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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일제의 탄압으로 근우회(槿友會) 해체를 끝으로 여성들은 더 이상 국내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이후 여성 활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국내 항일 비밀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국내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활동가들은 대부분 해외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중국 동북항일유격대, 조선의용군, 한국광복군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여성들은 많은 활동을 벌였다.
이중에서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로서 재창설되었다. 여성들도 광복군 성립 초기부터 참여하였다. 지복영(池復榮, 1920~2007)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군이자 여성 광복군이었다.
선생은 1920년 4월 11일(양력)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지청천(池靑天) 장군, 어머니는 윤용자 씨로, 1924년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은 조선 말기 무관학교에 입교, 1913년 일본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19년 3ㆍ1만세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때 이름을 이석규에서 이청천으로 고쳤다. 일본군 현역 군인 출신으로서 탈출하였기 때문에 잡히면 총살이었다. 그래서 성도 모성인 이씨를 따라 이청천으로 고친 것이다.
지복영 선생이 ‘이복영’으로 알려진 것은 고친 아버지의 성씨 때문이다. 지청천 장군은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서로군정서 간부가 되었고, 1921년 자유시사변 후 고려혁명군을 조직한 데 이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1930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1932년 동아혈성동맹 간부, 1933년 한ㆍ중연합군 총참모장과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한국인 특별반 책임자, 1940년 광복군총사령부 사령관으로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8ㆍ15 광복 후 귀국하여 대동청년단 단장, 제헌국회의원, 무임소장관,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지복영 선생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는 1937년 8월 중국 남경에서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및 미주의 몇 단체들이 연합하여 조직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한국광복진선)의 후신이다. 한국광복진선은 창설된 이래 중일전쟁 발발로 제대로 활동을 할 수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임시정부는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을 거쳐 1940년 중경에 정착하였다. 지복영 선생도 남경의 중국 학교에서 수학하는 중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임시정부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떠났다. 그녀는 피난 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면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피난살이로 임시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일항전을 하지 못하자 청년들이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1938년 11월 광서성 유주에 도착하자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조직하였다. 청년 공작대원은 34명이었으며, 이중 여성 대원은 지복영 선생을 포함해 11명이었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한국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의 항일정신과 기개를 선전하고 한국인들에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선전 공작이 중심이었다. 선전활동은 거리 선전, 연예와 항일 연극, 대규모 공연, 합창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여자 대원들 중 미혼 여성들은 어른들의 고루한 생각 때문에 연극과 같은 적극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못했으나, 중국 내에서 이들의 선전 활동은 큰 호응을 얻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5일 중국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7일 중경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총사령관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으며, 총사령부는 약 30여 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때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민영주, 신순호 등이 여성 광복군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주로 사령부의 비서 사무 및 선전 사업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여성들이 여성 광복군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임시헌장 3조에서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함”을 천명하고, 5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유한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유함”이라고 선포하여 남녀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똑같은 권리와 의무가 있음을 밝혔다.
임시정부 헌장에 남녀평등에 대한 조항이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은 저절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는 여성들의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헌장에 명문화는 되었지만,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로 여겼다. 당시 젊은 여성들은 사관학교에 들어가 당당한 군인 장교가 되어 항일투쟁을 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임시정부 측은 부녀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1940년 창설된 한국광복군에서는 여성들도 한국광복군에 참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총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지청천은 “한국광복군은 한국 임시정부에 직할된 한국의 국군이다. 한국 임시정부 본신이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혁명 기관인 만큼 광복군도 당연히 이천만 대중의 공유한 군사 기구가 되는 것이다. 凡韓國革命 남녀는 누구를 물론하고 그의 역사적 사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광복군에 참가할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소유한 것이다”라고 선포하였다.
이처럼 인식이 달라진 것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한국 여성들이 국내외에서 남성 못지 않은 전투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지도자로 명성이 높았던 평북 의주 출신의 조신성(趙信聖, 1873~1953)은 조맹선을 단장으로 하는 대한독립청년단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평남 맹산군 선유봉 호랑이굴을 중심으로 항일 무장 활동을 총 주도하였다. 그는 남성 단원들을 이끌고 육혈포, 탄환, 다이너마이트 등을 품고 생식을 하면서 단원들을 이끌었다.
