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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묵상글 ( 연중 제16주일. - 우리는 의인입니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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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는 의인입니까?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밀과 가라지로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찌 악이 있는지,
하느님께서는 선이시고 사랑이신데 어찌 악이 있고 악인이 있는지,
이런 악인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의 문제를 밀과 가라지의 비유로 답하시는 겁니다.
우선 가라지 곧 악한 사람이 어떻게 있게 된 것인지에 대해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잠자는 사이에 원수가 와서
밀 사이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라고 비유하십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원수를 악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신이 따로 있다는 이원론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원수는 굳이 악신이 아니라 악령이나
악의 세력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얼마든지 원수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나를 악령으로 만들지 않으셨고,
우리 부모가 나를 악인으로 낳지 않으셨지만
우리의 부모가 잘못 양육하여 악하게 되고
내가 잘못하여 악하게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말에 ‘못난 놈’이니 ‘못된 놈’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악인으로 잘 못 태어난 놈이 아니라
태어난 후 성장 과정에서 잘못된 놈이라고 함이 맞을 겁니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그리고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가라지
곧 악한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고 악한 사람이 된 것인데
오늘 주님께서 비유로 정작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 있는 악한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그 사람을 즉시, 즉시 제거할 것인가? 그대로 놔둘 것인가? 그 점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럴 능력도 없고 자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밀과 가라지를 구별할 능력도 솎아낼 능력도 부족합니다.
언젠가 수도원 초자에게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라고 했더니
잡초는 놔두고 잔디를 다 뽑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지요.
우리는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까지 뽑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라지를 솎아내지 말아야 하는 더 큰 이유는
그럴 자격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가라지이고, 앞서 봤듯이 우리가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죄인 아닌 사람이 어디 있고 악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를 보면 검찰 공화국이고,
더 나쁜 놈들인 검찰이 자기 입맛대로 기소하고 그래서 공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 정권에서도 자기들 입맛에 맞지 않으면 솎아내려고 했고,
인간은 이토록 그럴 자격이 없는 곧 자기도 죄인인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을 어떻게 하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느님 소관이고,
하느님께서는 종말까지 그 문제 해결을 유보하신다는 것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이에 대해 오늘 독서 지혜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심으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렇게 하시어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당신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 자녀들에게 안겨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너그럽게 심판하실 뿐 아니라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에 당신이 정하신 때까지 최대한 심판을 늦추십니다.
우리는 의인입니까?그렇다면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시며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는 감사해야 함은 물론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함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함부로 내가 악인들을 심판하겠다고 나대지도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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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참된 본질을 밝히 드러내어 주십니다.
참된 본질에 접근하는 데는 다음의 세가지 방법이 주로 사용됩니다. 경험적 접근, 논리적 접근, 은유적 접근 즉, 시적 접근 그리고 종교적인 방법으로서의 비유의 접근입니다. 경험적 접근은 낮의 접근과도 같습니다. 낮에는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산과 강의 경계며 흰색과 붉은 색이 구분이 선명합니다. 도처에서 구분과 차별을 보게 됩니다. 논리는 밤의 접근과 같습니다. 그 어떤 경험이 뒷받침도 없이 짐작으로써 추론으로서 어둠 속을 더듬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종교적 접근은 황혼의 접근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밤은 오직 오지 않고 낮은 아직 기울지 않은 그 중간의 접근입니다. 황혼은 그 너머에 알 수 없는 그 본질의 동경을 지니게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본질은 시적인 은유와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됩니다.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는 비유의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비유적 의미는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정화시키며 우유적 의미는 명료한 이해력을 갖도록 빛을 비추어 주며 영적의미는 영의 황홀과 지혜에 대한 즐거운 인식을 통해 완성시킨다’고 성 보나벤뚜라는 말합니다. 이에 근거해서 오늘 복음은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자유와 완덕으로 나아가도록 초대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 안에 가라지와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나 욕정 그리고 자신의 약점과 잘못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이런 부정적이고 나쁜 것들을 드러내지 않고 홀로 감당하고 억제합니다. 