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이순신 장군의 부산대첩
거북선 이끌고 '적 소굴' 된 부산포서 100척 깨트려
입력 : 2024.02.01 03:30 조선일보
이순신 장군의 부산대첩
▲ 1592년 10월 5일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함대가 부산포에 있던 일본 함선을 총통과 불화살을 쏘아 격침하고 있어요. 충남 아산 현충사 건물 안쪽 벽에 걸린 유화로, 1970년 서울대 미대에서 그렸어요. /현충사
31일 부산항 북항 근처에 '이순신대로'가 개통됐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부산시 중구와 동구를 연결하는 이 길은 길이 1.6㎞에 왕복 4~8차로라고 해요. 그런데 이곳에 새로 생겨난 길에 이순신 장군 이름이 붙은 데는 이유가 있어요.
부산항 북항 근처의 부산포(釜山浦)에서 1592년(선조 25년) 10월 5일(이하 양력) 커다란 해전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오래도록 '부산포 해전'으로 알려졌던 이 전투를 최근엔 부산을 중심으로 '부산대첩'이라 부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여기서 '대첩(大捷)'이란 '큰 싸움'이 아니라 '큰 승리' '크게 이겼다'는 뜻이므로 사용에 주의해야 합니다. '부산대첩'이란 크게 승리한 우리가 쓰는 말이며, 일본에선 이 말을 쓸 수 없습니다.
출전 세 번으로 바다에서 달아난 일본군
서울 광화문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면, 부산에는 용두산공원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습니다. 1956년 바다를 바라보는 모습으로 세운 것이죠. 이 앞에서 묵념하거나 큰절을 올리는 부산 시민들을 종종 볼 수가 있어요. 그런데 관광객 중에는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산도 근처에서 활동하신 이순신 장군 동상이 왜 부산에 있죠?"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대표적 해전은 1592년의 한산대첩, 1597년의 명량해전, 1598년의 노량해전입니다. 그런데 각각 영화로도 만든 이 세 해전 말고 다른 해전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 중요성에 비해 저평가된 대표적 해전이 바로 부산대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92년 5월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수륙병진(水陸竝進) 작전을 펼쳤습니다. 일본 육군이 부산에 상륙해 북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동시에, 일본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 압박하는 전략이었죠. 그러나 전쟁이 일어난 159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이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습니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에 막힌 것이죠.
1592년 이순신 함대의 활약은 모두 네 차례 출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1차 출전 중 6월 16일 옥포 해전에서 처음으로 일본 함대를 맞아 승리를 거뒀고 합포·적진포에서도 적선을 격파했습니다. 7월의 제2차 출전에서는 사천·당포·당항포·율포 해전에서 연달아 승리했죠. 8월의 3차 출전은 가장 유명한 한산대첩과 안골포 해전의 승전을 가져왔습니다.
1~3차 출전 결과 일본을 대표하는 수군 장수가 모두 대패함으로써 당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 이상 바다에서 싸우지 말라'는 긴급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1592년 해전 기·승·전·결의 '결(結)'에 해당하는 제4차 출전이 시작됐습니다.
부산포에 일본 배 470여 척, 조선은 80여 척
'적들이 더 이상 바다로 나오지 않겠다면 적의 심장부로 쳐들어가겠다'는 것이 이순신의 대담한 계획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의 본거지는 바로 부산이었습니다. 부산포에서 바다로 나오지 못하고 있던 일본 배는 470여 척이었습니다. 전선 80여 척인 조선 함대의 5~6배나 되는 전력이었죠. 그러나 북쪽으로 패퇴한 조선 육군은 수군을 전혀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직 수군만의 힘으로 부산을 공격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작전이었을까요? 1만명에 가까운 조선 수군은 여수 앞바다에서 23일 동안 특수 훈련을 받고 장거리 운항에 대비해 많은 군량미와 땔감을 실은 뒤 9월 29일 출항했습니다. 거북선 세 척과 함께였습니다.
출항 닷새 만인 10월 4일, 이순신 함대는 낙동강 하구인 장림포에서 적선 7척을 불태웠습니다. 다음 날인 5일 새벽부터 화준 구미, 다대포, 서평포, 절영도, 초량목에서 모두 30척에 이르는 적선을 격침해 배후를 정리했습니다.
이순신 함대는 곧장 부산포로 진격했습니다. 장사진(長蛇陣)이라고 하는 1열 종대 대형이었습니다. 객관적 전력이 우세해 보였던 일본 수군은 조선 함대를 보자마자 혼비백산해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달아났습니다. 이어 육지 여섯 곳에서 조선 함대를 향해 화살과 조총, 조선군에서 노획한 화포 등을 쏘면서 저항했습니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조선 수군은 일본 함선을 총통과 불화살로 격파했습니다.
조선 수군의 압도적 승리였습니다. 일본 함선 100여 척이 침몰했습니다. 사상자는 수천 명으로 추정됩니다. 반면 조선 함선의 피해는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몇몇 전사자 중에 이순신의 핵심 참모인 녹도만호 정운이 포함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일본군 해상 보급로 완전히 끊겨
부산대첩으로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임진왜란 초기의 해전은 종결됐습니다. 바다에서 더 이상 전투가 일어날 일이 없게 됐던 것이죠. 자신에게 엄격했던 이순신 장군은 부산대첩만은 스스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가 쓴 장계(지방에 나가 있는 신하가 중요한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 문서)에선 "전후 네 차례 열 번 치른 접전에서 번번이 이겼으나 장수들의 공로를 논하자면 이번 부산 해전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죠.
반면 평양까지 진군했던 일본군은 수륙병진 작전이 좌절돼 해상 보급로가 끊긴 반신불수가 됐고, 결국 남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산대첩은 나라 전체를 지킨 전투인 것입니다. 부산대첩기념사업회 측의 다음 주장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옥포승첩은 승리의 씨를 뿌렸고 당포승첩은 줄기와 가지와 잎을 나게 했으며 한산대첩은 꽃을 피웠고 부산대첩은 그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1980년 공포된 '부산 시민의 날'인 10월 5일은 바로 부산대첩 승전일입니다.
오래도록 이순신 장군을 연구한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은 부산대첩에서 배워야 할 '4대 정신'을 꼽았습니다. ①의견이 다른 장수들과도 함께한 화합과 포용 ②용의주도하게 전쟁을 준비한 유비무환 ③누구도 생각 못 한 전략과 전술을 세운 창의와 개척 ④목숨을 걸고 싸운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 1956년 3월 20일 부산 용두산공원에 세워져 바다를 굽어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 /위키피디아
▲ 1980년 10월 5일 부산 시내에 '제1회 부산 시민의 날'을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렸어요. 부산대첩 승전일인 이날을 매년 기리며 부산 시민들이 선열의 순국 정신을 시민 정신으로 발전시켜 가겠다는 의미래요. /부산박물관
▲ 31일 개통한 '이순신대로'. 이순신 장군의 부산대첩 승전지인 부산 북항 근처를 지나는 도로예요. /부산항만공사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장근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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