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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사
32. 뤼순 근교에서의 전투(1)
비쯰보에 상륙한 일본군 제2군은 5월 2일 오쿠 장군의 지휘하에 뤼순으로 향했다. 본 부대의 최우선 과제는 진저우(金州) 지협과 다롄(大蓮) 항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제4동시베리아보병사단장 포크 육군소장은 관둥 반도의 러시아군 사령관 스텟셀 육군중장의 명령에 따라 진저우 근교에서 일본군을 맞이하기 위하여 2개 분견대를 파견했다. 8개 중대, 제5연대 소속의 기병대, 국경경비대와 10문의 포로 구성된 제1분견대는 두닌 대령의 지휘하에 전선 좌측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2개 중대와 2개 독립부대로 구성된 제2분견대는 세이풀린 중령의 지휘하에 차판탄 촌(村) 방면으로 향했다.
진저우 근교 방어에 소규모 병력이 배정된 이유는 분견대의 최우선 과제가 적극적인 전투 수행이 아닌, 단순한 정찰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스텟셀은 5월 2일자의 훈령에서 “적의 병력이 우세할 경우 전투를 피하면서, 서서히 진저우의 주둔지로 후퇴하라”고 직접 명령했다. 스텟셀은 물론 포크 역시 분견대가 일본군 선봉대와 교전할 경우에 대비하여 어떠한 구체적 명령도 하달하지 않았다.
5월 3일 08시 30분 두닌의 분견대가 주둔중인 진지 전방의 고지에 일본군 보병부대가 출현했다. 러시아군이 포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협곡으로 피신하여 공격을 중단했다. 2시간이 지난 후 일본의 공격이 재개되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 분견대의 우측을 목표로 했다. 그 곳의 지휘관은 육군소장 나데인이었다.
일본군 보병부대는 포 24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단 10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던 러시아 포병은 일방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마노프스키 육군중령의 지휘하에 용감하게 전투에 임했다. 전체의 2/3에 해당하는 막대한 병력손실에도 불구하고 로마노프스키의 포병은 정확하고 집중적인 포격을 가했다. 결국 일본군 포병은 후퇴함으로써 약 13시간에 걸친 공격이 중단되었다.
일본군은 오전 7시 차판탄 촌에 주둔중인 러시아군이 우측 진지를 공격하기 위하여 8개 포병중대와 야포공격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부대 이동은 러시아군 분견대의 소총사정거리를 벗어난 3~4㎞의 거리를 두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제2분견대의 지휘관 세이풀린 중령은 자신이 단 2문일지라도 야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적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대포가 없었으며, 09시 30분 러시아군 2개 중대는 절대 열세인 채 전투에 임해야만 했다. 일본군의 야포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세이풀린 분견대의 주둔지를 포격했다. 반면 러시아 분견대는 소총과 기관총만으로 대응했다. 세이풀린은 수차례에 걸쳐 지원포격을 요청했으나, 포크 장군의 답신은 도래하지 않았다. 전투가 3시간 넘게 지속되었다. 일본군 4개 대대가 인근의 협곡을 통해 러시아군의 우측을 우회하여 방어선을 압박하자 세이풀린의 부대는 13시 30분 진저우 방면으로 후퇴했다.
차판탄에서 러시아군이 후퇴한 것은 러시아군의 좌측 진지에서의 전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약 14시경 나데인의 분견대는 포크 장군으로부터 진저우의 주둔지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러시아군은 야포의 지원을 받은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으며 후퇴하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일본군이 진저우에 근접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고전한 이유는 포크 장군의 무능함 때문이었다. 즉 그의 잘못으로 선봉대에 배정된 병력이 부족했으며, 전투중에는 예비대의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 분견대 사이에 통일된 지휘계통이 결여되어서 합동작전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보병과 포병은 전력상 우월했던 일본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 5월 3일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손실은 전사 또는 실종이 24명, 부상 169명이었으며, 일본군의 사상자 수는 장교를 포함하여 146명이었다.
33. 뤼순 근교에서의 전투(2)
후퇴한 러시아군이 도착한 진저우(金州) 주둔지는 랴오둥 반도와 관둥 반도를 연결하는 폭 약 4㎞의 협소한 지형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뤼순에서 62㎞의 거리에 위치하는데 ‘뤼순의 관문’이라는 명칭처럼 지리적으로 뤼순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곳이었다. 여기에는 13개 포병중대가 배치되었으며, 공병설비로는 5개 다면보루(보방식 보루), 3개 안경보(眼鏡堡, 안경처럼 생긴 관측소를 갖춘 보루), 2단 및 부분적으로 3단으로 된 보병참호가 있었고 각 참호는 교통로로 연결되었다.
진지의 동쪽과 북쪽 능보에는 철조망과 전기점화장치를 갖춘 84개의 지뢰 등 인공장애물이 설치되었다. 그 외에도 66개의 엄폐호가 구축되었으며, 8개의 우물이 개발되었다. 전신선과 탐조등 2개도 설치되었다. 진저우 좌측 진지의 북쪽에 위치한 진저우 시에도 적절한 방어설비가 갖추어졌다.