그러나 억제하면 언젠가는 폭발하게 됩니다. 자기 내면에 일어나는 나쁜 생각을 자신이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솔직히 드러내어 보이거나 고백성사를 보는 것이 위험과 파멸을 막아줍니다. 불결한 생각들이 위협하면 감추지 말고 즉시 온전히 자신을 열어 보이는게 좋습니다. 생각을 감출수록 더 복잡해지고 끊이지 않습니다. 숨은 데서 기어 나왔다가 들키면 금방 달아나는 뱀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열어 보이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벌레가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듯이 나쁜 생각은 마음을 파괴합니다. 생각을 열어 보이는 사람은 즉시 치유 받고 감추는 사람은 교만에 병들게 됩니다. 나쁜 생각과 감정은 영혼을 파먹는 벌레에 비유됩니다. 우리가 진솔하게 열어 보여 그 벌레를 뱉어 내면 영혼은 치유되고 자유와 기쁨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다음의 일화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도원 형제들이 매우 거룩하여서 마귀들은 자기들이 들어갈 만한 형제는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마귀들이 끈질기게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중에, 형제 하나가 다른 형제에게 마침 분노를 품고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그를 고소하고 복수할까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쁜 생각 속에 마귀는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으므로 수도원으로 뚫고 들어가 그 형제의 목덜미에 웅크리고 앉았습니다. 항상 깨어 자기 양떼를 보살피고 있는 인자스러운 목자 성 프란치스코는 마치 늑대가 들어와 자기 어린양을 잡아먹으려 하는 것을 눈치채고, 그 형제를 불러서 그를 마귀 손에 넘어가게 하는 마음속에 품고 있는 증오의 독을 즉시 참회하도록 하여 영혼을 정화시켜 자유와 완덕의 삶을 살도록 해 줍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자유와 기쁨의 하늘나라의 체험을 위해서는 우리 안에 자리잡은 나쁜 생각, 감정, 분노 등의 가라지 같은 독소들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주님의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몬카다(Moncada)의 성체기적
스페인 - 1392년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어린 이네스가 미사성제에 참석하기 위하여 성당에 찾아왔을 때 신부는 세 개의 똑같은 성체를 제단으로 가져왔다.
성찬의 전례에서 그는 단지 두 개의 성체만을 변화시키고 세 번째 성체는 처음부터 변화를 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거룩한 영성체에서, 변화된 두 개의 성체중 하나만 영하고 나머지 하나를 앞의 제단에 있는 변화하지 않은 성체 옆에 나란히 놓았다.
이제 사제는 이네스를 제단으로 부르더니 두 성체를 가리키면서 물었다.
“지금도 아기예수님이 보이니?"
그러자 그 어린아이는 작은손가락으로 변화된 성체를 가리키고 매우 기쁨에 차서 외쳤다.
“네! 이 성체에서 아기예수가 보여요. 하지만 다른 성체에서는 볼 수가 없어요 아이 귀여워라!"
이제 사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고, 또 의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이 뚜렷한 기적을 통해서 영혼의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주신 아기 예수님께 깊이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이네스는 후에 수녀원에 들어가 그 사랑스러운 아기예수께서 그녀를 영원한 성탄의 기쁨이 있는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때까지 경건하고 엄격한 통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다.(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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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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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연중 16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중에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들었고, 오늘은 “가라지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보물의 비유”와 “진주의 비유”와 “그물의 비유”를 듣게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통치하시는 지를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지혜 12,18)고 말씀하십니다.
<제2독서>에서는 “성령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를 위하여 간구”(로마 8,27)하심을 말해줍니다. 곧 ‘나약한 우리를 도우시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모르는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시며’(로마 8,26)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는 한 사람 한 사람 마음 안에서 혹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성장하는지에 대한 말씀입입니다.
먼저,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는 선포되고 받아들여지는 순간에는 하찮은 것 같지만,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25)
이는 우리 안에 “하늘나라”라는 씨를 뿌려놓았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나라의 씨앗이 뿌려진 밭이요, 우리의 삶이 하늘나라의 농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농장을 일구는 농부입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겨자씨’는 유다문학에서 ‘작은 것’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그러면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그처럼, ‘누룩’이 부풀어 빵이 되고, 빵은 많은 이들을 먹여 살립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오히려 가장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겨자씨’의 모습, ‘누룩’의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 나라는 겸손한 방식으로 시작되고 우리 마음 안에서 조용히 자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나라는 세상으로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더 중요한 사실은 하늘나라의 ‘겨자씨’는 이미 나 자신이라는 ‘밭’에 뿌려졌고, ‘누룩’은 나 자신이라는 ‘밀가루’에 넣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이제 밭에 뿌려지고, 밀가루 안에 넣어진 이 “하늘나라”를 잘 가꾸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비를 뿌리시어 씨앗이 돋게 하시고, 바람을 불게 하시어 싹을 틔우시고, 햇살을 비추시어 튼튼하게 자라게 하시고, 꽃을 피우시고 열매 맺게 하십니다.
