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82)
관상
귀인 만나 아내·딸 구한 김한구
세월 흘러 ‘귀상’ 소리 듣는데…
나이 지긋한 귀인이 고향인 충남 서천 한산에 볼일이 생겨 한양에서 잰걸음으로 가다가 예산 인근 낮은 고개를 지날 때였다. 한겨울답지 않게 봄 날씨처럼 포근하고 햇살 또한 눈부셔 귀인의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웬걸 언제 그랬냐는 듯 북풍한설이 귀를 도려내고 먹구름이 하늘을 담더니 눈발마저 굵어져 금방 발이 파묻혔다. 그 험한 눈보라 속에 어렴풋이 사람 형체가 어른거려 귀인이 다가갔다. 꾀죄죄한 선비가 서서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고 그 옆엔 부인인 듯한 여인이 주저앉았는데 “응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귀인이 물었다.
“어찌 된 일이오?”
몰골이 말이 아닌 젊은 선비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집사람이 산기가 있어 처가로 데려다주는 길에 이 눈밭에서 그만….”
귀인은 얼른 자신의 털 마고자를 벗어 산모와 아기를 덮어주었다.
“빨리 일어서시오. 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산모를 남편과 귀인이 양쪽에서 부축하고 고개를 내려갔다. 멀리 고개 아래 불빛이 보였다. 가다가 미끄러지다가 헤치고 헤쳐 인가에 다다랐다. 귀인은 듬뿍 돈을 줘 방 한칸을 뜨뜻하게 군불로 달구고 주인 여자는 이웃집에서 미역을 가져와 국을 끓였다.
이튿날 귀인이 떠나려 하자 젊은 선비가 매달렸다.
“어디 사는 누구이신지 알려주지 않으면 못 가십니다.”
귀인이 마지못해 “정동 사는 이관섭이라 하오”라고 한마디 던지고는 고향 한산으로 향했다.
십수년 세월이 흘렀다. 가난에 찌든 선비 김한구는 고향 면천을 등지고 한양으로 갔다. 한양에는 먼 친척 아저씨 김흥경이 높은 관직에 있었다. 김흥경이 안타깝게 여겨 가끔 쌀가마를 보내줘 조카 김한구는 목숨을 이어갔다.
김흥경의 사랑방엔 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어질 날이 없었다. 김한구도 이따금 김흥경의 사랑방 구석에 껴 앉아 한끼를 때우고 하루를 무료하지 않게 보내곤 했다.
고관대작들이 모이는 김흥경의 사랑방에서 꾀죄죄한 김한구는 갖은 수모를 당하지만 체면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동구 밖 묵집에 가서 묵을 시켜 오고 문밖 요강에 오줌이 차면 뒷간 옆 거름더미에 쏟고 사동이 해야 할 일도 서슴지 않고 했다.
김흥경의 생일날을 김한구가 놓칠 리 없다. 꽁보리 나물밥으로 나온 아침은 거르고 김흥경 집 사랑방 구석에 가장 먼저 자리 잡았다. 하나둘 문객이 들어와 방이 꽉 찼다. 대청에서 선물을 받느라 분주하던 김흥경이 사랑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서방 처사님을 소개 올리겠습니다. 주역에 통달해 귀신도 피해 다니는 처사님께서 주안상이 들어올 때까지 심심파적(심심풀이)으로 여러분들의 관상을 봐드리겠습니다.”
서방 처사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문 쪽에 앉은 문객부터 관상을 보기 시작했다. 돌아 돌아 윗목 구석에 쪼그려 앉은 김한구 앞에 오더니 서방 처사는 두 손을 모으고 뚫어져라 내려보다가 두말없이 넙죽 큰절을 세번 하고 꿇어앉아 “대인께서 오늘 당장 금시발복(어떤 일을 한 뒤에 이내 복이 들어와 부귀를 누림)하시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껄껄껄 사랑방에 웃음이 터졌다. 모든 시선이 김한구의 찌그러진 작은 갓, 새까만 두루마기 동정에 쏠렸다.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김한구는 슬며시 일어나 대문을 열고 나왔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동구 밖 주막집에 들러 외상술값을 독촉하는 주모의 잔소리를 들으며 벌컥벌컥 대포 한잔을 마셨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미친놈의 처사 때문에 잔치상도 못 받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며 초가삼간에 들어서자 아내가 “여보 우리 설중매(雪中梅)가 왕비로 간택됐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넘어졌던 김한구는 놀라서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16년 전 예산 고갯길 눈밭에서 태어났다고 설중매로 부르던 그 딸이다. 중전인 정성왕후가 서거하자 나이가 예순다섯인 영조가 국모를 간택하게 됐는데 빼어난 미모에 영특한 열여섯살 설중매를 고른 것이다.
김한구가 임금의 장인인 부원군이 되자 그를 깔보던 문객들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꿈에서도 잊지 않던 정동의 이관섭을 찾았다. 이관섭은 호조판서가 됐다가 후일 좌의정이 됐다.
♠️고민 ✔️해우소♠️
첫댓글 감동입니다
재밋게 잘보고갑니다 ~~
오늘도 즐감 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견디면서 모진목숨 살아 남아야 합니다
끝까지 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