제4동시베리아보병사단 소속의 분견대가 진저우 지협을 방어했다. 분견대의 병력은 17,760명이었으며, 보유화력은 야포 54문, 요새포 77문, 기관총 10정 등이었다. 진지와 진저우 시를 직접 방어하기 위하여 트레치아코프 대령의 지휘하에 약 3,800명의 병력과 65문의 포 그리고 10정의 기관총이 할당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러시아군 포대가 고지 정상의 노출된 진지에 밀집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약점이었으며, 탄약의 공급 또한 원활하지 못했다. 포 1문당 60발의 포탄이 지급되었는데, 이 정도의 양은 단 1일간의 격전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각 포병중대 간에 전신선이 부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된 포격통제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았다.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진저우 진지는 일본군 제2군의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했다. 이 진지의 견고하고 확고한 방어를 위해서는 유리한 지형적 조건과 거기에 적합한 공병설비, 진지 양 측면에 대한 함대의 지원과 같은 전제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프랑스의 전쟁사학자 그랑프레(Clement de Grandprey)는 “진저우 지협은 보루의 건설을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춘 지형이다. 만약 러시아군이 보루를 건설하여 신기술로 무장할 수만 있었다면, 소수의 병력으로도 한달 동안 일본군의 진군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보루를 포위하던지 아니면 관둥 반도 내에서 비쯰보 이상으로 뤼순 수비대와 러시아 함대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컸던 다른 지역으로 상륙해야만 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주군 사령관 쿠로파트킨은 뤼순 근첩로 상에서 유일한 실질적 보루였던 진저우 진지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군이 진저우를 공격하기 직전이었던 5월 12일 스텟셀이 접수한 쿠로파트킨의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포크 장군의 부대를 적절한 시기에 뤼순 수비대에 합류시키는 것이다. 적당한 시기에 진저우 진지로부터 대포를 철수하여 기차로 운송하는 것이 소망스럽다고 여겨진다. 그와 같이 행동하지 않을 경우 새로운 전리품을 적에게 선사하게 될 것이며 …… 그것은 매우 고역스러운 일이다.
오쿠 장군은 진저우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약 3만5천 명의 병력(제1, 제3 그리고 제4사단 - 총 36개 보병대대, 3개 공병대대, 9개 기병중대), 야전포 216문 그리고 기관총 48정 등의 군사력을 집결시켰다.
지협을 방어하고 있던 러시아 제5보병연대는 일본군에 비해 병력에 9배, 포와 기관총의 보유량에서 4~5배 정도 열세였다.
34. 뤼순 근교에서의 전투(3)
5월 13일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경계초소를 압박하기 시작하여 손쉽게 진저우 시를 점령했으며, 러시아 수비대는 일본군의 화력을 피하여 진지로 후퇴했다. 오전 5시 일본군은 진저우 진지에 화력을 집중했다. 일본군 야전포대는 4척의 포함과 6척의 수뢰정으로부터 화력지원을 받았다. 이 군함들은 오전 6시 30분 진저우 만에 진입하여 러시아군 진지의 남쪽 측면에 배치된 포대를 포격했다. 일본군의 대포는 월등한 성능을 보유했다. 오전 11시경 일본군 포병은 러시아군 포병중대가 보유한 대부분의 화력을 제압했다.
러시아군의 일부 대포가 파손되었으며, 그 외의 것은 포탄이 고갈되어 포격을 중지했다. 포크 장군의 사단에 소속된 야전포대의 대포 44문이 그 부근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거리상의 문제로 지원포격을 가할 수 없었다. 단지 고바토 대위의 제3포병중대만이 엄폐진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관계로 일본군 포병중대를 집중 포격했다. 포격은 매우 효과적으로 이루어져서 이 포격에 제압된 일본군 포병중대가 포격을 중지했다. 이에 비해 제3포병중대는 아무런 손실을 입지 않았다. 일본군 역시 수차례에 걸쳐 제3포병중대를 포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제3포병중대의 역할이 전투 결과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일본군 제3,4사단은 러시아군 포병이 약하다는 점을 이용하여, 오전 약 8시경 진저우 진지의 전 지역을 공격했다. 평지를 따라 노출된 채 밀집대형을 유지하며 진격하던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소총과 기관총 세례를 받았다. 고지에 위치한 야전포대는 러시아군 제5연대의 담당 지역인 좌측 방어선에 결정적인 지원 포격을 가했으며, 일본 제4사단 소속의 각 부대는 심각한 손실을 입은 채 퇴각했다.
오전 10시경 뤼순에 정박중이던 포함(砲艦) 보브르 호와 수뢰정 보이키 호 그리고 부르늬 호가 만(灣) 안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제3사단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이 포격으로 일본군 보병이 분산되었으며, 포병 또한 제압되었다. 오전 약 11시경 썰물이 시작되자 각 군함은 포격을 중지하고 다롄(大連)으로 회항했다.
러시아 군함의 정확한 포격은 진저우 수비대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으며, 일본군의 좌측 전열을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정오 무렵 일본군 보병과 포병의 공격이 중단되었다.
14시에 공격이 재개되었다. 소총과 기관총을 이용한 제5동시베리아보병연대의 집중사격으로 일본군은 큰 손실을 입었으나 완만한 속도로 꾸준히 진격했다. 그러나 2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러한 진격조차 중단되었다.