또한 밀가루에 누룩을 물로 섞으시고 온도를 맞추시어 부풀리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 나라가 세워지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나아가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닐 것입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내 안에 뿌려진 이 “하늘나라”의 씨와 누룩이 잘 자라도록 정성과 열성을 다해 돌보는 일입니다. 그것은 열심히 사랑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밭에는 나쁜 씨도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안에는 온갖 나쁜 생각, 온갖 악한 생각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또한 세상에도 온갖 불의와 부정과 부패, 온갖 악과 부조리가 어디든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우리는 곧잘 좌절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인내심이 끝없으신 하느님께서는 내 안에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계시듯이, 세상 안에서도 가라지들이 함께 자라는 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방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가라지들이 판을 친다하여도, “하늘나라”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라지들이 기승을 부린다하여도, 결국 “하늘나라”는 성취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면 내가 그것들을 한 데 모아 불살라버릴 것이니, 너희는 열심히 “하늘나라”를 가꾸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바로 나에게 하늘나라의 씨앗을 뿌려서 세상에 가라지들 가운데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죄인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주고, 의인에게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함’(지혜 12,19 참조)을 지혜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 안에는 여전히 가라지들이 섞여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도, 세상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마저도 가라지들이 섞여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결국 어둠 속을 파고 들 뿐, 어둠이 결코 빛을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오히려 물러갈 뿐입니다. 물론 저항하거나 공격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빛을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가라지가 지금 뽑혀지지 않는다 해도, 결코 협조하거나 방조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가라지를 뿌리 뽑을 수는 없을지라도, 가라지가 번지는 것을 막고 선을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교회는 온 세상을 향해 뿌려진 하늘나라의 “씨앗”인 까닭입니다. 씨앗은 열매 맺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가라지가 이 세상에 판을 친다 해도, 결코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가라지들이 마구 기승을 부릴수록, 촛불을 켜들고 세상이라는 밭을 밝게 밝혀야 할 일입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촛불은 등불이 되고, 등불은 횃불이 되어 타올라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입니다.”(마태13,4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태 13,31)
주님!
제 안에 넣은 누룩이 제 속을 파고들게 하소서!
섞여들지 못한 까닭에 부풀어 오르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 뿌려진 씨를 묻어두고만 있지 않게 하소서!
죽지 못한 까닭에 싹을 피우지 못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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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인내하시는 모습입니다.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으시고 추수 때까지 밀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것은 곧 심판 때까지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머물 수 있기를 바라시는 애절한 사랑입니다. 이 시간 인내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인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 비해서 더 모범적인 삶을 살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다 양심적이고 올바르고 모범적인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지 않고,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래서 상처받고 신앙생활을 멈추고 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미운 사람이 보기 싫어 다른 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 가 보면 또 거기에도 여전히 그런 사람은 있습니다. 뭐 피하려다 더 큰 골치덩이를 만나기도 합니다. 산 너머 산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하고 마음을 키우게 됩니다.
맘 맞는 사람끼리 모여서 무슨 일을 하면 재미있다고 합니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 보면 서로의 속을 보게 되고 마음 상하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서로의 열심히 달라서 비교하게 되고 열심히 하지 못하는 상대를 보며 못마땅해하고 속상해합니다. 내가 커지지 않는 한 불평불만의 요소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웃과의 관계에서 마음으로 불편함이 있다면 상대를 탓하기 전에 내 마음단속을 먼저 해야 합니다.
MBTI라는 성격검사 유형이 있는데 검사의 결과물을 가지고 같은 성향끼리 모여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내가 싫어하고 못마땅해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의 그룹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이 볼 때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 흉이나 보고 험담하고…뒷담화를 한 것입니다. 상대를 통해서 나의 속을 보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챙겨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만 모아 놓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은데 오히려 다시 그 맘 맞는 사람들 중에 맞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인생 여정의 한 법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모두가 완벽하지도 않고 나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가라지’이고,‘나는 밀’인양 ‘이렇다’‘저렇다’ 상대를 판단하게 됩니다. 만물을 돌보시는 하느님 말고는 심판할 수 없음을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부디 하느님행세를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살다 보면 착한 사람에게는 무엇이 잘 안되고 악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잘 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못된 사람을 왜 그냥 두시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선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밀과 악한 사람으로 비유되는 가라지에 대해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하십니다.
