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80)
벌교 가서 주먹자랑 하지 마라
깡다구 세기로 소문난 점식이
오랜만에 아버지를 보는데…
벌교엔 깡다구들이 많은데, 점식도 그중 하나다. 덩치가 별로 크지도 않은 깡마른 녀석이 싸움닭처럼 닥치는 대로 붙어보는 것이다. 얼마 전 설을 앞두고 벌교대목장이 벌교천을 따라 질펀하게 이어졌다.
“돈 놓고 돈 먹기. 일년 운세를 여기다 걸어보시오. 세월없이 언제 대박이 터질지 학수고대하지 말고 금시발복, 돈 놓고 돈 먹기.”
야바위꾼 바람잡이들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자 대목장꾼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순식간에 야바위판을 에워싼다.
야바위판 뒤편에 주막집 주모 할매가 퍼질러 앉아 줄담배를 피워댔다.
“점식아, 돈 가진 거 있으면 몽땅 내놓고 가거라.”
“할매, 기둥뿌리를 뽑아 와도 저놈들을 못 이깁니다.”
구경꾼들을 헤집고 야바위꾼들에게 다가간 점식이 야바위판을 발로 차자 덩치가 산만 한 바람잡이 하나가 멱살을 잡아 점식을 들어 올렸다. 대롱대롱 매달린 점식이 패대기쳐질 찰나에 ‘퍽’ 하더니 산 같은 덩치가 사타구니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고 점식은 팔짝 뛰어내렸다. 막 2차 공격을 하려던 참에 ‘크르르킁’ 하며 새하얀 진돗개가 나타나 송곳 같은 이빨을 드러냈다.
“쟤가 그놈이야. 건드려놓으면 땅벌 집 쑤신 거나 마찬가지야.”
바람잡이 한놈이 하염없이 줄담배만 태우는 주모 할매한테 가서 딴 돈을 돌려줬다.
“너거들 순천에서 온 모양인데 야바위판을 순천에서 벌이지 않고 왜 벌교에서 전을 펴는 겨?”
점식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주섬주섬 판을 접은 야바위꾼들은 슬며시 사라졌다.
달포 전 장날, 순천에서 온 건달이 주막집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점식에게 걸려서 서로 멱살을 잡고 다툴 때 어디서 나타난 건지 백구가 순천 건달 등에 올라타 발톱으로 등을 긁어 유혈이 낭자해지자 멱살잡이는 끝나고, 그 소문은 바람을 타고 순천·벌교·구례·여수까지 퍼져 나가 한주먹 한다고 꺼떡거리던 건달이 벌교에 오면 숨죽이고 있다가 조용히 사라져야 했다.
주모 할매는 주막집을 꾸려나가고 점식 어미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선술집을 꾸리며 입에 풀칠하고 산다. 어느 날 점식을 찾아온 한양 신사가 점식 어미한테 인사를 했다.
“저한테 점식을 일이년만 맡겨주시면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어머니가 그 신사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떠나기 전날 밤 보따리를 싸는 점식 옆에 앉아 일렀다.
“이건 대갱이포여. 한양서는 구경도 못할 것이니께. 하는 일이 이건 아니다 싶을 땐 얼른 발을 빼고 나와야 혀. 알간?”
진눈깨비가 쏟아지던 밤, 불과 한달 만에 점식은 집으로 돌아왔다.
“핫핫하하하. 역시 우리 아들이야. 그 사람 관상이 악의 굴레를 못 벗어났어.”
점식은 한양에서 유흥가 자리다툼에 밀리지 않기 위해 때로는 상대방의 배를 찔러야 했다.
안방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누구요?”
“너거 아부지 아이가. 역마살이 끼어서 오만군데 벨벨 돌아다니다가 심신이 지쳤는지 9년 만에 돌아왔네.”
안방으로 뛰어 들어간 점식이 술상 앞에 앉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리고 막걸리 한잔을 따라드렸다.
“카, 맛있다. 늙으니 아들이 좋네. 카….”
아버지는 아직도 배 한척을 가지고 있었다. 이튿날 아버지와 부두로 나가 배에 탄 뒤 묵직한 닻을 올리자 바다로 미끄러졌다.
“네가 순천 왈패들을 한놈씩 한놈씩 작살을 내놨다며?”
“행패 부리는 놈들 손 좀 봐줬어요.”
“와하하 잘했다, 잘했어. 그 소식을 신안 건달한테 들었네. 그날 기분이 뿅 나가버려 2차까지 내가 샀네. 푸하하.”
부자는 9년 만에 만나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며 눈물이 쏙 빠지도록 껄껄 웃다가 서로를 쳐다보며 부자의 정을 나눴다.
아버지는 자신의 손때가 구석구석 묻지 않은 곳이 없는 배를 이제 아들에게 넘겨줄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배 만들 땐 삼나무가 최고여. 유연하고 물에 강해.”
점식은 아버지의 설명을 한치도 흘려듣지 않고 머리에 차곡차곡 쌓았다.
“봄이나 가을에 배 밑바닥에 송진을 끓여서 발라주는 게 최고….”
잠깐 사이에 부자는 바다로 나가 대구 두마리를 낚아 올려 집으로 돌아갔다. 흐뭇한 가슴이 부풀어 올라 하늘로 떠오를 것 같았다.
여름 천상의 발레
첫댓글 오늘도 잘보고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