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억이 생긴다면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서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테니 구해보아라’ 라고 한 부분은 다시 읽어도 참 입맛이 당기는 내용이다. 나에게도 한 번 나타나셔서 물어봐주셨으면 좋으련만.
그래서 생각해봤다. 정말로 나에게 물어보신다면, 단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줄테니 구해보라고 얘기하신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막상 쉽게 답을 못하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 100세, 200세? 가족들이 나이가 들어 다 죽어가는데 혼자 오래 살아서 뭐하나. 그러면 솔로몬처럼 지혜? 글쎄, 별로 끌리지 않는다. 좀 추상적이기도 하고. 지혜가 생겨봤자 결국 행동으로 옮기는데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이 있겠나. 아니면 넘치는 영감과 창의력? 이것도 좀 모호하다. 글을 쓸 때 영감을 받아서 뛰어난 작품을 만든다. 그래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고, 베스트셀러가 못 되면 어떡한담.
역시 가장 확실하고 명쾌한 건 돈이다. 가장 눈에 띄고 체감이 되는 변화. 돈. 그래서 내게 100억이 생긴다는 가정을 해봤다. 세금 떼지 않고, 온전히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 100억. 100억이 생기면 나는 뭘할까?
자연스럽게 내 버킷리스트들을 다시 떠올려본다. 일단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 100억을 가진 자의 소원리스트치고 갑자기 좀 소박해보인다. 그렇지만 일단 산티아고 순례길을 찬찬히 걸으면서 이 100억을 어떻게 쓸지 잘 고민해보리라. 숙소는 알베르게 말고 좀 좋은데 묵어야지.
아하, 일단 그러기 위해선 퇴사를 해야 하는구나. 무엇보다 시간이 있어야 갈 수 있는 게 산티아고 순례길이니까. 그런데 바로 퇴사하지는 못할 것 같다. 현 직장에서 커리어를 온전히 마무리하기 위해선 2년 반을 좀 더 버텨야 한다. 그래야 자격증이 나온다. 아무리 부자라도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서 먹고 노는 것 보다는 어떤 일을 해야 건강하다고 하니까, 계속 여행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언젠가는 지겨울 수 있으니, 일단 지금 직장의 커리어는 잘 마무리하고 산티아고로 떠나야겠다.
그래, 대신 그동안 여가생활을 좀 풍족하게 하는 게 좋다. 일주일에 딱 하루 쉬는 날이니 당일치기로 제주도를 다녀오든가, 아님 도쿄에 가서 라멘을 먹고 오든가, 좀 호사를 누려야지. 하하, 상상만 해도 좋구나.
아이고, 이런 삶의 질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것, 집. 그래, 집을 사자. 언제까지 계속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닐텐가. 일단 지금 전세 집을 바로 사버리는거다. 내 집 마련의 꿈도 드디어 성취. 더 이상 이사 다니지 않고, 재계약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마땅한 집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된다니. 이걸 깜빡할 뻔 했네. 내.집.마.련. 오호, 100억이면 꽤 많은 일들을 할 수 있구나.
이외에도 뭐가 있으려나. 스카이다이빙 하기.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경기 직관, 이강인과 김민재가 뛰고 있는 바이에른 뮌헨 경기 직관도 추가! 오로라 보러가기. 그래 이 참에 부루마블에 나와 있는 도시들을 하나씩 다 가보는 거다. 신났구나.
누군가 그랬다. 솔로몬이 그렇다 하면 정말 그런거라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려본 솔로몬이 인생이란 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또 헛되다 라고 하면 정말 그런거라고. 하지만 나는 이걸 솔로몬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 물론 허랑방탕하게 산다는 게 아니라 100억을 가지고 짜임새 있게 쓰면서 말이다.
그러나 삶이란 게 변수가 얼마나 많은가. 아무리 내가 들뜬 마음으로 세계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한들 요즘 다시 아토피가 올라와 고생하는 아이가 증상이 더 심해져서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룰루랄라 세계 여행을 갈 수 있겠나. 가끔씩 대기업 회장의 자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듣곤 한다. 사실 이들이 돈이 뭐가 부족하겠나. 물론 그 속사정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돈이 결코 해결해줄 수 없는 것들, 만족시켜줄 수 없는 것들이 분명히 있기에 그 허무와 괴리감과 고통 때문에 그런 선택까지 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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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원을 들어주는 이런 요소를 활용한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면 ‘드래곤볼’과 ‘알라딘’ 같은 작품들. 그러나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소원을 가지고도 그 안에 스토리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다. 문득 갖가지 제약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시간과 돈과 건강의 제한 또는 어떤 능력의 한계들. 내가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사고, 강의를 듣고, 시간을 벌어 계속 글을 쓸 순 있겠지만 그 역량을 키우는 건 내 몫이다. 그러니 한편으론 내가 마주한 제약들이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요소가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영화 알라딘에서 지니의 소원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다. 평범한 하루, 무탈한 하루, 사실 그게 행복이긴 하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면 긴 여행이 필요한 것 같다. 팍팍한 하루하루에 좀 지쳤다는 표시일까.
다만 정말로 하나님이 꿈 속에서 물어볼 수 있으니, 나는 계속 이렇게 대답할거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100억을 달라고. 그 돈을 쓰면서 내가 몰랐던 많은 것들을 알게 될테니까. 그 경험들이 삶을 더욱 다채롭게 해줄테니까. 조금 허황된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100억 상상 때문에 버킷리스트 업데이트를 해본다. 꼭 100억을 받지 않더라도 어쨌든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 이뤄가면 100억을 받은 거나 다름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