왜 그냥 두실까요? 1).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이 잘못했으면 즉각 벌을 내리기를 바라지만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참아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할 것입니다. 그래도 거두어 낼까요? 뽑아버릴까요? 여러분이나 저나 잘못을 했을 때 즉시 벌을 내리셨다면 여기 이렇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회개의 기회, 은총의기 회를 주실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1독서 지혜서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때에 하실 능력이 있으시지만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 당신의 완전한 권능이 불신을 받을 때만 힘을 드러내시고, 너그럽게 심판 하시며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니 악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2,9). 세상이 변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늘 하느님을 향해야 합니다.
2). 의인들에게는 단련의 시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금도 불에 달궈야 순금이 됩니다. 시련과 역경을 통해 단련되고 강해지게 됩니다. 악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좋은 길로 인도하도록 노력하는 가운데 하늘에 보화를 쌓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입니다. 공로를 쌓을 수 있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얌체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감사하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나를 다듬어 주고 견고하게 하는 복덩이 입니다. 자, 옆에 계신 분에게 ‘당신은 복덩이입니다.’하고 말씀해 주세요.
3). 악인에게도 어느 정도의 선은 다 있습니다. 아니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기에 선한 모습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도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습니다.”‘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아무도 완전히 나쁘거나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완전히 선하시고, 악마만이 완전히 나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의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화의 비결은‘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공로가 많은 것처럼 실수와 잘못, 과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곳간에 쌓이기를 원하시기에 기다려 주십니다. 오늘, 심판보다는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설령 우리 자신을 포기할지 몰라도 주님만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러진 갈대 같은 삶을 살지라도 우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매 순간 주님께 희망을 둘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율곡선생도 “선한 것이거든 그 의리를 다하고, 악한 것이거든 그 싹을 자르라.”하셨습니다. 뿌리를 뽑으라고 하지 않고 ‘싹을 자르라.’하신 것은 선과 악의 뿌리가 얽혀있어서 이것을 뽑으면 저것이 함께 뽑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좋은 것 속에 나쁜 것들이 들어있지만 분명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어김없는 구별’이 이루어져 좋은 것이 곳간에, 즉 하늘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보이지 않게 시작하여 거창해집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거창하게 시작하여 흐지부지됩니다. 비록 우리가 행하는 선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그 일을 끝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가라지와 추수 때까지 함께할 수 있음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공로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모함하고, 빈정거리고, 험담하며 사사건건 반대합니까? 그래서 미워죽겠습니까? 속상하고, 분하고, 야속합니까? 그 사람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거두어 낼까요? 뽑아버릴까요? 그들을 통해서 내 마음이 얼마나 넓고 깊으며 생각하는 차원이 높은가를 알게 됩니다.
나를 뒤흔드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악의 세력에 휘둘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악을 미워하고 악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악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인내하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은총 안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아 주셨듯이 악인들에게도 인내롭습니다. 우리도 그분을 닮아 하느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밀로 머물러 곳간에 쌓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가라지로 표현되는 악한 이들도 어느 날 하늘나라 곳간에 저장되는 값진 밀이 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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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까지는 신문사에서 주방 일을 도와주시는 분이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올해부터는 제가 혼자서 주방 일을 하고, 텃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고추, 오이, 상추의 모종을 심었는데 돌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방 자매님은 수시로 텃밭에 나가서 물을 주고, 졸대를 세워 주고, 잡초를 뽑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신문사 직원이 먹고도 남아 이웃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문사에 있을 때는 물을 주고 있지만 외부 출장 일이 많아서 올해는 모종들이 많이 말라 버렸습니다. 그래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들이 조금씩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땅과 모종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땅에 거름을 주고, 모종에 물을 주면서 잘 키우는 사람의 정성이 문제였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도 비슷합니다. 거짓과 쾌락과 비판의 거름을 주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온갖 악취가 풍기기 마련입니다. 나눔과 희망과 격려의 거름을 주면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사랑의 꽃이 피기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지난 6월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하면서 첫 미사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을 주제로 강론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아껴주고, 격려한다면 성지순례라는 나무에서 기쁨과 희망의 열매가 열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서로 짜증내고, 상대방의 허물을 들추어내면 성지순례라는 나무에서 갈등과 분노의 열매가 열릴 거라고 하였습니다. 성지순례의 목표는 ‘멈춤, 만남, 변화’입니다. 