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가스라이팅 당해 비참하게 살다간 시대의 선구자 "탄실"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소설가이자 시인인 탄실 김명순의 삶은, 한 개인이 겪어낸 비극인 동시에 조선 근대 문단이 품었던 가장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춘향이처럼 기생 출신 어머니와 양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라는 출신의 굴레는, 탄실의 삶에 드리워진 첫 번째 가혹한 족쇄였다. 5개 국어를 구사하고 최초의 여성 소설집인 《생명의 과실》을 펴낸 시대의 선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와 문단은 그녀의 눈부신 지성과 재능을 시샘했고, 조선 사회가 강요한 굴레와 그녀가 겪어낸 가혹한 상처를 도덕적 단죄의 칼날로 삼아 끝내 정신적·육체적 사형에 처했다. 탄실의 서녀라는 신분을 약점 삼아 정조와 삶을 유린하고 이를 방관·방조한 자들, 그리고 해방 후에도 그녀를 깎아내기에 바빴던 이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것은 다름 아닌 조선사대부들의 비겁함과 위선의 잔재였다.
탄실의 삶을 가장 악의적으로 난도질한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소설가는, 탄실을 모델로 삼아 한 여성의 사생활을 극단적으로 왜곡한 소설을 발표했다. 서녀라는 출신 성분 때문에 조선 사회의 위선적인 도덕 잣대 속에서 더욱 가혹한 편견과 차별에 노출되어야 했던 탄실은 생전 원치 않는 폭력과 가부장적 억압 속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피해자였다. 그러나 그를 비롯한 당대 남성 문인들은 가해자의 폭력은 은폐한 채, 피해자인 여성이 지닌 자유로움을 '문란함'과 '부도덕'으로 낙인찍었다. 이들의 정신세계는 남성 지배적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신여성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들의 세계관을 위협하는 당당한 여성 지식인을 품을 그릇이 되지 못하자, 소설이라는 매체를 도구 삼아 한 인간의 인격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비열함을 택한 것이다. 해방 이후, 소설가이자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졌던 또 다른 이는 잡지를 통해 탄실의 삶을 변태적인 방종의 생활이라 규정하며 그녀가 구걸하다 비참하게 죽었다고 왜곡했다. (출신성분과 낙인찍힘을 당해 5개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있었지만 밥벌이할 곳이 없었던 것).
성직자와 문인이라는 사회적 명분을 가진 자가, 평생을 서녀라는 출신의 한계와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다 쓸쓸히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여성 문인의 말로를 모욕하고 조롱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이중적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남성들은 여성을 억압하고 사회적 기회를 박탈함으로써 고립시킨 뒤, 정작 고립 속에서 황폐해진 삶을 향해 방종했다며 손가락질하는 잔인한 가해의 악순환을 반복했다.
이들뿐만 아니라 당대 문단 전체는 탄실에게 일종의 마녀사냥 가해자였다. 남성 문인들은 그녀를 동등한 문학적 동반자나 지식인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춘향이처럼 신분의 벽을 넘어서려던 그녀를 호기심의 대상, 가십거리, 혹은 도덕적 잣대로 재단하기 바쁜 구경꾼이자 방관자들이었다.
그들의 비루한 정신세계의 본질은 자기 검열과 타자 멸시였다. 자신들보다 월등한 언어적·사상적 역량을 가진 서녀 출신 여성의 존재를 견뎌내지 못한 그들은, 조선 사회의 낡은 도덕률과 신분적 편견을 방패 삼아 탄실을 깎아내림으로써 스스로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 따위 썩은 문학정신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 오랜 세월 동안 혹독한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으면서도 한국에 노벨문학상이 나오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침내 한강이 2024년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로 폭력과 야만을 거부하는 깊은 성찰의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비로소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문학상이 품에 안기게 되었다.
탄실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죄로 비운의 삶을 살았으나, 그녀를 짓밟았던 자들은 해방 이후 6.25 동족 상잔이라는 시대의 비극을 겪고도 그 시대를 한 뼘도 확장하지 못한 채 편협함과 위선 속에 침전해 갔다. 역사는 기억한다. 가해자들의 비루하고 오만한 펜끝이 어떻게 한 천재의 삶을 난도질했는지를. 그리고 그 폭력 속에서도 끝내 꺾이지 않고 피어난 탄실의 문학적 꽃송이가, 오늘날 진정한 진보와 해방의 언어로 어떻게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는지를.
8.15 해방은 일제 압제에서 벗어난 거기에 머무르는 정신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출생 성분이나 배움의 수준, 가문의 배경과는 무관하게 평등하다는 이 진리를, 좌파든 우파든 친일이든 애국이든 모든 이념과 민족을 초월하여 뼈속 깊이 인정할 때 비로소 진정한 해방정신을 꽃피우게 되고, 세계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이정신은 이미 기미독립 선언문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