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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시기조선족중견작가ㅡ김재국작품대계
한국은 없다(연재61) ㅡ 법치국에서도 빽은 있어야 돼
나에게는 이제 겨우 소학교(초등학교) 2학년에 나는 딸아이가 하나 있다. 이름은 김경이(金京怡), 나이는 아홉살, 얼굴도 이쁘고 공부도 잘해서 지금 반급에서 62명 학생을 지휘하는 중대장직을 맡고 있다. 63명이나 되는 학생중에서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그 애 하나뿐, 그래서 우리는 그 애가 중대장직을 맡은 일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고 공부를 잘항 삼호학생(三好学生: 덕,지,체가 우수한 학생을 삼호학생이라고 함)으로 뽑힌 일도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타민족속에서 어울려 살다보면 자기 아이가 남보다 못하는것만큼 가슴아픈 일이 없고 남보다 잘하는것만큼 어깨 올라가는 일도 없다. 아이 하나를 놓고 가정의 영예, 민족의 영예까지 생각하는것은 편협한 민족애일수도 있으나 정작 타민족속에서 아이를 키워보면 누구나 없이 그런 편협심을 갖지 않을수 없는것이 우리 인지상정이다.
1994년 3월에 내가 한국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그 애는 겨우 유치원생이였다. 철없는 아이라고 생각해서 나는 한국으로 류학오면서 그 애에게 이제 한국으로 갔다가 금방 돌아온다는 말로 나의 팔을 잡고 놓지 않는 그 애를 구슬렸다. 그 애는 내가 전에 북경이나 심양 같은 곳으로 출장갔을 때처럼 며칠만 있다가 금방 돌아오는줄로 알고 떠나는 나에게 ≪아빠, 빨리 와야 돼요. ≫하는 말을 천진하게 했다.
금방 돌아온다 하고 떠난것이 나는 일년 반이 되도록 그 애의 앞에 나타나 주지 못했다. 그동안 여름방학도 있었고 겨울방학도 있었지만 나는 여러가지 여건때문에 번마다 집으로 가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게다가 돈이 아까와 집에다가 전화마저도 자주 할수 없었다. 간혹 집과 전화통화를 할 때면 아이는 언제나와 같이 ≪아빠, 언제 돌아와요?≫ 물음만을 반복했고 금방 간다고 구슬리면 ≪거짓말!≫이라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내가 일년 반동안이나 전화에 대고 금방 돌아간다고 햇으니 아무리 철없는 아이일지라도 무슨 믿음이 가겠는가. 그애가 소학교에 입학하던 날에는 나 홀로 기숙사에 앉아 그 애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경이야, 이 아빠를 보더라도 제발 공부 잘해달라!≫고 소리없이 빌기도 했다.
내가 사회주의권에서 온 류학생들이 가족을 초청할수 있다는 법무부의 소식을 접한것은 지난해 말 (1995년)이였다. 물론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특대희소식이였다. 나는 금년 여름방학에 아이와 안해를 한국으로 초청하는것으로 그동안 내가 아이와 안해에게 진 빚을 얼마간 갚으려고 생각했다. 금년 3월, 개학이 갓 시작되자 나는 집사람과 아이를 초청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나의 곁에 있는 중국친구들은 어느덧 가족을 다 초청해왔고 그중 한 친구는 아이의 초청장까지 했다고 나에게 자랑했다. 나는 부랴부랴 한국 법무부내에 소속되여있는 외국인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달려갔다. 성남에서 2번 뻐스를 타고 판교로, 판교에서 직행뻐스를 타고 양천구청까지 가는데 꼬박 두시간 반이 걸렸지만 조금도 힘든줄을 몰랐다. 목동에 위치해있는 외국인출입국관리사무소는 한국의 법을 집행하는 부문답게 위엄이 있었다.
2층에 있는 사무소로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기 차례를 초조히 기다리고있었다. 겨우 나의 차례를 기다려서 공손히 허리굽혀 인사하고 사무상앞에 앉으니 직원이 직업적인 어조로 ≪무슨 일로 왔는가?≫고 물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류학생인데 일년 반동안 집으로 가지 못해서 돌아오는 방학기간에 집사람과 아이를 초청하려고 그런다고 나는 이실직고했다.