일상의 삶을 멈추고 성지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났다면 주님의 제자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행객으로 순례를 갔다면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순례자로 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순례의 여정 중에 분심과 짜증이 생기곤 합니다.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의 습관과 성격 때문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날씨가 덥다고, 자유시간이 적다고, 물건 구입할 시간이 없다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모두가 감사의 마음으로 성지순례를 마칠 수 있는 것은 매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이동 중에 묵주기도를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기도 시간이 길어지면 불평의 말들이 줄어드는 것을 봅니다. 오직 기도만이 불평과 불만의 마음을 이해와 사랑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몇 가지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가능성의 나라입니다. 최고의 능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가는 나라는 아닙니다. 지금 부족한 사람도, 지금 잘못한 사람도 함께 할 수 있는 나라라고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가능성을 두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는 누룩의 비유입니다. 누룩은 아주 작은 양이지만 빵을 커다랗게 만들어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시작은 비록 작을지라도 끝은 아주 풍요로울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작은 겨자씨는 자라면 새들이 깃들고,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된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그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모든 생명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출발합니다. 커다란 코끼리도 그 시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크기의 정자와 난자의 만남입니다. 우리 모두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도움이 함께하면 가능성은 현실이 되고, 꿈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읽으면 ‘아메리카 원주민과 손녀’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있단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파란 늑대와 검은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대답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파란 늑대가 이기고, 검은 늑대에게 먹이를 많이 주면 검은 늑대가 이긴단다.” 손녀는 할아버지의 말을 곧 이해합니다. 착한 일을 하고, 겸손하면 나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쁜 일을 하고, 교만하면 나의 마음이 그렇게 변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적과의 동침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걱정도 되고, 힘들게 만들어 놓은 공동체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갈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버림받은 이들, 잘못한 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관대함이 있다면 우리는 이미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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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늘 나라의 삶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인내와 겸손-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의 비유에 대한 내용입니다. 참으로 늘 열려 있는 하늘 나라의 비유라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대로 우리 삶을 비춰주는 거울같은 아름다운 비유들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모습이,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분인지 깨닫고 배웁니다.
결론하여 예수님은 늘 하늘 나라의 참삶을 사셨던 지혜로운 관상가이자 신비가이자 활동가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줍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하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늘 나라는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하늘 나라는 결코 죽은 정적靜的 현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중동靜中動의 생명의 현실, 성장과 성숙의 역동적力動的 현실임을 깨닫게 합니다. 오늘은 제3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입니다.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코로나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했습니다.
하늘 나라는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아가야 할 과제를 부여 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가 특히 깨닫는 바는 하늘 나라도 공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도 일도 중요하지만 공부, 특히 독서를 권합니다. 동영상도 좋지만 독서를 통한 공부는 더욱 필요하고 좋습니다. 분별의 지혜를 위해 인터넷 검색檢索이 아닌 독서를 통한 사색思索의 훈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자라면 매일미사책을 통한 매일 미사전례문을 읽고 묵상할 것을 권하며, 적어도 ‘가톨릭신문’이나 ‘가톨릭평화신문’중 하나를 구독하여 읽을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어제는 강론 준비를 위해 두 신문을 대략 읽어봤는데 정말 내용이 풍부하고 유익했습니다. 광고에 나온 ‘가톨릭 조부모 학교 신앙학교’의 신앙전수법에 관한 내용도 아름다웠습니다.
“꿈꾸며 열매 맺는 인생여정의 영적 자존감, 공감과 경청의 예술로 만드는 영적우정의 대화, 저 너머를 바라보며 삶을 조각하는 동행의 말씀, 미래 세대에게 열린 하느님 사랑의 집 지구”
이대로의 노년이라면 그대로 하늘 나라 삶의 실현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고, 뿌리가 튼튼해야 꽃도 열매도 충실합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노년 어른들의 하늘 나라의 삶을 젊은 이들이 보고 배우니, 노년의 삶은 젊을 때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마침 사제서품 70주년을 맞이한 두봉 주교님의 한면에 걸친 인터뷰 기사도 풍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었습니다. 1929년생이니 만94세의 노인이지만 참 정정했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당부 말씀입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빛입니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고마운 일입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 모두는 항상 빛나는 존재입니다. 항상 ‘기쁘고 떳떳하게’ 사십시오.”
‘기쁘고 떳떳하게’ 주교님 삶의 모토입니다. 그대로 하늘 나라를 살고 계신 주교님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에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노년입니다. 또 하나 부탁입니다. 오늘 제3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에 대한 교황님의 담화문을 소리내어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어제 인터넷에서 전부 출력하여 정독했는데 정말 아름답고 깊고 풍부한 내용으로 영적독서에도 최고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명문이지만 젊은이들과 노인들 모두에 해당되는 한 대목만 인용합니다.