평남 대동 출신의 안경신(安敬信, 1888~?)은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이 내한하자 국제 여론 환기와 독립 의욕 고취를 위해 평남 경찰국 청사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되었다. 경북 영양 출생의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은 1925년 박청산(朴靑山)과 함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을 암살하려다 만주로 망명한 후, 1932년 국제연맹 조사단의 리튼 경(卿)이 하얼빈에 왔을 때 왼손 무명지를 끊어 ‘조선독립원’이라는 혈서를 쓰고 끊어진 손가락 마디를 함께 싸서 보내어 조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이처럼 조신성, 안경신, 남자현 등과 같이 적극적으로 민족운동을 펼쳤던 여성들, 그리고 국내외에서 항일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가담하여 활동한 여성들의 활약은 남성들에게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을 때 여성들에 대해서도 입대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에 지복영 선생은 광복군 여성 대원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지복영 선생이 한국광복군 여성 대원으로서 활동한 계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녀가 중경에 있을 때였다. 일본군 폭격기가 폭격을 해대자 방공호를 왔다 갔다 하면서 몸을 피신하기를 여러 번 반복하던 어느날, 폭격기의 폭격으로 임시정부 청사 근처의 건물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일로 지복영 선생은 일주일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번민을 했다. 그 후 “학사, 박사가 되면 뭐하겠느냐, 이 전쟁을 하루라도 빨리 끝나도록 하는 것이 제일 급한 일이 아니겠느냐”라고 결론을 내린 후, 광복군 참여를 결심하였다.
선생은 1996년 8월 15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광복군 입대 동기에 대해 “임시정부 헌법이 빈부와 신분의 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특히 남녀평등을 강조한 데 자극받아 미력이나마 일조를 하고 싶어서였지요. 당시 여군에 대한 대접도 좋아 월급도 중국 돈 5원으로 남자들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라고 밝혔다. 아버지 지청천 장군에게도 광복군 입대를 묻자 “조국 독립하는 데 남자 여자 가리겠느냐”며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 길로 지복영 선생은 서안으로 이동하였다.
서안총사령부는 총사령 대리로 황학수, 참모장 대리로 김학규, 그리고 참모조, 부관조, 경제조, 선전조, 편집조 등으로 구성되었다. 각 조의 조원은 1~3명 정도였다. 선전조는 지복영, 오광심, 조순옥 등이 담당하였다. 사령부가 서안으로 이동한 후 군대를 파견해서 전선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군 인원수도 적은데다 장교급만 있고 사병이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급한 일이 선전활동이었다. 이에 적 후방에 있는 교포들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을 알리기 위한 선전 활동으로서 잡지 <광복>을 발간하였다
지복영 선생 등 선전조는 이 사업을 맡아 광복군 총사령부에 <광복> 간행을 위하여 원고 작성과 번역 등에 매진한 결과 1941년 2월 1일 자로 <광복>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한국어본과 중국어본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한국어판 창간호 필자들은 김구 주석을 비롯하여 지청천, 황학수, 김학교, 이복원, 김광, 지복영, 오광심 등이었다.
창간호에서 여성 대원들은 한국 여성 동지들의 약진을 격려하고 호소하는 글을 두 편이나 게재하였다. 오광심은 ‘한국 여성들에게 일언을 들림’이라는 글을 써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여자도 남자와 평등하게 참여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글로 광복군 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남녀평등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단언하였다.
오광심이 광복군에 입대하고 또는 다른 여성들이 입대하기를 희망한 것은 이러한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여성해방을 이루는 길이라는 판단에서 나왔던 것이다.
지복영 선생 또한 ‘대시대는 왔다. 한국 여성 동지들아 활약하자’라는 글에서 한국 여성들에게 광복군 입대를 종용하였다.
지복영 선생의 이러한 글에서는 그동안의 봉건적 굴레에서 신음하던 여성들이 자신을 해방할 수 있는 길은 남성들과 똑같이 민족 전선에서 투쟁하는 길밖에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자신의 원고 이외에도 선생은 김구의 글과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 전문” 등을 번역하여 <광복>에 실었다.
한국광복군의 활동은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첫째 초모(招募, 군대에 지망하는 사람들을 모집함) 활동, 둘째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 등을 통한 교육과 훈련, 셋째 선전 활동, 넷째 인면전구공작대의 파견, 다섯째 한미군사합작과 전략 첩보 활동, 여섯째 국내 진입 작전과 ‘정진대’ 활동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여성 대원들은 남성 대원들과 함께 위와 같은 활동을 하면서 서로 동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의식주 면에서나 훈련 등 모든 면에서 함께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성 대원들은 남성 대원들을 동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남성 대원들도 여성들과 함께 군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했던 김문택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은 동지의식은 지복영 선생의 회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어떤 광복군 남성 대원이 자신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고백하자 “우리가 뭐 이런 시절에 그야말로 내일 죽느냐 모레 죽느냐도 모르는 판에 무슨 결혼이겠느냐. 다 같은 동지로서 손잡고서 조국 광복에나 그냥 힘쓰자.”고 거절했다고 한다. 여성 대원들도 남성 대원들과 똑같은 교육과 훈련을 받고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강화시키기도 했다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했던 김문택은 당시 여성 대원들의 군사훈련을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밝혔다.
