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6 - 메이지 유신의 출발점이라는 신사쿠가 거병한 고잔지 절에 가다!
시모노세키 역 광장 1번 노리바(정류소) 에서 죠후(초후) 長府(장부) 행 버스를 타고 오른쪽에
간몬 해협 을 끼고 30분을 달려서 죠카마치 죠후 城下町長部 (성하정장부) 에 내립니다.
조거전 통리 도로를 걸어서 번주 모리씨 를 모신다는 이미노미야진자 忌宮神社 를
보고 골목을 걸어 노기장군 을 모신다는 노기 진자 乃木神社(내목신사) 로 갑니다.
러일전쟁의 주역인 노기 마레스케 는 1868년 메이지유신 무진전쟁때 조슈군으로 참전해 에도
바쿠후(막부) 군과 싸웠으며 청일전쟁 때는 여단장으로 출전한후 대만총독을 역임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때 2월 8일에 일본 함대가 여순을 기습공격해 군항을 봉쇄하고는 인천
에서 러시아 군함을 격침 시켰으며 일본군은 5월 요동 반도 상륙을 시작하였고 조선
에서 북진한 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진입하해서는 9월에는 랴오양 을 점령합니다.
여기 조슈번(야마구치) 출신 노기 장군 이 지휘한 일본군 제3군은 치열한 여순 전투 를 벌여서
천신만고 끝에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시키는데...... 이 전투를 포함해
주변 전투에서 휘하 병력 13만명 중 5만 9000명을 희생 시키고 자기 아들 두명도 전사합니다.
이후 3월에 조슈번 출신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 가 지휘하는 일본군 25만은 러시아군 37만
에 승리하지만.... 원거리라 보급이 힘드니 탄약이 떨어져 백병전으로 무려 7만명이 전사 합니다.
1592년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군은 원거리라 보급으로 재정이 파탄난 것과 흡사합니다.
러시아 함대는 발트해를 나와 스페인을 지나 수에즈운하 로 들어가려다가 영국 해군의 제지 를
받고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을 거쳐 중국해를 헤쳐 오는..... 반년 동안 영국
의 방해로 석탄과 식수 및 식량 보급외에 수병이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는등 기진맥진했습니다.
조선 진해 에 대기하던 사쓰마 출신 도고 헤이하찌로 제독 은 출항해 1905년 5월 27일
14시에 연합함대의 기함 미카사호에 "Z기" 를 게양하는데 이는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하라." 라는 의미를 가진 신호기 라....
거리가 8,000미터가 되자 기함 미카사는 러시아함대 앞을 좌현으로 도니 "정(丁)자 전법" 인데...
러시아 함대는 침몰 21척, 나포 6척, 도망 9척에 전사 4,800명 포로 6,100명 인데 비해
일본함대는 침몰 3척에 전사 120명 및 부상 580명이니 근대 해전 역사상 최대의 승리를 거둡니다.
한편 육전에서 노기장군 은 쓰시마 해전에 비견되는 여순전투 에서 승리하여 러일전쟁을
승전으로 이끌었으나 많은 부하를 죽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해 "할복자결" 합니다!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부하를 죽인 책임 을 진 것 입니다!
재일교포 작가 윤달세 씨는 그의 저서에서 노기 대장의 선조를 임진왜란 때 잡혀온
수만명에 달하는 조선인 중에 한사람이라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으니....
그 조선인이 다지마의 일본인 사사키씨 의 눈에 들어 사위 가 되니 소생인
冬糾(동규) 의 손자 瑞昌(서창) 이 의사가 되어....조슈번
노기 마을에 근무하면서 성을 "노기" 乃木(내목) 라고 바꾸었다고 합니다.
다시 골목길을 걸어서 나가야 長屋 ( 장옥, 사무라이 주택) 에 이르러 죠후(초후)
번주 모리 저택 長府 毛利宗家故居 이며 죠후 정원 長府庭園 을 구경합니다.
우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 화폐 가 발견된 가쿠온지 覺苑寺(각원사) 절을 보는 대신에....
가장 오래된 선사양식으로 국보로 지정된 고잔지 功山寺(공산사) 를 먼저 보기로 합니다.