“우리 모두 앞을 바라봅시다! 타성과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를 세세대대로 벗어나게 해주시는 하느님 은총으로 우리가 빚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하느님께 내어 맡깁시다.”
서론이 길었습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를 잘 들여다 보면 주인공은 우리가 아닌 하느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하느님께 귀기울이는 경청과 관상의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지혜서의 하느님 고백입니다.
“만물을 돌보시는 당신 말고는 하느님이 없습니다. 당신은 만물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당신의 힘이 정의의 원천입니다. 당신은 힘의 원천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의인은 인자해야 함을 가르치시고 지은 죄에 대하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는 희망을 당신 자녀들에게 안겨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께서 하늘 나라의 주인공이 되십니다.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도와 주시어 하늘 나라를 잘 깨달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성부 하느님에 대해, 제2독서 바오로의 로마서는 성령에 대해, 그리고 복음은 성자 예수님께서 주시는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 모두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는 오늘 복음의 하늘 나라의 비유에서 세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을 닮는 일이자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덕목들입니다. 어제 빛두레에서 읽은 한 대목입니다. “카롤린 엠케는 <혐오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 말했습니다.” 새삼 좋은 덕목의 의식적 선택과 한결같은 훈련을 통한 습관화가 사람꼴의 형성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하늘 나라의 비유들로부터 배운 것은 셋입니다.
첫째, 희망과 기쁨입니다.
희망과 기쁨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역동적이고 모험적인 우리 삶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의 설렘이 있습니다. 문제는 가라지들인데 이것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때문에 희망과 기쁨이 질식되어선 안됩니다. 잡초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농약이 거름이 없어도 줄기차게 자라는 잡초들, 그리하여 밭농사는 풀과의 전쟁입니다.
참으로 희망과 기쁨을 지니고 잡초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밀세력을 상징하는 진선미眞善美의 세력을 부단히 키우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도와 주십니다. 겨자씨의 성장과 성숙도 밀가루를 부풀리는 누룩도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의 표징이 됩니다.
말씀의 겨자씨도 될 수 있고 말씀의 누룩도 될 수 있습니다. 희망과 기쁨의 겨자씨, 희망과 기쁨의 누룩 얼마나 멋집니까. 우리 각자는 물론 우리 요셉 수도원도 겨자씨가 누룩이 됨을 깨닫지 않습니까. 설립후 만35년동안 작은 겨자씨 같은 공동체가 얼마나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한 나무로 되었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새들처럼 날아 와 깃들이는 지요! 26년전 1997, 3월에 쓴 ‘사랑’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 수도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나무는 넉넉한 품
언제나 거기 있어 날아오는 새들
모두 안아들이는 넉넉한 품
새들은 나무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무는 새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런 것”-1997.3
정주생활의 기적입니다. 여기 요셉수도원에서 26년전 시를 오늘 강론에 인용하다니요! 참으로 희망과 기쁨으로 우리를 설레게 하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둘째, 자비와 지혜입니다.
역시 자비와 지혜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자비와 지혜로 요약되는 하느님입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함께 갑니다. 자비가 바로 지혜입니다. 셋의 비유에서 배우는 바, 역시 하느님의 자비와 지혜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 하십니다. 주님은 공존공생共存共生의 자비와 지혜를, 균형과 조화의 지혜를 가르칩니다. 가라지 악은 원인불명의 현실입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려다 밀을 다칠 수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가라지 인줄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밀과 가라지는 서로 뿌리들이 엉켜있어 뿌리뽑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발본색원한다며 범죄와의 전쟁도 했지만 승리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가라지 세력의 척결을 위한 혁명도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가라지 세력은 결코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선적으로 할 일이 부단한 영적훈련의 습관화로 내안의 가라지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자비요 지혜입니다.
언젠가 밀로 변할 가라지도 있을 것이고 언젠가 가라지로 변할 밀도 있을 것이니 심판은 자비와 지혜의 주님께 맡기고 자비와 지혜의 마음으로 공존공생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요 부단한 자비와 지혜의 훈련과 습관화를 통해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일 자비와 지혜의 훈련에 소홀하면 악의 잡초세력은 선의 밀세력을 압도할 것이며 이때는 개인도 공동체도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겨자씨의 성장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잘 보살피고 거름을 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불필요하게 건드리지 말고 그냥 놔두고 잘 지켜보는 것입니다. 누룩 역시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이또한 자비와 지혜, 감사의 마음으로 묵묵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제일 좋은 것은 우리 자신이 자비와 지혜의 밀이, 겨자씨가, 누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의 빛, 지혜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힐 것이니 바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셋째, 인내와 겸손입니다.