진저우 전투에 관한 일본군 제2군 사령관의 공식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적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하여 오전 5시까지 전황에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도 아군은 적진을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지 못했으며, 그런 와중에 아군의 좌측 공격라인을 형성하고 있던 제3사단이 보강된 적군 의해 포위될 뻔한 위기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한편 후방 진지에 위치한 적의 포병은 적의 공격을 지원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제3사단을 더욱더 위협했으며, 동시에 아군의 야전포탄 예비량이 거의 고갈되었습니다. 즉 전투를 계속한다는 것은 명백한 위험이었습니다. 본인은 이 점을 고려하여 아군 보병부대에게 돌격명령을 하달했으며, 값비싼 대가를 치르더라도 진지점령을 완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적군에게 강력한 포격을 가하기 위하여 아군의 포병에게 잔여 포탄을 모두 발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아군 제1사단의 보병은 적진의 정면을 향하여 용맹하고 과감하게 돌진했습니다. 그러나 적의 집중사격으로 인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결국 계속해서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전황은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 지휘부가 전황이 불리하다고 여기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일본군 제4사단 소속의 부대는 함포사격의 지원하에 진저우 진지의 좌측 방어라인에 구축된 참호를 점령하였는데, 이 참호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제5동시베리아보병연대가 방치한 것이었다.
러시아군의 좌측 방어라인이 붕괴됨에 따라 더 이상 지협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포크 사단의 주력부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한 제5동시베리아보병연대 소속의 모든 부대는 18시 이후 진저우 진지에서 뤼순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이 진저우 방어에 실패한 것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우세와 러시아군 지휘부의 실책에 그 원인이 있었다. 지협을 방어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포크 장군은 방어명령조차 하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5동시베리아보병연대에 소속된 각 부대의 행동은 통일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포크는 전투 지휘에 가담하지 않았으며, 그의 부대는 지원임무를 망각한 채 사태의 추이를 소극적으로 관망했다.
진저우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사병 1,375명(전투 참가자의 31.5%)와 장교 28명(46%)의 손실을 입었다. 일본군의 손실은 일본 측 공식 자료에 따르면 사병 4,071명(11.6%), 장교 113명(22.1%)이었으며, 대부분이 파괴된 것이지만 전체 중포(重砲)를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35. 뤼순 근교에서의 전투(4)
일본군이 진저우(金州) 진지를 점령했다는 것은 그들이 뤼순으로 향하는 관문을 접수했음을 의미했다. 뤼순 근접로에 배치된 관둥 부대가 보유한 화기는 소총뿐이었다. 뤼순 전투에 참전한 라세프스키가 “모든 이들은 진저우 진지가 난공불락이며, 그 곳에 총력을 투입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진지가 두 번의 강습으로 함락되었다. 과연 진지를 고수하는 것이, 하다못해 그 진지의 함락을 지연시키는 것조차 그렇게 어려웠단 말인가?”라고 한탄한 것처럼 진저우 진지를 방치했다는 소식은 요새수비대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라세프스키의 일기는 이후에 벌어지는 뤼순의 비극적 운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5월 14일 그의 일기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보인다.
…… 내 견해로는 뤼순, 바로 이 뤼순이 전쟁의 목적이다. 일본인들이 뤼순을 점령하면 전쟁의 절반은 승리하 된다. 이 경우 우리는 함대 및 값비싼 보루와 포대를 잃게 된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2함대의 기지를 상실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뤼순의 함락과 동시에 영국과 미국 등 일본의 구미 우방국들은 반드시 일본에게 재정 지원을 할 것이다.
다른 기록 또한 매우 주목할 만하다.
자신의 행위를 돋보이게 하려고 뤼순은 난공불락이라고 외쳐대던 이들은 우리 조국 앞에 모두가 죄인이다. 그들 때문에 뤼순이 현재와 같은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 러시아의 영광과 명예를 위하여 우리는 뤼순을 고수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비대의 많은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할 것 같다.
5월 14일 새벽 다롄(大連) 항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이렇게 여유 있는 상황에서 특이한 것은 스텟셀과 포크 장군으로 대표되는 러시아군 지휘부가 뤼순 근접로 방면으로 부대를 이동시키면서 다롄의 항만시설을 파괴하는 것마저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저우 진지로부터의 후퇴 소식을 접한 공병장교 제드게니제 대위와 수호믈린 중위는 가능한 모든 것들을 파괴하기 시작했으나 시간과 작업 인원의 부족으로 실질적 성과는 거의 없었다. 100동(棟) 이상의 창고와 임시막사, 발전소, 철로제작소, 다량의 레일, 50척의 화물선과 막대한 양의 석탄 등이 일본군 수중에 들어갔다.
진저우 진지와 다롄 항의 함락은 러시아군 관둥 부대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뤼순과 만주 주둔군 사이의 육상 연결로가 차단되었으며, 일본군은 다롄 항을 이용하여 만주와 관둥 반도에서 작전중인 육군에 보충대, 무기, 탄약 그리고 식량을 보급했다. 일본의 수뢰정은 다롄 항을 기지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관둥 반도 동부 해안 전체를 관측하고 포격할 수 있는 요지를 획득한 셈이었다.
