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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02주일설교 너희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
(요한복음16:12-15)
본문: 요한복음16:12-15
제목: 너희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
오늘은 요한복음16:12-15의 말씀을 가지고
“너희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
2011년 가을에 크로아티아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기억에 남는 그림 하나는
두브로브니크라는 성의 성벽 위를 걸을 때 본 것입니다.
아드리아해 바다에는 배가 한 척 떠 있었고
그 배를 중심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수영을 하며 즐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운 풍경이었습니다.
넓고 푸른 바다에서 자유롭게 노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친구들과 필리핀에 가서
친구 덕에 그렇게 놀아보기는 했지만
전 여전히 두렵고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왜 저는 바다에서 그렇게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까?
저는 수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배워보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배우려다가 중이염으로 고막 재생 수술을 받으며
수영을 배우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깊은 물에 들어가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통이며
그러다 보니 전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수영장이나 바다가 놀이터가 되고
즐거움을 발산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감당할 수 있으면
그것들을 통해서 자유롭게 되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답고 좋고 값비싼 것이라도
그것을 내가 감당할 수 없으면
그것은 족쇄가 되고 고통이 되고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복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왜 이런 차이가 있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말씀을 감당 할 수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씀을 감당 할 수 있습니까?
1.나의 노력으로
말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12절)
과거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많은 설교가들이 있습니다.
사람을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깊은 바다로 데려가기도 하고
높은 산 속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설교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찾아가기도 하고
요즘은 방송이나 유투브를 통해서 듣고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설교가라고 해도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당대 군중들은
그런 예수님께 말씀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열두 제자는 3년 반이나 함께 지내며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떤 관계인지를
모두 다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
놀라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훌륭한 선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같은 훌륭한 설교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본체이신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셨으니 그 말씀이 얼마나 바르고
놀랍고 진리인 말씀을 전했겠습니까?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을 가지고 잘 살았습니까?
그 말씀을 잘 감당하였습니까?
우리가 본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왜 가장 훌륭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왜 그렇게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까?
아니 하나님의 아들의 설교를 듣고
배반하고 저주하며 돈 받고 팔기까지 하였습니다.
더 나가 그 아들을 죽이려고 작정하였고
결국 죽이는데까지 갔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요한복음에서도 어떻습니까?
제자라고 하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하였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평안하였습니까?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안심하라고 하는데도 안심하지 못했으며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다.
종종 설교를 오래 한 목사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설교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말씀을 수십 년들은 성도들이
변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모태신앙으로 아니면 항존직으로
수십 년을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참으로 변하지 않은 모습을 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저나 제 설교를 34년이나 들은
여러분이나 어떤 모습입니까?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까?
아니면 실망스러운 모습은 아닙니까?
왜 그럴까요?
왜 말씀을 그렇게 들었는데 변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 말씀을 읽고 공부했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12절)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감당하지 못한단 말입니다.
언제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때를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님이 오시기 전을 말합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역사해야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감당하여 변하여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없이 많은 말씀을 들어도
수없이 많은 말씀을 읽고 공부해도
성령님이 오셔서 인도하시지 않는 한
우리는 감당할 수 없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없습니다.
2.성령이 오시면
모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13절)
예수님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는 자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그들은 하나같이 위선적이거나 권력지향적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 가운데 살지 못했으며
불의와 악행을 일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렇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많이 먹는다고 좋은 것일까요?
고기를 하루에 몇십kg 먹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산해진미를 쌓아놓고 많이 먹는 것이 좋은 것일까요?
음식을 잘 먹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을 잘 소화해야
그 음식이 내몸에 살이 되고 피가 되어야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먹고 잘 먹어도
그것을 소화 시키지 못하고 체하거나
배탈이 나게 되면 그것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심하게는 우리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성경을 많이 읽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깨어 있는 때는 설교를 늘 듣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성경학교에 가서 성경을 배우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읽고 듣고 배운 말씀이
우리 속에서 소화가 되어서
내 삶에 뼈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면 문제가 되어
교만하게 되고 남을 비판하게 되고
남을 정죄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진리의 말씀이 진리로 가지 않고
불의로 가는 결과를 내게 됩니다.
하지만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우리가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우리를 모두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리의 성령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진리의 성령님은 스스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진리의 성령님은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들은 것만 그대로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누구에게 들은 것입니까?
자신을 보내신 예수님과 하나님께 들은 것만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진리이기에
그 예수님께 들은 것을 말씀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설교자들도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오직 주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만 전해야 합니다.
훌륭한 설교자는 말을 잘하는 자가 아닙니다.
놀라운 어떤 것을 전하는 자도 아닙니다.
새로운 특별한 것을 전하는 자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전하는 자
예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는 대로
전하는 자가 참되고 바른 설교자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13절 후 반절은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장래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님이 우리에게 장래의 일을 알려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 장래의 일이 무엇일까요?
성령님이 점쟁이란 말일까요?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어느 대학에 가야 할지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지
무슨 사업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시는 분이란 말일까요?
종종 우리는 성령님께 그러한 것을 구합니다.
내일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묻고 싶어 하고 그것에 대해서 궁금하여 합니다.
성령님께서 그러한 것을 알려주시는 분입니까?