역시 인내와 겸손의 선택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인내의 믿음, 인내의 사랑, 겸손한 믿음, 겸손한 사랑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바로 겸손입니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 가라지들 속에서의 생존을 위해서는 지극한 인내와 겸손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께 가라지 세력의 심판을 맡기고 겸손히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라지 악의 세력을 뽑아버리려는 무모한 교만은 재앙의 뿌리가 됩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참으로 인내와 겸손의 믿음이, 사랑이 답입니다. 겨자씨로 상징되는 덕목들과 사람들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과 겸손뿐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누룩이 삶을, 공동체를 부풀리게 하기 위해서도 인내의 기다림과 겸손은 필수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늘 나라를 살고 싶습니까? 주님은 오늘 고맙게도 죽어서가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자유롭고 행복한 하늘 나라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바로 희망과 기쁨, 자비와 지혜, 인내와 겸손이 답입니다. 이 덕목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끊임없이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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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꽃을 심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땅을 골라주고 꽃씨를 뿌리고 물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기다렸습니다. 예쁜 꽃이 나오길 말입니다.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드디어 자그마한 싹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꽃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싹이 나왔습니다. 급기야 어떤 것이 꽃이고 어떤 것이 풀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결국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꽃이 피는 것이 꽃이고 꽃이 피지 않는 것이 바로 풀이기 때문이지요. 그동안은 같은 물을 마시고 같은 태양을 받도록 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바로 이러한 현상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같이 두는 것은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까지 뽑을까 봐서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묻습니다. “왜 좋은 씨앗만을 뿌렸는데 밀만이 아니라 가라지까지 나오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원수가 뿌렸구나.”라고 말입니다.
밀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심어주신 좋은 마음이고 가라지는 그러한 밀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하느님의 좋은 마음을 방해하는 유혹들, 어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하느님께 조금 더 나아가고, 사람을 조금 더 사랑하기 시작하면 악마는 우리에게 더욱 큰 유혹을 만나게 합니다.
‘왜 하느님을 믿기 시작하니까 힘든 일이 그리도 많은지요?’라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심어진 하느님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방해하는 유혹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떠나도록 더 이상 씨앗이 못 자라도록 가로막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유혹하는 악마, 혹은 유혹자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넘어갈 만한 것으로 찾아옵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의 주님의 씨앗이 잘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튼튼하고 예쁘게 자라나기를 바랍니다.
동병상련
미사가 끝나고
성당에서 나오시는 분들에게
인사합니다.
이곳에 자주 오시는 한 자매님과도
인사를 하고 보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네 그 자매님이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미사 내내
어떤 자매가 울더라고요.
마음에 걸려서 못 가겠어요.
그리고는 다시 성당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압니다.
다시 돌아오신 그 자매도
참으로 아프고 상황이 어려운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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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요즘에는 체벌이 없어졌지만, 저 때만 해도 무서운 선생님께 체벌당했던 기억이 많습니다. 자율학습에 졸았다고 맞고, 반성적이 떨어졌다고 연대책임이라며 맞고, 수업 태도가 좋지 않다고 맞고, 때로는 예의 없다면서 맞는 일도 있었습니다. 체벌 도구도 다양해서 마대, 당구 큐 대, 아니면 두툼한 몽둥이 등이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하나 내겠습니다. 20명의 학생이 10대씩 맞는 상황입니다. 20명의 학생 중에서 가장 아프게 맞은 학생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학생이 가장 아플 것 같습니다. 선생님 체력이 제일 좋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지막에 맞은 아이가 제일 아프다고 합니다. 이 아이는 자기 앞 19명의 맞는 모습을 보면서 불안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불안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나쁜 감정을 극대화하기에, 불안을 자기 안에서 치워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긍정적인 마음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이 사라지는 순간은 나를 지켜 줄 커다란 힘에 대한 믿음이 생겼을 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자신 넘치는지 모릅니다. 평소보다 말도 잘하고,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합니다. 부모보다도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나’를 지켜 준다면 어떨까요? 불안을 가질 이유가 없어질 것입니다. 실제로 부모보다 더 큰 힘을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불안이 사라지고, 하고자 하는 용기와 의욕이 가득해질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이렇게 힘센 주님을 잊어버립니다. 오히려 악이 더 힘센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에서 묵상하게 됩니다.
