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덕 安商悳 (1880 ~ 1950)】 「서울 만세시위 조선독립선언서 배포」
1880년 7월 22일 경성부(京城府) 금정(錦町;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919년 12월 당시 경성부 팔판동(八判洞; 현 종로구 팔판동)에 거주하였으며, 토지가옥매매중개업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 소식과 함께 국내에서도 독립선언을 준비하는 분위가가 고양되었다. 또한 1919년 2월 8일 도쿄(東京)의 한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서 발표 소식이 서울에 전해졌다. 신문 기사 등을 통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에 따른 파리강화회의와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들었던 서울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한편 독립선언서 선언과 만세시위를 주도한 민족대표들과 학생대표들은 인편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국적으로 배포함으로써,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추진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명이었던 천도교인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2,000여 장을 전달받았다. 동시에 이종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에 배포하도록 지시받았다. 2월 28일 강원도 평강군(平康郡) 동변리에 위치한 천도교 교회당으로 가서 천도교구장 이태윤(李泰潤)을 비롯하여 김찬호(金讃鎬)·이태윤(李泰潤)·김기찬(金基燦)·이면하(李冕河)·김남석(金男錫)을 만난 자리에서 독립선언서 700여 장을 나누어 주며 평강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 함경도 영흥군(永興郡)에 가서 영흥군 천도교교구장인 김용환(金龍換)을 만난 자리에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영흥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3월 1일에는 함경도 홍원군(洪原郡)에 이르러서 강인택을 만나서 독립선언서를 교부하면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그날 오후 1시경 강인택은 홍원군 천도교구장 박주섭(朴周涉)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 3월 변호사 홍진(洪震)은 전국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통일적으로 전개되지 않음을 우려하고, 국민대회를 개최해서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평소 생각을 같이했던 이규갑(李奎甲)·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과 함께 비밀리에 국민대회 개최를 준비하였다.
1919년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이른바 ‘한성정부’를 수립, 선포하기 위한 13도대표자대회가 열렸다. 이 날 대회에 참석하여 홍진·이규갑·한남수 등과 함께 한성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3일 상하이(上海)에서 독립운동을 위해서 서울로 온 홍진의(洪鎭儀)를 이규갑에게 소개시켜 주면서 독립운동을 함께 계획하도록 하였다. 홍진과 이규갑은 한남수를 상하이로 파견해서 그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현황과 임시정부 수립 여부를 확인하도록 하였다. 4월 21일 한남수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을 전보로 서울로 알렸으나, 홍진과 이규갑은 한남수의 전보를 받기 전에 상하이로 출국하였다.
같은 해 4월 19일 경 경성부 통의동(通義洞)의 김회수(金晦秀)의 방에서 김사국·김유인(金裕寅)·현석칠(玄錫七)·민강(閔橿)과 함께 만났다. 그 자리에서 천도교 대표자라면서 600원을 모금해 올 것을 요청받았지만, 600원을 마련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를 거절하였다. 4월 23일 서울 동대문·서대문·종로 등지에서 일반인 300명과 함께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의 수립을 선포했다가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1919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풀려난 후 주로 천도교 선교에 전념하며 생을 보냈다. 1939년부터 일제의 전쟁 수행을 협력하는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이사, 국민총력천도교연맹 평의원,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가한 이력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