종종 성령님을 그런 무당 취급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을 지나서 장래를 살아갑니다.
우리 모두는 틀림없이 장래를 살아야 합니다.
장래를 살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장래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그 장래를 알려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장래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마10:19-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태복음10:19-2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교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살면 그들 앞에 닥칠 장래의 일을
그런 고통스러운 상황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한 때 무엇을 말할까?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 속에 계시지는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법정에 섰던 베드로가 어떻게 행했으며
바울이 어떻게 행했습니까?
그 자리에서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 자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리로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들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들의 장래 일을 인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법정에 섰던 베드로와
바울도 인도해 주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장래의 일에 인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나가 살 세상은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닥칠 두려움과 난감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올 일들을,
일어날 일들을, 살면서 경험할 일들을
다 감당케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것에 넘어지고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가 만나는 장래의 일을 감당케 해 주십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분은 다 아시기에
어떠한 일이라도 다 감당할 수 있는 분이기에
우리를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해수욕장을 가서 튜브가 있으면
여유롭게 보낼 수 있습니다.
더 나가 그 튜브를 잡아 줄 수 있는
든든한 이가 있다면 우리는 아무 염려 없이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며 파도를 즐길 수 있습니다.
더 나가 좋은 배를 탈 수 있다면
좋은 선장이 끄는 배를 탈 수 있다면
파도를 다 감당할 수 있는 배를 탈 수 있다면
우리가 만나는 바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성령님이 오시면 그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너희에게 알려주신다고 하십니다.
알려준다는 말은 그냥 알려주고
우리 혼자 감당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장래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을
알려주시고 인도해 주셔서
감당케 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좋고 감사한 일입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일생일대에 최고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를 믿는 일이
얼마나 수지맞는 일일지 참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3.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 성령님(14-15절)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에게
유익하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무엇을 위해
이런 일을 행하시는 분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설교자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여러분에게
성경 말씀을 준비해서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해진 말씀을 통해서 오직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제가 설교자로서 제 지식을 드러내거나
제가 영광을 받게 된다면
저는 하나님 앞에 설교자로
빵점짜리 설교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12:21-23에서 보면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나옵니다.
왕복을 입고 연설할 때 백성들이
“이것이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고 환호하자,
그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이 훔쳐 취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주의 사자가 치니 벌레에게 먹혀
허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취하는 자의 끝은 이처럼 파멸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님은 결코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자신을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만을 나타내셨습니다.
성령님은 ‘은혜의 통로’ 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신 모든 풍성함이 예수님께 있고,
성령님은 그 예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흘려보내시는 거룩한 통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은혜의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통로인 우리는 그저 은혜를 통과시키는 자일 뿐입니다.
통로를 지나간 물줄기가 아무리 맑고 풍성할지라도,
통로 자체가 자랑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어떤 놀라운 일을 이루었을지라도,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기에
헛된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을 높이셨고,
성령님은 예수님을 높이셨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서로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겸손한 관계’를
우리도 닮아가야 합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성령을 보내어
오늘을 감당하게 하신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율리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세상의 거친 바다와
삶의 무게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너희가 감당할 수 있으리라!” 하시며
진리의 성령님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수영을 못 하는 사람에게 깊은 바다는 공포와 족쇄이지만,
든든한 조끼와 훌륭한 스승이 함께하면
바다는 놀이터가 됩니다.
내 힘과 결단으로는
단 한 구절의 말씀도 살아낼 수 없지만,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 성령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능히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
오늘 들은 말씀을 붙잡고
다음 3가지 영적 행동 지침을
꼭 삶에서 실천해 보시길 바랍니다.
1. [1대지 적용] 내 의지를 내려놓고
'무능함을 정직하게 인정'하십시오.
수십 년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어도
내 노력과 결단만으로는 삶이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 반 동안
주님의 설교를 직접 듣고도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내가 애쓰면 된다"는 영적 교만을 내려놓고,
깊은 물 앞에서 수영할 수 없는 나의 한계를
주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며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2. [2대지 적용] 말씀을 내 지식으로 삼지 말고
'성령으로 소화'하십시오.
아무리 좋은 음식도 소화되지 않으면 배탈이 나듯,
말씀을 내 지식과 의의 도구로 삼으면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교만에 빠집니다.
말씀을 읽고 들을 때마다 "성령님, 이 말씀이
내 삶의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십시오.
성령께서 장래 일과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실 때,
세상의 어떤 시련과 억울한 법정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능히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3. [3대지 적용] 자기 자랑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십시오.
헤롯처럼 백성들의 환호에 취해
자기 영광을 훔치는 자는 파멸에 이릅니다.
성령님이 오직 예수의 영광만을 나타내셨듯,
우리가 삶에서 말씀의 무게를 감당해 냈을 때
결코 내 자랑을 늘어놓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고,
성령께서 견디게 하셨으며,
성령께서 이루셨습니다" 고백하며
오직 주님의 영광만을 나타내는
거룩한 통로로 살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힘으로 버티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 손을 꼭 잡고 계신 진리의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어떤 환란과 삶의 파도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안에 계신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주님, 성령 안에서 내가 능히 감당하겠습니다!" 선포하며
승리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