위의 글처럼 당시 여성 대원들은 남성 대원들의 역량보다 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지복영의 “이왕지사 내가 나서서 그때 여자 활동이 참 순조롭지 않거든요. 않았는데 이왕지사 나섰으면 내가 남한테 욕은 먹질 말아야 되겠다… 아 여자가 활동하면 그저 그렇지… 나중에는 손가락질은 받질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에 아주 결심을 단단히 했거든요.”라는 회고에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광복군 활동 초기 여성 대원들의 군복은 상의는 남자와 같았으나 하의는 치마였다고 한다. 모자도 남자는 챙 있는 군대 모자와 배 모양으로 된 것을 썼는데 비해, 여성들은 모두 배 모양의 것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 여성들도 남성들과 똑같이 바지를 입었다고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초기에는 여성들의 숫자가 얼마 안 되어 전투를 할 만한 조건이 안 된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에 많은 여성들이 입대하여 남성들과 똑같이 활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군복도 똑같이 입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복군의 총인원 수는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1977년 ‘광복회’에서 조사 한 바로는 755명으로 되어 있다. 총사령부 95명, 인면(人緬)전구공작대 9명, 보충대 44명, 1지대 64명, 2지대 233명, 3지대 235명, 9전구 75명 등이다. 그러나 이 통계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광복군 제3지대 제1구대장을 지냈던 박영준에 의하면 1940년 성립 당시 광복군의 총 숫자는 남녀 포함해서 70명 정도였는데, 1945년 전쟁 말기에는 700명에서 800명 정도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부들을 제외한 일반 대원들은 중국의 면적이 너무 넓고 통신 시설이 제대로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 지대의 숫자는 알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해방이 되자 광복군 숫자가 가속적으로 증가했는데, 그것은 점령구에 있던 사람, 징용자들을 모두 포용하라는 사령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와 함께 한국광복군 자료를 소지하고 있던 지청천이 한국전쟁 당시 이를 모두 소실해 버렸기 때문에 현재까지 광복군의 총 숫자는 정확하게 밝혀질 수 없었다. 현재 광복군의 총 숫자는 상기와 같이 7백 명에서 8 백명, 혹은 1천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광복군 성립 초기에 참여한 여성들은 총 6명으로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등이었다. 그런데 이후에 여성 대원들이 많이 증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말기 여성 대원들은 각 지대별로 30여 명씩 있었다고 한다. 이 숫자는 1967년 8월 12일 <대한일보>가 개최한 좌담회에서 여성 대원이었던 김효숙이 “광복군의 정확한 숫자는 비밀로 되어 있었으니까 잘 모르겠는데, 여자 대원은 각 지대에 30여 명씩 있었던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여성들이 광복군에 입대해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서 조금이나마 자료가 남아 있는 여성 대원은 약 20여 명 정도인데 모두 국가보훈처에서 국가유공자로 포상 신청을 한 인물들이다. 대체로 미혼의 여성들이 많았다. 광복군의 특성상 남성들과 함께 숙식을 하며 훈련을 해야 되는 등 기혼의 여성으로서는 어려운 일이 많았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웠던 미혼의 여성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혼인 경우는 민족이 독립을 하면 가족과 만나서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에 더욱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서안총사령부 설치 후 광복군은 적 후방 공작 사업을 구체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처음에 3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그 후 1941년 1월 서안에서 무정부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제5지대로 편입하여 4개 지대로 편제되었다. 다시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편입으로 지대가 편제되었다. 제 1지대장 김원봉, 제2지대장 이범석, 제 3지대장 김학규, 제5지대는 2지대와 합편하였다. 각 지대에는 지대장과 그 수하에 7~8명의 간부 대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김학규의 제 3지대에는 대원 6명 중 절반이 여성 대원이었다. 지복영 선생은 오광심, 오희영과 함게 제 3지대에 속하였다. 지복영 선생은 평소 아버지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너는 대한의 잔다르크가 되라”고 들어왔던 터라 최전선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지청천 장군에게 허락을 받지 않고 자원했다. 그러자 대부분이 여성이 적후방으로 가면 위험하다면서 총사령관이 알면 큰일 난다며 선생을 말렸다. 이에 지복영 선생은 밤새도록 편지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냈다. 지청천 장군은 “좋다. 잘 생각했다. 내가 남의 자식도 보내는데 내 자식이라고 금지해서 못 보내겠느냐. 잘 생각했다.”라고 답장했다. 아버지의 답장을 받은 지복영 선생은 부양으로 떠났다.
산동을 향해 진군하던 김학규의 제3지대는 산동 정세가 급박해지자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휘성 부양에 제 3지대 본부를 설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기까지 본부는 4년간 이곳에서 지하공작을 하였다. 지복영 선생은 오광심, 오희영과 함께 남자 광복군 대원들과 똑같은 임무를 받고 초모 활동을 하였다. 지복영 선생은 낮에는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고, 밤에는 광복군 초모 사업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선생은 부양에 온 지 1년 1개월 만에 병이 나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경으로 돌아갔다. 몸이 회복된 후인 1943년부터는 임시정부 외무부로 차출돼 중국 방송을 이용해 한국인 학병들의 탈출을 권유하는 일을 맡았다. 1945년 광복군 총사령부 편대를 재편성했을 때 지복영 선생의 직책은 소령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선생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