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날, 주님의 날
이사야 25:6-9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부활주일이다. 세계교회의 전통에 따라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선창-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후창-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이유는 그 사건이 바로 우리 자신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바로 나에게 ‘구원의 날’이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달력에서 가장 오래된 절기이다. 모든 교회는 주님의 부활 위에 세워진 것이다. 부활 없이 존재하는 역사적 교회는 없다.
오늘은 색동교회 열네 번째 생일이다. 색동교회는 십자가의 믿음을 넘어 부활의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모든 교회의 생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부활이란 놀라운 신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새 삶이 시작하는 첫날을 주님의 날(主日)로 기념하도록 하였다. 부활주일은 모든 날 중의 날이요, 모든 날 중에서 심장과 같은 날이다.
일 년 중 52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끊임없이 축하하고, 증거 하는 작은 부활절이다. 이날에 부활의 증언을 반복해서 듣고, 떡과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는 기회로 삼아왔다.
이제 여러분이 부활의 증인이다. 우리 색동교회가 부활의 증인이다. “주님은 정말 살아나셨습니다!”라는 고백과 환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늘 되풀이되고, 견고하게 되기를 바란다.
1)
성서일과에 따르면 오늘 구약 본문은 이사야의 말씀이다. 주님의 부활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이사야 66장 중 묵시록의 한 부분인데, 장차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종말 잔치에서 우리를 먹이시고(6), 죽음의 그림자를 제하여 주시고(7), 사망에서 영원히 이기시고(8), 기다림에 대해 응답하신다(9).’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이날은 열국과 만민에 대한 심판의 날이지만, 놀랍게도 구원의 날로 묘사되고 있다. 최후의 날, 큰 잔치가 벌어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6).
이사야의 예언은 구원의 날을 큰 잔치의 모습으로 비유한다. 이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위해, 즉 다시 출생한 사람을 위해 생일잔치를 벌이신다. 하나님이 차리신 음식은 기름진 것과 맑은 포도주이다.
우리는 내 삶에서 축하하고, 기념할 것이 많이 있음을 감사한다. 축하선물을 나누고, 즐거운 기억을 회상하며, 더 행복한 많은 날들을 기대한다. 눈물이 없고, 슬픔도 없으며, 아픔도, 두려움도, 괴로움도 없는 삶, 그런 자유로움으로 가득한 잔치 같은 날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단언하지만 그런 날들로만 계속되는 인생은 없다. 누구에게나 아픔과 죽음은 예고된 일이다. 다만 조금 더 유예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따라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은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날은 나와 무관하지 않다. 누구나 구원을 바라는 이유는 바로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
2)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니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8).
인간이 정복하지 못한 영역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자신할 수 없다. 죽음은 얼마나 비참하고, 비극적인가? 구원의 날은 죽음의 권세를 멸하신 날이다.
죽음이 있는 한 사람에게 두려움과 아픔과 슬픔은 언제나 존재한다. 죽음은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이다. 사실 죽음에 대한 공포, 불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선지자 이사야는 말한다. 이제 드디어 죽음의 영역이 극복될 것이다. 죽음의 슬픔이 폐지될 것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날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7).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8).
죽음이 사라졌으니 슬픔을 가린 애도의 가리개와 덮개를 벗을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수치의 가리개를 제하시고, 눈물의 덮개를 치우신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옛 낡은 옷은 벗어야 하듯이, 하나님은 근심의 얼굴 대신 기쁨의 얼굴로 바꾸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언의 성취였다. 하나님께서 사망을 폐지하신 약속의 성취였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1-22).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부활절 예배는 구원받은 자들의 즐거운 연극으로 시작된다. 그 연극은 웃음과 춤, 자유로움으로 가득하다. 부활절 찬송가들은 죽음을 비웃고, 지옥을 비아냥거리며, 죄로 말미암은 불안과 두려움의 사탄을 내쫓음으로써 삶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다.
부활을 믿고 축하하는 종교가 바로 그리스도교이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핵심이다.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죠르드 베르나노스)에서 블랑쉬 수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의 엄청난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안심하고 고통 할 수 있다.”
그렇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누구도 예외없이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빈 무덤은 죽음에 대해 안심하게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부활 신앙은 얼마나 큰 믿음인가? 창세기 1장의 창조신앙도 믿기 어렵지만, 고린도전서 15장 부활 신앙은 믿음을 지키기가 더욱 더 어렵다.
마틴 루터는 이렇게 경고한다.
“확신이 없는 믿음은 흔들리는 그릇과 같아서 원하는 것을 담기가 힘들 뿐 아니라 그릇 안의 것까지 쏟아버릴 위험이 있다.”
3)
지난 성금요일에 군포지방 대야미교회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김명환 목사를 만나, 갈치저수지에 있는 털레기식당에서 점심을 대접하였다. 10개월 전에 그곳 담임목사인 우명순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김 목사가 그곳을 이어받았다. 처음에는 후임이 되는 일을 거절하였다. 그때 왜 그랬냐고 물으니 대야미교회에 가면 죽을 것 같았다고 실토하였다.
대야미교회는 예배당 건물은 멀쩡하게 존재했으나 문 닫은 교회와 다름없었다. 게다가 담임목사까지 세상을 떠났으니 희망이 없었다. 죽은 교회였다. 우 목사님은 혼자 살면서 평생 대야미교회를 일구었다. 주변이 개발되면서 큰 재산이 되었다. 내가 감리사로 구역회를 할 때 “송 목사님의 감리사 임기 중에 모든 재산을 재단에 편입하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럼에도 젊은 목사가 볼 때 교회 재산이고 뭐고, 아예 재생이 불가능한 교회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런데 결국 김 목사만한 사람이 없다고 판단해 그를 대야미교회로 보냈다.
엊그제 방문하니 교회가 다시 살아났다. 열 명도 채 안 되는 교인들의 헌신으로 교회 건물이 재생하였다. 예배당 앞에 빨간 우체통을 두었고, 오종종한 화분이 아름답다. 예배당은 다시 와보고 싶은 곳이 될 만큼 빛나게 리모델링을 하였다.
루돌프 불트만은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교회의 근거는 부활이며 ‘사도들의 증거’의 내용도 그리스도의 부활이었다.
교회가 교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기 때문이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불가능하고, 이 땅에 교회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색동교회는 14년 전, 이러한 믿음과 부활의 증거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이다. 우리는 주일마다 모여 ‘주님의 날’을 지킨다. 여러분이 일요일을 ‘주님의 날’로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이날이 나를 구원하신 구원의 날임을 믿기 때문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종말 잔치를 이렇게 전한다.
“이는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9).
하나님만이 하신다. 여기에서 ‘구원하다’라는 동사의 주어는 내가 아니다. 그 누구도 주어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원하신다.
색동교회의 생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날을 일러주는 희망의 날이 되기를 바란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꿈을 우리의 꿈으로 간직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바라기는 우리 색동교회가 하나님의 꿈을 우리 자신의 꿈으로 간직하기를 바란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한 삶, 영원한 삶으로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