이 사이 포크 장군 휘하의 분견대는 계속해서 뤼순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이 공격에 나설 것을 두려워한 스텟셀 장군은 5월 15일 오전 포크 장군에게 전문을 발송하여 “나머지 진지에서 무익하게 지체함이 없이 볼치예 산(현지명으로는 이룡산(二龍山)으로 후퇴하라”고 했으며, 동일 17시 30분에는 “지체 없이 후퇴할 것”을 반복했다. 일몰 경에 포크 장군의 분견대가 볼치예 산에 다다랐다.
제7동시베리아보병사단의 지휘관 콘트라첸코 장군만이 어렵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할 수 있었다. 즉, 뤼순으로 철수하는 대신 전선을 따라 형성된 능선의 동쪽에 있는 고지에서 진격중인 일본군을 대기하며, 볼치예 산으로 후퇴하기 전에 관둥 반도를 횡단하며 만다린 길이 있는 좁은 평원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치르자는 것이었다.
이 고지에는 포크 장군의 부대와 제7동시베리아보병사단의 예하부대가 전진배치되었다, 콘트라첸코는 진저우에서의 전투경험을 활용했다. 방어선은 좌우 양 측면의 바다로 이어지면서 반도를 횡단하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우회작전을 펼칠 수 없었으며, 불가피하게 정면공격을 택해야 했다. 약 23㎞에 걸친 방어선에 제4동시베리보병사단 예하 4개 연대와 제7동시베리아보병사단 소속 1개 연대가 배치되었다.
스텟셀은 6월 1일이 되어서야 방어명령을 하달했다. 본 명령서는 “일본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공격해 들어올 경우 …… 그들을 뤼순 외곽의 산들을 거쳐 바다로 이어지는 전선에서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명령서에 따라 해안으로부터 우측 방어선에 3개 대대, 6개 의용군 부대, 대포 8문, 기관총 8정 등이 배치되었다. 중앙 방어선에는 1.5개 대대, 8개 의용군 부대, 포 2문, 기관총 4정 등이 배치되었다. 좌측 방어선에는 6개 대대, 5개 의용군 부대, 포 28문 등이 배치되었다. 6.5개 대대와 32문의 포로 구성된 예비대는 볼치예 산 근처의 분지에 배치되었다.
대부분의 군사력과 예비대를 좌측 방어선에 집중함으로써 중앙과 우측 방어선을 약화시킨 스텟셀의 병력배치는 일본군이 반드시 만다린 도로를 공격할 것이라는 확실치 않은 예상에 따른 결과였다. 5월 말에서 6월 초 사이에 고지에 배치된 부대를 보강하는 조치와 진지 강화작업이 시작되었는데, 좌측 방어선을 많이 배려했다. 개인참호와 교통참호가 급속하게 구축되었으며, 포대, 엄폐물, 철조망 등이 설치되었고 여러 곳에 지뢰가 매설되었다.
그러나 첩보활동이 부실했다. 제4동시베리아보병사단 참모부는 5월 중순에서 6월 초순 사이에 일본군이 뤼순으로 진군중이라는 정보를 수차례 보고받았으나, 대체로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일본군은 진저우 진지와 다롄 항을 점령한 후 뤼순 침공을 자제했으며,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추격하는 것도 자제했다. 진저우 전투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였으나 가장 큰 이유는 도쿄의 일본군 지휘부가 러시아 만주 주둔군의 남부전위대에 대응하여 엄호부대를 확보함으로써 관둥 반도에서의 작전을 성공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목적에서 북동전선에 위치한 오쿠 장군의 제2군에 소속된 제3,4사단을 이동시켰다. 관둥 반도에는 뤼순 점령의 중책을 맡은 제3군의 주력인 제1사단이 잔류했다.
5월 16일 제11사단의 선발대가 상륙하기 시작했으며, 이 부대와 함께 제3군 사령관 노기 대장이 전장에 도착했다. 6월 1일에 제3군 소속의 제1사단과 제11사단의 병력은 포병대, 기병대, 공병대 및 수송대를 포함하여 약 3만 명에 달했다.
