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좋음의 명칭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행복, 에우다이모니아라고 말한다. 행복과 에우다이모니아는 차이가 있다. 행복은 심리적인 상태로 생각되어지는 어떠한 감정인 것이다. 하지만 에우다이모니아는 상태가 아니다. 그리고 에우다이모니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감정으로써 행복은 에우다이모니아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의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들의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그러한 견해를 모두 고려하지는 않는다. 대신 대중적인 설명을 검토해 볼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을 고찰하면서 거부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가장 완전한 목적이고 자족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완전한 목적은 그 자체를 위한 추구이며 다른 것을 위한 추구의 목적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돈이 에우다이모니아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돈 그자체로 완벽한 추구의 목적이 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족적인 것이라 함은 어떤 종류의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해 실질적으로 설명할 때 에르곤, 삶의 특정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해야 하는데, 영혼은 형상에 의해 결정되는데 형상은 유기체가 구조화되는 방식에 대해서만 사용한다. 인간의 에르곤이 영혼의 이성을 가진 부분의 활동임을 알아야 한다. 감정이나 욕구는 인간의 고유의 성질이 아니지만 사고는 인간의 고유한 것이다. 감정과 욕구는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에 복종한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유쾌한 것이 될 수 는 있지만, 유쾌함을 추구하는 것 이 에우다이모니아가 아니다. 에우다이모니아는 배움과 습관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연 역시 몇가지 역할을 하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연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소수이며 그것이 얻어지는 방식은 아니다. 에우다이모니아를 통제하는 것은 탁월성을 갖춘 활동들의 수행이다. 탁월성이란 어떤 사람의 품성의 안정된 상태이다. 에우다이몬인 사람은 한계에 부딪쳐도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비참한 사람은 가증스럽고 비열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 불가능하다. 명예로운 것이지만 칭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장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 가능한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영혼의 가장 훌륭한 활동이 에우다이모니아의 구성요소 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을 보면 에우다이모니아에 대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나는 행복이라고 이때까지 알고 있었지만 행복과는 많이 다른 개념이었다. 행복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말하지만 나의 행복은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는 어떠한 자신만의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인 개념으로써의 행복이 나에게는 더 크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에우다이모니아의 상태가 아니란 개념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마다 다른 에우다이모니아를 고려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에우다이모니아는 무엇인가? 읽어보아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행복, 최고 좋음의 상태는 무엇일까. 우리가 신을 칭송할 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놀랍다. 왜냐하면 신은 비교 대상이 없는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라는데, 그렇다면 신이 우리가 알고 있는 최고 좋음이라는 것이란 이야기인가? 우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부를 때 하느님 아버지, 라는 말을 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완벽한 하느님에게 여성성은 없는 것인가?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말을 칭할 때 절대 아버지의 형상이나 아버지의 모습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양성성을 구비하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성이 지배해온 세계관에서는 이러한 것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은 바뀌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남자가 아니다. 하느님을 마치 남성처럼 그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완벽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에우다이모니아가 어떠한 것의 좋음을 나타내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것을 명확하게 규정해 놓고 있지 않다. 최고 좋음, 자족적인 것, 그런 것이 어디에 존재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사상을 까면서 나왔다는데,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는 많이 달라야지 않을까? 탁월성에 통제되는 행동이라고 말하는데, 탁월성이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탁월성에 대해 이해 갈만한 예가 없다. 탁월성이란 품성의 안정된 상태인데,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품성이 안정되었다는 것은 마음에 빚이 없는 상태란 말이라는데, 그렇다면 그게 무엇인가. 어떠한 행위를 할 때, 전혀 거리낌 없이 행하고 마음속에 어떠한 의심이나 의혹의 불씨가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전혀 안 느끼고도 많은 죄를 저지른다. 심지어 그게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
품성의 탁월성은 도덕적인 탁월성이나 사유의 탁월성 영역보다 더 큰 영역이다. 품성의 탁월성은 습관을 통해서 얻어진 품성상태이다. 이말은 습관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습관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탁월성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지만, 선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태어나기도 한다. 품성의 탁월성은 탁월성을 갖춘 행동들의 반복적인 수행을 통해서 습관화 된다. 모자람과 지나침 사이에서 중용의 덕을 택해야만 품성의 탁월성을 수행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품성의 탁월성이 올바른 것들로부터 즐거움을 얻고 잘못된 것들로부터 고통을 당하는 일을 통해 습관화 된다고 본다. 어떤 사람이 탁월하게 행동할 때, 그는 즐겁게 행동하며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탁월성은 선호도와 갈등을 빚는 것이 아니다. 실상 그 행동은 그 사람의 선호도의 표현이다. 고통스러운 행위를 유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탁월성을 갖춘 사람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의 고귀함이다. 여기서 엥크라테스, 자제력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탁월성을 갖춘 사람과는 다르다. 엥크라테스와 달리 탁월성을 갖춘 사람은 영혼 속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 탁월성은 품성상태 또는 경향성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인간의 탁월성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우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우리의 기능을 잘 실행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 상태로,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에 의존한다. 중용은 두 결함, 즉 지나침에 따른 결함과 모자람에 따른 결함 사이의 중용이다. 비록 탁월성은 습관화된 품성 상태이지만, 그것들 자체는 습관이 아니다. 습관은 분별없이 또는 사고하지 않고 실행될 수 있다. 그러나 탁월성을 갖춘 행위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상황 속에서 행동하려는 가장 최선의 일에 관한 행위자의 판단의 표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간적인 품성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몇 가지 충고를 해준다. 우리가 자신의 경향성을 발견하고 우리 자신을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야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모든 것에 즐거움을 경계해야한다는 것이다. 절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2권 읽다가 고귀한 사람은 한 가지 방식으로 고귀하고, 나쁜 사람은 여러 가지 나쁜 방식으로 나쁜 법이다. 라는 구절을 읽었다. 이 구절은 안나 카레니나라는 러시아 소설의 첫 구절로 유명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똑같은데,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각자의 이유가 있게 불행하다 유사하다. 톨스토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직접 받았거나, 아니면 삶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게 쓴 것이 아닐까? 우리 삶은 좋은 것은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란 지나침과 모자람 사이의 중용을 말하는 것이다. 중용이라고 해서 중간, 회색 이런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끈을 두 가지를 잡고 있다고 치면 하나로 치우치기 쉽지 어느 하나라도 놓지 않아서 마음을 조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의 경향성은 오히려 최고 좋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안위나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경향성을 살리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어떤 덕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습관과 배움을 통한 교육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러한 선천적인 면을 그렇게 강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선천적인 것보다는 내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말미암아 최고 좋음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내 마음속에 최고 좋음을 향해 가는 길이 들어있다고 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에우다이모니아를 추구할 때 탁월성을 가진 사람은 유쾌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것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은 경계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최고 좋음을 위해 얻어지는 어떠한 즐거움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취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즐거움을 경계하라는 말이 육체적인 것에 한정되는 것인지도 아직 잘 이해를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