≪안돼요!≫
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담당직원이 말을 자르면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처음에는 누구에게나 안된다는 말부터 한다는것을 귀띔해준 친구가 있었기에 나는 그의 말에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달래듯 침착하게 담당직원을 구슬렸다. 다른 중국류학생들도 집사람을 초청해왔더라는 말까지 하면서 한국의 법을 꼭 지키겠으니 제발 초청을 허락해달라고 아첨까지 하면서 말해서야 직원은 ≪그럼 해준다?≫하면서 선심을 쓰는체 했다. 마치 우리 집사람의 초청을 허락하고 안하고가 법에 의해 결정되는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 씀씀이에 의해 결정되기라도 하는듯한 태도였다. 초청에 관계되는 안해의 서류를 그에게 넘기고나서 나는 아이초청을 다시 제기했다. 또 안된다는 식이였다가 정 그렇다면 나와 아이사이가 부녀(父女)간이라는 공증을 중국에서 해오라고 햇다. 됐다싶어서 나는 몇번이나 그에게 경례를 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서울에서의 가족과의 상봉! 이는 내가 꿈에서마저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였다. 허나 막상 그것이 현실로 다가오고있다고 생각하니 막 소리라도 지르면서 대한민국에 감사를 드리고싶었다. 그날 저녁 나는 집에다 전화르 걸고 아이에게 ≪금년 여름방학에 너와 너의 엄마를 서울로 초청하니 그동안 꼭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몇번이나 반복했다. 서울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아이가 알리 없다. 허나 아빠가 있는 곳이기때문에 서울은 그 애에게 있어서 하냥 그리웁고 가보고싶은 곳이다.
≪엄마, 우리 여름방학에 서울에 가서 아빠를 만난대!≫
전화에서 아이가 너무 좋아 제 엄마에게 웨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내가 부탁했던 공증서는 한달만에야 겨우 도착했다. 공증서 하나를 만드는데 20일이나 걸렸다는 안해의 말을 듣고 나는 너무 어이없어 쓸쓸하게 웃었다. 만만디 중국에서만이 있을수 있는 일이였다. 공증서를 들고 외국인출입국관리사무소로 가기전에 나는 아이를 초청하는 리유를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저의 딸 경이에게는 아빠가 있는 서울로 오겠다는 아름다운 꿈이 있습니다. 지금 그 애는 아빠가 있는 서울로 오기 위해 엄마 말도 더 잘 듣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밥도 더 잘 먹고있답니다. 아빠인 저는 우리 말도 못하고 중국아이들속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그 애의 작은 가슴에 작으나마 고국의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고싶습니다. 1년 반동안 아빠로서 아이에게 진 빚도 서울에서 갚고싶습니다. 이번에 아이초청을 허락해주신다면 서울은 우리 아이를 잊을수 있어도 우리 아이는 영원히 서울을 기억할것입니다.≫
초청리유를 쓰면서 나는 나의 코마루가 찡해남을 느꼈다. 나는 그날로 외국인출입국관리사무소로 가서 나더러 부자간의 관계임을 밝히는 공증서를 해오라던 직원을 찾았다. 반갑게 인사하고 공증서와 초청서류를 들이밀자 담당직원이 대충 읽어보더니 어림도 없다는듯 ≪안돼요!≫하며 서류를 도로 나에게 뎐졌다. 전처럼 보금 빼느라고 그러는거겠지 생각하고 몇번 더 사정해보았으나 여전히 안된다는 한마디 말뿐이였다.