노리가드(B. W. Norreguard), 바틀렛(Sir Ellis Ashmead-Bartlett), 그랑프레(Clement de Grandprey) 등을 비롯한 해외의 군사평론가들은 약 18~20㎞에 달하는 전선을 수비하고 있던 당시 일본군 제3군의 상태가 5월 중반 이후 비관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 시기에는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우세하였으며, 따라서 일본군 지휘부는 뤼순수비대의 공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군사력이나 계획과 관련하여 믿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던 스텟셀과 그의 측근들은 이런 유리한 상황을 이용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일본군의 총공격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6월 12일까지 러시아와 일본 모두가 상황에 변화를 줄 만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진지강화에만 주력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러시아군의 약점을 탐색하면서 선봉대를 가능한 러시아군 진지에 접근시키려 했다. 선봉부대 간에 매일같이 소규모 총격전이 이루어졌지만, 전면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36. 뤼순 근교에서의 전투(5)
일본군이 진저우 진지를 점령하고 뤼순과 만주 주둔군 사이의 교통을 단절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러시아군 지휘부는 관둥 반도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단호한 군사적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뤼순과 같은 거대한 군항의 함락은 러시아의 위신에 심각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며, 동시에 태평양함대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제1시베리아군단이 뤼순을 구원하려다 실패한 전투 이후의 비관적 상황 때문에 함대의 운명에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알렉세예프는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한 돌파작전이 필수적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파손된 장갑함 체사레비츠와 레트비잔 그리고 포베다의 수리가 6월 초에 완료되었다. 반면 하쯔세와 야시마 호가 러시아의 수뢰에 의해 침몰된 후, 일본 함대는 단 4척의 장갑함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 함대의 손실은 아르헨티나로부터 새로운 장갑함 닛신(日進)과 가스가(春日)를 구입함으로써 보충되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와 일본 양측 모두 공히 6척의 장갑함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함대사령관 비트게프트 해군소장은 함장 다수의 견해에 동의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는 중의 전투는 불가피하며, 교전이 이루어지면 러시아 함대가 당연히 패할 것으로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단 하나의 가능성, 즉 적극적으로 함대기지를 방어하는 것만이 적과의 교전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알렉세예프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함대를 이동시키라고 재차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이에 함대사령관은 출항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
현대의 전쟁사학자들은 비트게프트가 용감하다는 사실에 의혹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용감함만이 지휘관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는 훌륭한 참모부원이었으나 함대사령관으로서는 실전경험이 전무했다. 알렉세예프 이후 함대제독이 된 비트게프트는 기함장 및 함장들과의 첫 집회에서 “귀관들의 협조와 조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관은 제독이 아닙니다.”라며 자신의 단점을 공개적으로 시인했다.
출항은 6월 10일로 예정되었다. 비트게프트는 일본 함대가 분산되어 있어서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출항 전에 순양함 디아나 호, 포함 길랴크 호 그리고 연안포대는 내항에 기로를 부설하려던 일본 함정을 격퇴했다. 6월 10일 밤 해군중령 옐리세예프는 7척의 수뢰정 편대를 이끌고 출항하여 함대기지의 입구에 기뢰를 부설하려던 일본 함정을 공격하여 후퇴시켰다.
비트게프트 해군소장은 출항준비 명령을 하달했다. 함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장갑함 체사레비츠(기함, 함장 이바노프 해군대령), 레트비잔(함장 센스노비츠 해군대령), 폴타바(함장 우스펜스키 해군대령), 세바스토폴(함장 에센 해군중령), 페레스베트(함장 보이스만 해군대령, 본 전함에 함대부사령관 우흐톰스키가 승선하고 있었음), 포베다(함장 자차렌늬 해군대령)와 순양함 바얀(함장 레이첸쉬타인 해군대령), 아스콜드(함장 그람마트치코프 해군대령), 디아나(함장 리벤 해군중령), 팔라다(함장 사르나프스키 해군대령), 노비크(함장 슐츠 해군중령) 및 수뢰정 브사드니크(함장 오파츠키 해군중령), 가이다마크(함장 콜류바킨 해군중령) 그리고 6척의 구축함 - 보이키, 레이체난트, 부라코프, 븨노슬리늬, 그로조보이, 베스스트라쉬늬 호였다.
내항으로부터 외항 정박지로의 출항이 04시에 시작되어 약 11시경에 완료되었다. 이때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가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총 15개의 기뢰가 폭파제거되었으나 14시까지 바다로 출항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15분 후 일본 수뢰정 12척이 뤼순항으로 접근하여 순양함 마쓰시마(松島) 호의 지원포격하에 러시아 소해정을 공격했다. 이에 러시아 순양함 노비크 호와 수뢰정이 응사하자 14시 45분에 모두 퇴각했다.
일본의 정찰선은 러시아 함대가 출항했음을 도고 헤이하치로 중장에게 보고했다. 당시 도고는 함대의 주력을 뤼순으로 이동시킬 계획이었다. 약 17시경 러시아 함대는 항로의 교차점을 향해 접근중인 일본 함대를 목격했다. 일본 함대의 편성을 보면 4척의 장갑함(미카사, 아사히, 후지, 시키시마)과 4척의 장갑순양함(닛신, 가스가, 야구모, 아사마) 그리고 4척의 경순양함(가사기, 치도세, 다카사고, 니이다카) 등이었다. 그 후방에 6척의 순양함이 수뢰정 18척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그 외에도 장갑함 진원(鎭遠,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의 주력함이었으나 전쟁 중 일본에 나포되어 일본 함대에 소속됨)을 비롯하여, 순양함 4척과 수뢰정 12척으로 구성된 한 무리의 군함이 러시아 함대와 관둥 반도 연안 사이를 항해중이었다.
이 순간 비트게프트는 최초로 적과 교전하기로 결정했으나, 일본 함대에 비해 수뢰정의 수가 30 대 6으로 현저하게 적다는 것을 확인하자 뤼순으로 회항했다. 황혼이 접어들고 약 20시가 되자 일본 함대가 시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일본 수뢰정은 러시아 함대의 뒤를 추적하고 있었으며, 야음을 틈타 각 3,4척으로 편성된 8개 편대가 어뢰공격을 시작했다. 일본 군함은 어뢰 38발을 발사했으나 단 한발도 명중시키지 못했으며, 오히려 그 중 1발이 자기편 수뢰정 지도리(千島) 호에 명중되었다. 러시아 전함과 연안포대의 공격으로 일본 수뢰정 3척이 침몰되었다.
