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닉의 이해
갑자기 낯선 곳에 홀로 뚝 떨어진 느낌
자폐증 아이가 예정의 변경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는 패닉(혼란상태)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놓였을 때의 기분과 같은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우리가 사는 지구와는 전혀 다른 혹성에 뚝 떨어져 혼자서 생활해야만 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날 하루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청므 보는 외계인이 다가오고 있다면 누구나 침착하게 있지만은 못할 것이다. 패닉에 빠지는 아이가 느끼는 불안과 충격이 그 정도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며칠 동안 다행히 같은 외계인이 매일 같은 시간에 와준다면 그런대로 견딜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매번 얼굴도 모습도 다른 외계인들이 번갈아가면서 불규칙한 시간에 오거나 예측불허의 행동을 한다면 그 불안감은 더욱 커진다. 자폐증 아이에게는 갑자기 예정이 변경되었거나, 모르는 사람이나 사물을 갑자기 접하는 일이 그 정도로 심각한 불안상태에 놓이게 하는 것이다.
신뢰가 안도감으로
중증 자폐아라도 반드시 타인과 관계를 맺고 생활하게 된다. 처음 2,3년 동안은 부모하고조차 눈을 마주치지 않지만, 4년 정도 지나면 부모와 눈을 마주치고 엄마에게 착 달라붙어 있기도 한다. 아이에게 엄마는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빠를 보면 엄마 뒤에 숨어버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빠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 그 아이에게 있어서 아빠는 낯선 외계인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 아이가 신뢰하는 선생님이 어린이집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을 때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길거리에서 앞치마가 아닌 원피스를 입은 모습ㅇ르 보면 선생님을 몰라보기도 한다.
하나하나 독립된 형태로 축적되는 기억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정보를 하나하나 뇌 안에 축적해나간다. 축적의 과정에도 특징이 있어 하나씩 분리해 쌓아간다. 가령 '고양이'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일반적인 고양이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세 살 때 만난 검은 고양이, 아니면 네 살 때 집에서 기르던 흰 고양이, 또는 열두 살 때 친구 집에서 본 갈색 고양이?' 라는 식으로 하나하나 독립된 형태로 축적된 것을 기억의 서랍에서 끄집어내 생각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양이'가 아니라, 고양이1, 고양이2, 고양이3 과 같이 세 개의 기억의 방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전체적인 '고양이'라는 기억의 방에 통합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자폐증 아이에게는 해마다 반복되는 신년행사나 각종 어린이집 행사도 할 때마다 낯설고 불안한 일들이다. 어린이집 생활을 1년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운동회 때마다 패닉에 빠지는 아이에게 '작년에도 했잖아'라고 해도 아이는 그것을 작년 운동회로만 인식할 뿐, 앞으로 다가올 운동회는 그 아이에게 있어서 별도인 것이다. 물론 자폐증 아이도 나이를 먹을수록 실제로 경험해 축적한 정보가 늘어난다. 그리고 그 풍보한 정보를 이용해 조금씩 응용이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해하기 쉬운 경험학습과 정보의 축적은 매우 중요하다. 어린이집이나 일상생활에서 아이들이 안심할 수 있는지, 패닉을 경험하는지는 주위의 협조방식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교사와 부모는 아이에게 잠재되어 있는 불안에 대해 잘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리가 되는 일을 아이에게 강요하지 말고, 매일의 생활을 예측할 수 있는 일관되고 정리된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패닉은 아이에게 뭐라 말할 수 없고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생겼다는 신호라고 이해하자. 그러면 아이를 책망하거나 덮어놓고 달래고 회유하기보다 아이에게 진정 필요한 대응방안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패닉에 대한 대응
주목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패닉에 빠졌을 때는 누가 옆에서 어떤 말을 걸어도 아이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만 가라앉는다. 패닉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 적절한 대응은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아이를 방 한쪽 구석으로 데려가 "기분이 좀 나아질 때까지 여기 있자"라고 말하고 아이의 상태가 누그러질 때까지 지켜보자. '모두 함께'에 얽매이지 말고 주위 친구들이 그 아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하기 위해서라도 집단에서 떼어놓는 것이 중요하다. 자학행위를 했을 때도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일단 가만이 지켜본다. 물론 피가 날 정도라면 중지시켜야 하지만 갑자기 놀라 말을 걸면 그것이 자극이 되어 불안감이나 기대가 증폭되고 패닉이 심해지기도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가능한 한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한다
패닉은 두 가지의 부정적인 면이 있다. 한 가지는 혼란상태에 빠진 다음 본인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버렸다는 자책감을 갖게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주위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아이로 비춰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능한 한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두세 살 정도의 아이가 장난감을 빼앗겼을 때 우는 것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런 발달단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대여섯 살이 되었는데도 참지 못하고 똑같은 표현밖에 못한다면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는 법과 참는 법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잘못된 표현방법이라고 먼저 말로 전달하면서 아이 앞에서 올바른 표현을 해보이며 연습하게 한다. 그리고 아이가 그것을 해내면 잘했다고 칭찬해주자. 또 초조해할 때 아이가 좋아하는 놀이로 유도해 기분전환을 꾀하는 것도 좋다. 그렇게 해서 마음을 조절하는 방법을 기억해나가면 패닉에 빠지는 횟수도 서서히 줄어들게 된다.
임기응변적인 대응은 일시적인 방법이다
아이가 패닉에 빠졌을 때 어른들은 아이를 달래려고 '과자 줄게' '재미있는 비디오 보여줄게'라며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은 자칫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닥쳤을 때 상대가 같은 반응을 보일 때까지 아이가 누그러지지 않는 패턴으로 굳어져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잘못하면 어른과 기 쌍무을 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원하는 것을 얻을 목적으로 떼를 쓰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어버린다. 어린이집에서 패닉에 빠지면 교사와 일대일이 되든가 좋아하는 교사를 독점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패닉에 대한 대응은 실제로 어렵다. 사실 비디오를 보여주어 아이가 누그러지면 좀처럼 다른 방법을 검토할 마음은 잘 생기지 않게 된다. 그 자리를 모면하는 대응이라고 책망하기는 쉽겠지만, 실제로 그것 말고 다른 수단을 좀처럼 찾지 못할 정도로 패닉이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출처: 다나카 야스오 외/ 교사를 당황하게 하는 아이를 만났을 때/한울림(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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