1864년 12월 16일 조슈번 (야마구치현) 의 다카스키 신사쿠 는 막부를 무느뜨리고 일왕(천황)을
옹립해 서양 오랑캐를 몰아내고 새 일본을 세우는 "존왕양이를 실행하는 반란" 을 일으킵니다.
불과 80명의 동지 로 이 절 고잔지 功山寺(공산사) 에서 기병한 것인데 우선적으로는 친막부파가
집권한 조슈번 4천명 을 이겨야 하고... 그 다음엔 막부군 10만명 을 물리쳐야 성공하는 것이지요?
이토 히로부미의 30명과 이시카와, 다카하시, 구마타로 50명등 불과 80명 병력으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존왕양이파 공경으로 교토에서 조슈로 피신한
산조 사네토미 가 아무래도 불안한지라 “신사쿠 자신있느냐?” 라고 걱정스레 묻자....
“지금 성패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 조슈 남아의 기백 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용사는 불망상기원
한다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며 말에 채찍을 가하고 뛰쳐나갔던 것인데.... 모두들 도쿠가와
막부와 조슈번병 4천명을 두려워하니 병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30명을 포함해도 80명에 불과했습니다?
다카스키의 반란군이 시모노세키를 점령 하자 눈치를 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합류해
300여명 으로 3,700명의 조슈번병을 치는 어려운 전투에서 기적 처럼 거듭 승리 해
조슈번을 장악 하고는 1866년 5방면으로 공격해온 10만 막부군의 2차 정벌 도 물리칩니다.
1868년에 조슈번은 사쓰마번(가고시마), 히젠번(사가) 및 도사번(시코쿠) 과 함께 무진전쟁
반란을 일으켜 메이지 유신 을 이루니 一鞭回天 明治維新 ( 일편회천 명치유신 )
그러니까..... 한번 말을 박차고 나가 형세를 일변시켜 메이지유신 을 이루다 라는 뜻입니다!
이후 일본인에게 저 다카스키 신사쿠의 일화에서 유래한 잇쇼켄메이 (일장현명, 一所懸命일생현명 )
라고 해서.... 세 불리 해도 최선을 다한다는 본보기 가 되었던 것이지요. 몇십년전이던가요?
1983년에 재일교포 조치훈 이 일본바둑 3대 타이틀을 차지하고는 "목숨을 걸고 둔다" 라고 말했지요?
1865년 1월 다카스키 신사쿠 는 쿠데타 성공후 희생된 병사들 을 위해 招魂社(초혼사)
를 세우니..... 바로 사쿠라야마 신사 로 1872년 메이지 일왕(천황) 도 참배합니다.
존왕양이파 스승인 요시다 쇼인 과 병사들에 후일 다카스키 신사쿠등 396위 가 모셔지는데
메이지 유신후 일본 신정부에서 이를 본떠 옮겨 만든게 바로 도쿄 의 야스쿠니 신사 입니다.
1879년에 여기 야마구치현 의 사쿠라야마 신사 에서 존왕양이론의 창시자 요시다 쇼인
과 제자 다카스키 신사쿠의 영령 을 도쿄 야스쿠니 신사 로 모셔갔던 것이니....
아베 신조 총리 에게 정신적 지주 인 요시다 쇼인과 다카스키 신사쿠 를 모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하라는 것은 그의 정체성 을 말살
하는 것이니.... 살아도 죽은 목숨 이라 "식물인간" 이 되라는 요구인 것이지요!
영국등 4개국 해군의 시모노세키 공격 을 방어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쓰러뜨리는데 온
힘을 바친 때문인지, 28살의 젊은 나이에 폐병이 든 풍운아 다카스키 신사쿠 가
요양을 위해 절에 들어갔는데..... 그는 죽음을 예감 하고 絶命詩(절명시) 를 짓습니다.
“재미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라는 구절이 떠올랐는데 마무리 지을 말 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자....... 시중을 들던 비구니 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라고 거들었다나요?
재미있을 것도 없는 세상을 재미있게
생각하려는 마음은, 있다가도 없는 것.