22시에 내항으로 회항한 러시아 함대가 닻을 내리는 중에 함대장갑함 세바스토폴 호가 일본이 부설한 기뢰를 건드리면서 선체 하부가 관통되었다.
비록 러시아 함대가 본연의 임무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함대의 출항 사실이 일본의 전쟁수행계획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밝혀졌다. 즉, 랴오양(遼陽)에 대한 공격이 예정되어 있던 6월 11일 일본군 지휘부는 도쿄의 명령서를 접수했는데 러시아 함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만주로의 식량수송이 위협을 받고 있는” 만큼 우기가 지난 후에 공격에 착수하라는 내용이었다.
37. 뤼순 근교에서의 전투(6)
관둥 반도에서 소강상태가 약 한달간 지속되는 동안 도쿄의 최고 사령부는 노기 장군의 제3군을 위한 중간기지를 다롄(大連)으로 이전하기 위해 소해정을 이용하여 기뢰를 집중적으로 제거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점유한 꾸인산 산까지의 전선에서 다롄이 한눈에 관측되는 만큼 다롄의 안전이 완전히 보장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은 자신의 좌측 공격라인을 전진시켜 위의 지점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러시아군 지휘부는 꾸인산 산의 전술적 가치를 과소평가했다. 이렇게 중요한 지점의 방어에 바라노프식 구형포 2문을 보유한 단 1개 중대만이 배정되었다. 소강상태중에 간신히 흙으로 덮은 돌무더기를 제외하면 이 산의 진지는 보강된 것이 없어서 일본군의 포격에 대비한 엄폐물이 전무했다. 산 정상을 향해 가파른 오솔길이 나 있었다.
6월 13일 약 5시경 2척의 일본 측 수뢰정이 만(灣) 안에 진입하여, 러시아군의 우측 방어선을 포격했다. 본 전투에는 해군소장 로쉰스키의 총 지휘하에 뤼순에서 11시 30분에 출항한 순양함 노비크 호, 포함 오트바즈늬 호와 그레마쉬 호 그리고 11척의 수뢰정이 참전했다.
러시아 군함이 다가오자 일본 수뢰정이 후퇴했다. 만에 진입한 러시아 군함은 16시까지 일본군 좌익을 포격한 후 기지로 회항했다.
꾸인산 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이 일본군 제11보병사단에 하달되었다. 약 05시경 11사단 예하부대가 러시아군을 압박하여 2개 산악포중대가 배치된 곳을 점령했다. 인근의 고개에 배치된 57㎜ 포로는 사정거리가 짧아서 점령한 일본군 포병중대를 포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할 수 없었다. 한편 바라노프식 구형포는 보병의 강습에 대응하기는 적당했으나 포격전에는 부적절했다.
약 13시경 제11사단 소속의 제43보병연대는 지원포격을 받으면서 공격에 나섰다. 꾸인산 산을 방어중이던 중대는 특별한 저항도 하지 못했으며, 2문의 대포도 모두 파손되었다. 15시에 일본군이 산 정상에 근접했으며, 30분 후 꾸인산 산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후 포크 장군은 자기 휘하 분견의 우측 방어선이 일본군에 의해 돌파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서둘러 볼치예 산으로 퇴각했다. 6월 14일 밤 러시아군은 방어에 적절하지 못한 위치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방어선은 촌락과 능선, 암석 구릉지대, 그리고 계속해서 바다에 이르는 만(灣)의 남쪽 해안을 따라 형성되었다. 꾸인산 산을 빼앗김에 따라 뤼순 방어를 위한 부대 전개에 허점이 발생했다.
일본군은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꾸인산 산의 진지보강에 치중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한 콘트라첸코 장군은 후퇴를 멈추고 그 산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했으며, 6월 14일에는 일본군이 전진기지를 재차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여 태평양함대 사령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순양함 노비크 호와 포함 3척 그리고 수뢰정 4척이 출항하여 약 7시경에 도착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일본군의 공격은 없었다. 이에 러시아 군함은 동부연안에 위치한 일본군 진지를 향해 약 50발의 포격을 가한 후 20시에 뤼순으로 회항했다.
꾸인산 산의 탈환준비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반면 일본군은 집중적으로 진지를 보강했다. 산 정상과 경사면에 서로 연결된 여러 개의 참호와 엄폐된 다면보루가 구축되었다. 각 참호는 산 정상에 인접한 곳에 높게 구축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군은 일주일에 걸쳐 꾸인산 산을 둘러싸고 있는 감제고지를 잘 보강된 야전진지로 만들어서 7개 대대 병력을 배치했다.