≪지난번에 공증서를 해오라고 했지 않아요?≫
나는 부득불 그가 나에게 진 말빚을 들추어내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그랬던가? 허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요 어쨋든 안된다니까!≫
그는 회전의자를 휙 돌리면서 나에게 손을 내저었다. 분위기를 보니 문제는 조금 심각했다. 허나 법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행사하는 그들과 어떻다고 시비를 할수도 없었다. 그냥 저를 죽여주십사 하고 사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뒤에서 초조히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나는 자리를 비켜줄수밖에 없었다. 직원이 조금씩 틈이 날 때마다 나는 아첨쟁이처럼 빌붙었다. 오전 9시반에 법무부 정문에 들어선 나는 그들이 퇴근하는 시간까지 점심도 먹지 않고 끈질기게 사정했다. 퇴근무렵, 나의 끈질김에 손을 들었다는듯 담당직원이 뒤에 앉아있는 상사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겟느냐고 나의 서류를 가지고 가서 묻는것이였다. 조금 틀스럽게 생긴 간부가 담당직원이 넘겨준 나의 서류를 들고 머리를 돌려 나를 한참동안 훑어보았다. 그 순간 나는 아차! 했다. 나의 옷차림이 너무나 초라했기때문이다. 대학원에서 평시에 입던 옷차림 그대로 달려온것이다. 한국사람들이 실속보다 외모와 형식을 많이 본다던 말이 그 순간에야 피끗 떠올렸다. 양복에다가 넥타이까지 매고 왔을걸! 법을 행사하는 법무부에 와서 나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하고있었다.
≪이번에 집의 안해를 초청했는데 아이는 후에 귀국해서 보도록 하지요 뭐.≫
나를 향해 웃으면서 한 간부의 말이다. 이 말 한마디로 서울로 오려던 나의 딸 경이의 꿈은 박산났고 아이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주려던 나의 소망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법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쉽게 던진 말이겠으나 우리 가정에는 불행이라 하지 않을수 없었다. 나는 어떻다고 더 말할 용기가 없었다. 류학생이 아이를 초청할수 없다는 공문을 보자고 한판 해내고싶었으나 그것이 외려 그들의 약만을 올려줄것 같아서 쓸쓸히 그냥 돌아섰다. 대학원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미국이나 영국, 일본으로 간 나의 친구들을 떠올렸다. 미국으로 류학을 간 친구나 영국으로 류학을 간 친구나 일본으로 류학을 간 친구 모두가 남편, 안해, 아이 할것없이 다 데려갔는데 고국으로 온 나만은 왜 아이를 데려올수 없을가? 그것도 다른 친구들처럼 이곳에서 몇년간 주저앉아있겠다는것도 아니고 다른 여름방학을 리용해 잠간 초청했다가 금방 중국으로 돌려보내겠다는데도 말이다.
아이 초청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나의 말을 듣고 안해는 그럼 자기도 한국으로 오지 않겠다고 앵돌아졌다. 대학에서 국제금융을 가르치고 있는 안해는 정부 대표단으로 여러번 유럽 나라와 중동나라들을 다녀와서 아이를 떼놓고 출국하는 일을 이제는 그다지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녀가 출국한 사이에 아이가 크게 앓은 일이 있었다.) 결국 나는 안해에게 타협하는수밖에 없었다. 방학이 되자 나는 모든 일을 팽개치고 곧바로 귀국했다. 아이와 함께 약 한달간 있고나서 나는 안해를 설복하여 한국으로 나왔다. 한국으로 오기 전날 아이는 자기 홀로 방에 들어가 울고나서 자그마한 쪽지 하나를 우리 가방에 넣어주면서 비행기에 탑승한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로 날아가는 비행기 기내에게 그 쪽지를 꺼내보니 ≪아빠 엄마, 나 대신 서울을 많이 보고 많이 사진을 찍어오라.≫는 내용의 글이 담겨있었다。쪽지를 보고 안해가 눈물을 흘린것은 더 말할것도 없다. 안해는 한국 법무부에서 허락해준 한달기한도 채 놀지 못하고 한국으로 온지 20일만에 총망히 중국으로 귀국했다. 한국에서 좋은 음식을 먹거나 좋은 경치를 볼 때마다 그녀는 아이가 불쌍해서 못견디겠다는 말만을 했다.
김포공항에서 안해를 떠나보내고 나서 대학원으로 돌아오니 천진시 남개대학에서 온 xx라는 중국녀학생이 방학간에 자기 남편과 아이를 초청하여 한달간 놀았다면서 자랑삼아 나에게 말했다. Xx는 조선족도 아닌 진짜 중국사람이였다. 그녀의 말에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조선족인 내가 다른 나라도 아닌 한국에서 아이를 초청하지 못했다는 말이 도무지 입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 이것이 한국이구나! 법치국가라고 우리에게 자랑하는 한국이 알고보니 이 모양이구나! 나는 그 순간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햇다.
