 폐하는 전통을 말한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마23:2~4)
여호와의 명령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며 매우 가까워 입에 있고 마음에 있어 능히 행할 수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상도 능히 맬 수 없었던 멍에는 여호와의 율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통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신30:11,14)
12 할례를 폐하면 선지서를 해석할 수 없다
할례를 강요하지 않은 바울은, 절기도 강요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유월절을 함께 지킬 수 없다고 율법은 분명히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출12:48). 그러므로 바울은 절기도 할례처럼 강요하지 않았고, 믿음이 생기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받지 못하게 금지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선지서를 해석할 수 없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는 이방인 중에 마음이나 육체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한다(겔44:9)고 경고했으며, 예레미야 선지자는 주의 날들이 이르면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이스라엘과 (육체의)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을 심판하신다(렘9:25,26)고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선지자들이 할례와 안식일과 절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에 정통한 바울은 결코 율법을 폐하거나 할례를 폐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할례는 폐할 수 있는 언약도 아니다. 다만 순종이 할례보다 중요하고, 마음의 할례가 육체의 할례보다 중요함을 강조한 것뿐이다(렘4:4). 믿음이 더 중요한가? 행함이 더 중요한가? 사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처럼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물론 믿음이 먼저이고 알이 먼저이다. 그러나 행함이 없고 닭이 되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이 헛될 뿐이다. 우린 온전함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느 것도 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러기 위해 예슈아께서 오시지도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있는 이방인 중에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은 내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겔44: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면 할례 받은 자와 할례 받지 못한 자를 내가 다 벌하리니 곧 애굽과 유다와 에돔과 암몬 자손과 모압과 및 광야에 살면서 살쩍을 깎은 자들에게라 무릇 모든 민족은 할례를 받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느니라 (렘9:25,26)
#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3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믿음 뿐이라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차이가 없이 공평하다. 왜냐하면 할례자를 믿음으로 의롭다하시는 이가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다하시기 때문이다(롬3:30). 또한 이 믿음은 율법을 듣고 행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말한다(롬2:13). 이 믿음은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율법의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마22:40).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믿는 자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행위만으로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한다. 믿음 없이 하는 행함과 사랑없이 하는 행함으로 사람이 온전해질 수 있다면 진리가 아니다. 온전함은 진정한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행할 때 성립해야 한다. 그것이 진리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행하는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율법,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는 율법이 우리를 구원한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롬:3:29,30)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롬2:13)
14 우린 율법의 준행자이다
샤밧을 지키고 절기나 월삭, 음식 규례를 지키는 것은 옳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면서도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이,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율법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들이 있다. 심지어 사람의 의도까지 의심하고 판단하는 자들이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정죄하는(죄인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 있고 싶지 않을 것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어린 아이 신앙에서 예슈아의 장성한 믿음으로 분량으로 자랄 것을 말하고 있다. 즉 연약한 믿음과 장성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강한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연약한 믿음을 판단하고 비방한다면 그는 이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판단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율법이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이 있어나 나라의 미래가 밝은 것처럼 성장하는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미래는 어둡다. 하나님은 오직 한분의 재판관을 세우셨고 모두 준행자이다. 그런데 이웃을 판단하는 그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되묻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이다(약4:11,12).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약4:11,12)
토라를 지키는 것은 옳은 일이며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토라 전체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상 숭배자는 토라를 해도 우상 숭배자가 된다. 오히려 토라를 하면 더 큰 우상 숭배자가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토라의 권위를 자신의 권위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토라를 아느냐 모르느냐 지키느냐 안지키느냐의 문제 이전에 먼저 내 자신 안에 우상 숭배의 문제가 없는지 돌아봐야 한다. 성경은 자신을 높이는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웃을 나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이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등의 모든 계명들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계명이다 (롬13:8~10). 또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벧전4:8). 따라서 율법을 행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아직 어둠에 있는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요일2:9). 즉 율법은 믿음이고 사랑이고 그리고 온전한 빛이다(요일2:7~11).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13:8~10)
15 일에 대한 정의의 문제였다
안식일(샤밧)은 십계명의 4번째에 해당하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다. 그리고 모든 토라는 ‘영혼 구원’과 ‘영혼 사랑’을 위해 주셨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슈아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들은 율법에 수많은 규례들을 더하기도 하고 빼기도 하여 가감된 그들만의 토라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준에 예슈아께서 안식일 계명을 깨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메시아로서 인정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38년 된 병자가 회복되어 기뻐 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현장에서도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샤밧에 자리를 들고 갔다는 이유로 그를 정죄하고 있었다(요5:5-16). 그러나 성경은 ‘일하지 말라’고 하셨지 ‘자리를 들고 가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즉, ‘일에 대한 정의’의 문제였다. 그들은 예슈아께서 율법을 범했다고 생각했지만, 성경은 예슈아께서 율법을 범하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다(요일3:4,5). 일에 대한 정의에 대해 당시 바리새인은 예슈아와 다르게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었고,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슈아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고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너희의 아비는 마귀다”라는 책망을 들었다(요8:44). 즉 아버지의 마음이 없으면 교리에 매여 진정한 토라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토라의 보화를 발견하기 위한, 보는 눈과 듣는 귀와 깨닫는 마음이다. 자기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은 율법에서 금지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대인은 일에 대한 너무 많은 정의로 지금도 무엇이 일이고 무엇이 일이 아닌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샤밧 예배: 토요일 11시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깃발 재작 문의
https://cafe.naver.com/freeflag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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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샬롬 ~^^
@자유하라
네...
평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