꾸인산 산에 대한 반격은 6월 20일 밤부터 21일 사이에 실행되었다. 6월 20일 러시아군은 일본군으로부터 일본군이 수기(手旗)로 신호를 보내던 고개를 탈환했으며, 여명에는 동부 연안에 위치한 진지를 점령했다. 꾸인산 산의 공격에는 사비츠키 대령의 지휘하에 제13연대 소속의 의용기마부대와 제14연대 소속의 5개 중대 등 총 1만 3천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다. 공격은 정면과 좌,우측 세 방향에서 실행될 예정이었으며, 사비츠키 대령은 본 작전 명령에 맞게 자신에게 배속된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기습은 자정에 실시되었으나, 실패로 끝났는데,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종대로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부대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각 부대가 개별적으로 서로 다른 시각에 전투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6월 21일 아침에 공격을 재개했지만, 정오경 실패가 명백해졌다. 각 부대는 북쪽, 서쪽 그리고 남서쪽 세 방향에서 꾸인산 산을 포위하면서 정상에 1,000~1,200보 가량 접근했다. 일부의 지점에서는 400보 거리까지 전진하여 정상의 다면보루에 접근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그 때마다 강력한 화력을 동반한 일본군의 저항을 받아야 했다.
이런 상황을 파악한 포크 장군은 정상을 향해 공격준비포격을 가한 후, 세 번째 공격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13시에 30문이 동원된 공격준비포격이 시작되었다. 15시경 우측에서 공격하는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뤼순으로부터 순양함 노비크 호와 포함 3척 그리고 수척의 수뢰정이 만(灣)에 진입하여 일본군의 좌측 방어선에 포격을 가했다.
러시아군의 포격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일본군의 주요한 보루는 파괴되지 않았으며, 약간 파손된 정도에 불과했다. 일본군 병사들은 엄폐물에 피신해 있었으며 포격이 끝난 후, 공격하는 러시아군을 향해 재차 화력을 퍼부었다. 일본군의 다면보루를 탈취하기 위한 기도는 모두 허사가 되었다. 18시경부터 내린 폭우로 러시아군은 공격과 포격을 중단했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군 장교 15명과 사병 621명이 전사하거나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군의 병력 손실은 300~450명에 달했다.
위 전투가 실패한 요인은 관둥 반도의 러시아군 지휘부, 특히 스텟셀과 포크 장군이 뤼순 근교의 전투에서 꾸인산 산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 애초부터 진지를 필요한 만큼 강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산을 탈취당한 후에는 재빠르게 반격하지 않음으로써 일본군이 진지강화를 완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6월 21일의 야간에도 러시아군의 공격이 있엇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투계획이나 사전정보 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전투중에는 공격 대형간의 합동작전이 원활하지 못했다. 더구나 보병, 포병 그리고 함대가 보여 준 행동의 불일치는 야간전투는 물론 이 날에 있었던 모든 반격이 실패한 이유가 되었다.
38. 뤼순 근교에서의 전투(7)
6월 22~23일 산발적 전투가 꾸인산 지역에서 계속되다가, 7월 13일까지 재차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이틀간의 격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진지보강에 착수했다. 촌락 주변에 교통참호가 구축되었는데, 예비대와 포병을 위한 개인참호 및 은폐물이 보강되었으며, 다수의 야전보루가 구축되었다. 산과 계곡 입구, 능선 사이 등 여러 지점에 다면보루가 구축되었다. 부대 배치를 위하여 위의 거점들을 이어주는 깊은 교통참호가 산 정상을 따라 구축되었다.
능선의 보루가 특별히 보강되었으며, 동쪽에서 능선으로 향하는 언덕길에 인공장애물이 설치되었다. 꾸인산 산을 상대로 한 우측 방어선의 보강작업이 미진했다. 6월 상순 다면보루가 급속하게 구축되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으로 작업이 중단되었다. 7월 13일 약 22㎞에 달하는 전진진지 라인에 제4,7 동부시베리아보병사단 소속의 병력 약 1만 6천 명과 포 70문, 기관총 30정 등이 배치되었다. 반면 노기 장군의 제3군은 원군을 제외하고도 6월 초에 6만 명으로 증원되었다. 또한 대포 180문, 기관총 72정을 보유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약 4배의 병력과 월등한 화력으로 러시아 군을 뤼순으로 격퇴시킨 후, 그 즉시 뤼순을 탈취하려 했다.
공격은 7월 13일로 예정되었다. 일본군의 주 공격목표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곳으로 지적된 우측 방어선이었다. 이 곳이 함락될 경우 만(灣)과 촌락을 방어할 수 없게 된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일본군의 공격계획에 관한 정보를 공격 2일 전인 7월 11일에 우연히 입수했다.
7월 13일 06시 30분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모든 진지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동시에 보병이 포병의 엄호포격하에 공격에 나섰다. 러시아군의 전진초소를 물리친 후, 주력을 고갯길에 집중 투입하여 정오 무렵 부분점령에 성공했다.
고갯길의 손실로 러시아군 진지는 심각하게 약화될 수 있었다. 즉 이 곳을 점령한 일본군은 러시아군의 방어선으로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간파한 제7동시베리아보병사단장 콘트라첸코 장군은 반격명령을 하달하여, 19시 30분 고갯길을 탈환했으나, 익일 07시에 일본군에 의해 재점령되었다.
7월 13일 약 15시경 일본군은 좌측 방어선을 점령하려 했으나, 모든 공격이 격퇴되었으며, 20시에 전투가 종료되었다. 중앙과 좌측 방어선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일본군은 러시아군 진지에 500~600보까지 접근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우측 방어라인에서의 전황은 다른 양상이어서 러시아군이 전적으로 불리했다.