우선 밀과 가라지는 모두 커서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식별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구분이 되기 시작했을 때, 가라지가 보인 것입니다. 밭에 좋은 씨를 뿌렸기에 가라지가 있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주인은 원수가 했음을 알아챕니다. 종들은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라고 묻습니다. 주인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지요. 잡초의 생명력은 대단합니다. 즉, 밀보다 더 탄탄하게 더 넓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밀이 뽑힐 수도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지상에서 자라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 안에는 인내로써 견뎌야 할 악의 씨앗이 뿌려져 있음을 상기시키고, 하느님 나라의 자녀들은 악마 졸개의 기세에 눌려 고생하지만 역시 하느님의 심판은 선인들의 편임을 확신케 합니다. 최후의 승자는 악마가 아닌 선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붙어야 할까요? 가라지로 표현되는 악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악의 힘이 하느님보다 센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속 우리에게 당신을 믿고 따를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악의 유혹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철저히 하느님 편이 되어 ‘밀’의 모습을 갖추어야 합니다. 마지막 날에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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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결국 해낼 것임을 알았다. 그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머라이어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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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키엣 대주교님.
모든 것은 선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비유는 믿음 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교회, 우리 마음에 가장 좋은 씨를 뿌리셨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선을 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좋은 밭에 악을 뿌리기 위해 기회만을 노리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평화를 갈망하는 씨를 뿌리셨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같은 주님의 자녀로서 형제애로 서로 손잡고 아름다운 세상, 인정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님이 주신 평화의 밭은 욕망과 이기심의 가라지, 악의 가라지로 더럽혀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전쟁으로 슬픈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혜와 재능, 자원들을 아름다운 세상을 건설하는데 이바지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지혜와 재능, 자원들은 같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인간을 망치는 데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좋은 행동, 좋은 생각만을 했습니다. 서로 돌보고 서로 같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좋은 밭에 악마가 스며들어 가라지를 뿌렸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기다리심과 관대한 사랑입니다.
벼와 가라지를 수확하고 가르듯이 주님께서는 자신의 잘못을 느끼고 용서를 청하는 그 날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관대한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즉시 벌하지 않으십니다. 그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회개하고 당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기에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용서를 해 주실 그 날이 오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죄인들을 즉시 심판하시는 분이었다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착한 도둑도 막달레나 마리아도, 사도들과 아우구스티노 성인,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 성인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벌을 내리셨다면 가장 먼저 벌을 받는 사람이 바로 나일 것입니다. 나 또한 마음 속에 벼와 함께 가라지가 자라고 있는 나약함으로 많은 죄를 저지른 나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선하신 하느님을 알고 무한한 사랑을 깨달게 하기 위해 선이 존재합니다. 악을 피하고 선에 가까이 가야 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악이 존재합니다. 주님 안위의 은총을 누릴 수 있도록 선이 존재합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주님 믿음의 증거자가 되도록 악이 존재합니다. 인성을 연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시련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선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종교를 금지하는 것은 나쁘지만 그럼에도 그 덕분에 신앙을 증거하는 성인들이 존재하셨습니다. 고뇌와 아픔은 생활의 장애물이지만 그로 인해 주님의 고통을 이해하게 되기도 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라고 하셨습니다. 선과 악, 행복과 고뇌,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선한 사람을 더욱 단련시키고 더 성장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내 안에 있는 가라지는 무엇입니까?
2. 믿음의 생활을 하면서 나쁜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즉시 배척합니까? 아니면 마음 속으로 다른 사람이 나 대신 그를 제거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3. 세상에는 선과 악이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무엇보다도 악은 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 보십시오.
말씀의 나눔
1. 주님께서는 평화를 갈망하는 씨를 뿌려주셨고 주님의 사랑은 기다리심과 관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의 자녀인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인내하며 기다려 주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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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연중 제16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참된 삶이란>
참된 삶이란
가라지를 뽑는 것보다
밀을 키우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어둠을 내모는 것보다
빛을 품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악을 없애는 것보다
선을 돋우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미움을 멈추는 것보다
사랑을 피우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절망을 잊는 것보다
희망을 꾸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불의를 삼가는 것보다
정의를 보듬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라
거짓을 내치는 것보다
진실을 따르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탐욕을 버리는 것보다
베풂을 누리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홀로를 벗는 것보다
함께를 입는 것입니다
참된 삶이란
죽임을 그치는 것보다
살림을 이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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