おもしろき こともなき世を おもしろく / すみなすものは 心なりけり
그런데 다카스키 신사쿠 가 반란의 발진 기지 로 여기 고잔지 功山寺(공산사) 를 택한
것은 존왕양이파 공경 5명 이 교토에서 쫃겨나 이 절에 피신해 있었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인 에게도 여기 절은 유서깊은 곳 이니.... 1557년에
고잔지 바로 이 절에서 백제계의 마지막 핏줄 이 끊어졌던 것이지요.
백제 성왕 의 셋째아들 임성 태자 는 611년 야마구치현 동부 스오쿠니(周防國 주방국)
다타라하마 (多々良浜) 에 상륙해 쇼토쿠 태자 를 만나고는 다타라 성씨 를 칭합니다.
그 16대 후손 모리후사 는 세력을 길러 성을 오우치 大內(대내) 로 바꾸고는
서부 일본 4국에 북규슈 2국등 6개국 을 지배하는 대영주(슈고) 가 됩니다.
고려와 조선 에 사신을 파견해 왜구를 소탕해주는 대거로 불경 을 얻어가고 무역까지 했는데
조선왕조 실록 에는 大內殿(대내전) 이라는 이름이 무려 248회 나 나옵니다.
오우치씨는 또 명나라 닝보(영파) 에도 무역선을 보내 일본과 중국의 무역을 독점했습니다.
야마구치 시내에 류리코지 (瑠璃光寺 유리광사) 절은 백제계 오우치씨 가 세운 절로
히노키피즙을 입힌 5층탑 은 일본에서 3대 명탑에 속하므로 국보 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30대 오우치 요시오키 는 서부 일본 나가토, 스오, 이와미, 아키에 북규슈 치쿠젠
(후쿠오카) 과 부젠에 야마시로(교토) 까지 점령하여 모두 7국을 지배 하며...
교토로 올라가 무로마치 막부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 를 옹립하고 위세를 떨칩니다.
31대 오우치 요시타카 는 빙고(히로시마) 를 거두었으나 교토 정치에 집중 하다 보니
이즈모 아마고씨 의 침략을 받아 패전하고 쓰키야마 저택에서 시와 유희 에 빠집니다.
“연못은 바다요, 나뭇가지 끝이 여름엔 산이구나”
池はうみ こずえは 夏のみ 山かな
문인, 묵객과 미녀 들에 둘러쌓여 시와 유희로 정사를 소홀히 하니 중신 스에 다카후사 가
모반을 일으키자 패하여 할복자결하는데, 그전에 문답한 내용이 전하니 타이네이사
주지 이세츠 가 “ 죽음을 앞두고 무념 무상 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라고 진언하자....
“뭐가 어떻게 되든 좋습니다. 지금은 마음속 하늘에 달 이 보입니다” 라고 달관하니...
훗날에 이르러 세인들로 부터“말세의 수행자” 라는 평을 얻는데,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 에게 야마구치 백성들에게 예수교 전도 를 허락한 연유를 알만합니다!
대영주 오우치 요시타카 는 할복하기 전에 절명시 를 남겼으니....
“죽이려는자도 죽는자도 모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구나, 부처가 세상을 구하려고 오는 것 또한 이와 같다”
討つ人も 討たるる人も 諸共に如露如電, 應作 如是觀
요시타카 가 죽으니 새로 옹립된 군주는 오우치 요시나가 인데.... 오우치가의 막장인
모리 모토나리 가 이 혼란을 틈타 거병하니 모리군에게 쫃기어 1557년에 여기
고잔지 功山寺 로 피신했다가 할복자결 하니 백제계 오우치가 후손이 멸절 되었던 것이지요!
오우치 요시나가 도 죽으면서 5,7,5 조의 하이쿠로 된 절명시(絶命詩) 를 남깁니다.
( 誘ふとてなにか恨みん時きては 嵐のほかに花もこそ散れ )
*** 첫째줄 6번 도요토미 히데요시, 둘째줄 4번 오다 노부나가, 5번 모리, 넷째줄 1번 시마즈, 6번 도쿠가와 문장
데려간들 무엇이 원망스러우랴 갈 때가 된 다음에야,
폭풍이 몰아치는 사이 다른 곳에는 꽃 또한 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