7월 14일 약 05시경 일본군은 러시아군 우측 방어선에 집중포화를 가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기도는 재차 무위로 끝났다. 약 12시경 순양함의 엄호를 받으며, 태평양함대 소속의 장갑함 레트비잔과 포함, 수뢰정이 러시아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만(灣)으로 진입하여 일본 제3군의 좌측 공격라인을 포격했다. 약 2시간 후, 일본의 순양함이 나타나자 양측간에 산발적으로 교전한 후, 러시아 군함이 낮은 속도로 뤼순으로 회항했다. 그러나 회항 도중에 순양함 바얀 호가 항구 근처에서 기뢰에 의해 파손되었다.
14일 일본군은 러시아군 진지 중앙의 163고지를 3회에 걸쳐 공격했으나 완전히 실패했다. 반면 113고지에 대한 공격은 성공하여 약 13시경 그곳을 점령한 후, 러시아군 진지가 위치한 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석양 무렵 일본군은 산의 일부분을 점령했으나, 정상까지는 점령하지 못했다. 반면 좌측 방어라인에 대한 공격은 포격에 한정되었다.
일몰 후 모든 전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약 22시경 일본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우측 방어라인의 93고지를 점령했으며, 우측 방어라인에서 매우 힘든 상황이 전재되었다. 이에 포크 장군은 24시를 기해 전진기지를 포기하고 볼치예 산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콘트라첸코의 주장에 따라 본 명령은 취소되었다.
야간에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러시아군 4개 중대가 투입되었으나 러시아의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더 이상의 반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콘트라첸코 역시 03시 15분 후퇴명령을 하달했다.
이틀에 걸친 전투와 볼치예 산으로 후퇴 도중에 입은 러시아군의 병력 손실은 약 1,500명이었으며, 일본군의 사상자는 6천 명에 달했다.
볼치예 산은 뤼순으로부터 7~8㎞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약 18㎞에 걸쳐 활처럼 뤼순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원추형 모양의 산이었다. 이 산은 공격 쪽에 불리하도록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방어라인을 목표 삼아 소총이나 대포로 조준 사격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진지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콘트라첸코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스텟셀과 포크 장군은 진지를 보강하지 않았다. 방어라인 앞에 위치한 모든 계곡은 높이 1.5~2m의 수수밭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은폐된 상태로 볼치예 산에 접근할 수 있었다. 7월 15일 저녁이 되어서야 스텟셀은 수수를 제거하라고 명령했지만 광활한 수수밭에 비해 절대 부족했던 작업인원으로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또한 적절한 공병시설도 없었다. 7월 15일에야 부분적으로 참호와 보루가 구축되었으나 그나마 깊지도 않았고 그것들을 연결해주는 교통호마저 구축되지 않았다.
7월 16일부터 이미 일본군은 제4동시베리아보병사단의 전초부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7월 17일 4시 일본군은 모든 방어라인을 상대로 공격을 시작했다. 3시간이 경과한 후 러시아군의 중앙 및 좌측 방어라인이 붕괴되었다. 8시경 포크 장군의 사단이 볼치예 산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약 10시경 제4동시베리아보병사단의 모든 부대가 요새로 후퇴했다.
요새로 후퇴하기에 앞서 러시아군이 전진기지에서 보여준 활약은 주목할 만했다. 5월 12일부터 7월 17일 동안의 일본군의 사상자는 1만 2천 명에 달했다. 반면 러시아군의 병력손실은 약 5,300명에 불과했다. 러시아군이 보다 적극적으로 방어에 임했다면 일본군의 손실이 배가되었을 것이며, 뤼순 근교에서 장기간 적군을 저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군 지휘부의 본질적인 결함이나 전술적인 무능함은 공병분야에서 밝혀졌다. 일본군 참모부에서 뤼순 전투의 전말을 참관한 영국의 군사평론가 노리가드는 의혹에 찬 어투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세바스토폴을 포위 공격할 때부터 러시아 공병은 세계에서 가장 숙달된 부대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토틀레벤 이후 축성술을 무시하는 것 같다. 러시아군은 야전보루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매번 적당한 기회에 사용해 왔다. 그러나 현재 그들의 축성술은 현대적 발전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 라서 수비대가 신형 조준장비가 장착된 장거리포로 무장한 적군을 이길 것으로 기대하기 어려웠다. 러시아군은 대부분의 참호를 산 정상에 구축했다. 따라서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참호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으며, 모든 방향에서 확연히 구분되었다. 심지어 산비탈이나 산기슭에 구축된 참호는 …… 적군의 포화에 대비한 엄폐물도 없었다.
요새 내의 포대 또한 같은 사정이었다. 모든 대포가 엄폐되지 않은 진지에 배치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일본군에 의해 손쉽게 제압된 원인이었다. 통일된 명령체계가 없었던 것 역시 러시아 포병에게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엄폐된 진지에서 효과적인 포격을 가한 야전포대가 큰 활약을 펼치는 경우에만 일본군 보병 및 포병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러시아군이 볼치예 산으로 후퇴한 시점이 뤼순 근교전투의 종결과 직접적인 요새함락전투의 시작을 구분 짓는 기준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