며칠후 더욱 기적적인 일이 생겼다. 고려대학에서 류학하고 있는 나의 대학교 동창생 xx씨가 2년간 잇기로 하고 남편과 아이를 데려왔따면서 나에게 기뻐서 전화를 해왔다. 아이 초처장을 하는데 그녀는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했다. xx씨와 xx씨는 모두 녀자다. 한국 법무부의 일은 어쩌면 법보다도 녀자면 더 잘 통하는지 모른다. 결국 한국의 법은 나와 우리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중국 남자류학생들을 무능한 남자로만 만들었다. 나의 안해가 이 일을 알았다면 단박 ≪xx씨와 xx씨는 아이까지 초청했는데 당신은 왜 초청하지 못했지요?≫ 하고 해냈을것이다. 그런 안해앞에서 내가 못났기때문이라는 말외에 무슨 말을 더 한단 말인가!
≪빽을 쓴다≫는 한국말을 중국말로 표현한다면 ≪走后门≫(뒤문거래를 한다는 뜻)이 된다. 중국에는 지금 ≪주후문≫현상이 비일비재로 발생하고잇다. 법 한조항을 알기보다 친구 하나를 더 사귀는것이 더 리익이 될만큼 중국에서 빽은 힘을 낸다. 허나 이에 한국은 웃을 자격이 없다. 빽을 쓰는 일이 남의 나라 일만이 아니기때문이다. 한국의 텔레비죤이나 신문들에서 매일과 같이 까밝혀내는 뢰물사건만 보더라도 한국의 빽이 얼마나 힘을 내는지를 금방 알수 잇다. 왜 법치국가인데도 뢰물이 오가는가? 그것은 바로 이 나라에서도 아직까지는 빽이 있어야 길이 열리기때문이다. 성수대교나 삼풍백화상점은 왜 무너졌는가? 부실공사를 했기때문이다. 그럼 부실공사는 왜 생겼는가? 빽을 썼기때문이다. 즉 건설회사가 질검사를 하는 어른들에게 뢰물을 바치고 눈감아주십사했기때문에 부실공사도 합격증을 타게 된것이다. 결국 한국의 빽은 무수한 생명을 앗아갔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법을 집행하는 법무부에까지 빽이 작용한다면 나도 한국의 국회의원 정도는 알아두어야 하지 않을가? 그리고 중국의 산삼 정도를 뢰물로 가져다 바쳐야 되는것이 아닐가? 장차 나의 딸아이를 기어이 서울구경을 시켜야 하니 말이다. 아이를 서울로 보내겠다고 하면서도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앉아 있으니 아이의 한국길은 영원히 막혀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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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단 이 부분만 읽어봤는데 참 애석한 마음이 드네요. 아마 불법인지 좀 의아스러운 불법으로 넘어오는 분들을 막기 위해서 한 행동으로 보여지는게 개인적인 차원에는 애석하네요. 그리고 인맥과 뇌물 은 한국사회에 아직도 일정부분 있는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많이 줄어든것입니다. 근데 어떤 사회 어떤 선진국도 일명 로비와 인맥은 존재합니다. 어쨌든 열심히 공부해서 대접받는 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훗날 그 공무원들 면상보러 함 가세요^^ 성공하셔서^^ 근데 어쩌면 상대적으로 어쩌면 그분들도 님 앞에서는 거만했지만 속으로는 안쓰러웠을지도 모르겠네요. 정으로 해드릴수는 없는것이니 상부에 지침이 있었을테니가요.
빽이기는 어느 국가에서든 흔히 볼수 있는 일이거든요.유럽 국가든 동방 국가에서든 돈있고 권세잇는 사람이 인정받는게 세상 물정이잖아요....개인적으로 집딸님이 서울 구경 소원을 이루지 못하여 아쉽군요.부모로서 자식의 소원이루어 주지못하는건만치 가슴아픈일 없을건데...아무쪼록 다른 일로서도 따님에게 좋은일 기쁜일이 있었으면 좋겟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