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28]뚜벅이여행으로 본 ‘서울의 속살’
요즈음 ‘처가妻家모임’에 특별한 이유없이 빠지는 간 큰 남자가 있을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예를 들어 장인-장모 생신모임 등에 빠질 수 있겠는가. 처갓집 가는 것을 ‘성지聖地 순례’라고 하다니, 쓴웃음이 절로 난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아무튼 처가모임이 ‘영순위’임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 지난 주말, 1년에 두 차례 와이프 6남매(3남3녀) 가족모임이 2박3일 서울에서 있었다. 그날의 컨셉은 '서울 뚜벅이여행'으로 창덕궁&창경궁 등 고궁 답사-서울시립미술관&서울공예박물관 관람-서촌&청계천 걷기 등이었다. 유홍준이 ‘자랑과 사랑으로 쓴 서울이야기(나의 문화유산답사기 9-12권)’가 대부분 서울의 하드웨어라면, 이런저런 문화탐방은 소프트웨어에 해당된다 할 터.
이런 걷기 여행으로 알게 된 미국인 화가와 한국인 콜렉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4월 20일부터 8월 20일까지 전시중인 ‘에드워드 호퍼’(1882-1967)라는 화가 이야기이다.
20세기 초 현대인이 마주한 일상과 정서를 독자적인 시각으로 화폭에 담아낸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라는데, 듣느니 금시초문. 관람료가 제법 비싸지만, 이런 전시회를 통해 한 예술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알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세계적인 화가라 하면 피카소나 고흐, 달리, 마네 등을 들겠지만, 그들 이후에도 수많은 화가들이 명멸했을 터. 그중의 한 명인 호퍼는 뉴욕주의 시골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살기도 하고, 아내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전업작가로 살았다. 재밌는 것은 1923년(딱 100년 전이다) 동료 화가 조셉핀과 눈이 맞은 이래 ‘예술의 꽃’이 활짝 핀 것이다. 성격다툼이 심했다하나, 예술동지로서 끝까지 같이 했다. 조셉핀을 만나지 않았다면 영영 무명 화가로 끝났을 지도 모를 일. 오죽하면 그들을 두고 ‘아메리칸 러브스토리’라고 했을까? 조는 남편의 작품 등 모든 것을 치부책에 기록했다. 심지어 같이 본 연극티켓만 해도 한 보따리였다. 전시회에서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수채화를 아내에게서 배운 호퍼의 그림모델 또한 백퍼 아내였다. 1961년작 <햇빛 속의 여인>을 감상해 보시라. 시골과 도시를 오가며 대상과 공간을 세심히 관찰하여 호퍼 특유의 빛과 그림자, 대담한 구도와 시공간을 재구성한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부부는 같은 제목으로 같은 구도의 그림을 여러 점 그리기도 했다. 천생연분인 듯 시너지효과를 낸 것이다. 오늘날 호퍼가 있는 것은 순전히 아내 조 호퍼 덕분일 수도 있다. 그러니 장가를 잘 가야한다. 시립미술관까지 가는 게 성가시면, 인터넷 검색으로라도 감상해 보면 좋겠다.
두 번째, 허동화(1926-2018)라는 분은 아내 박영숙과 함께 일평생 우리의 자수와 보자기를 수집한 콜렉터이다. 서울공예박물관(옛 풍문여중고 자리)에서 전시하는 <자수, 꽃이 피다>와 <보자기, 일상을 감싸다>전이 그것. ‘보자기 할아버지’라 불리는 허동화님이 평생 수집한, 자칫 멸실되기 쉬었을 각종 자수와 각종 보자기들을 진열해놓고 보니, 왜 이런 ‘사소한 물건’들이 이렇게나 소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어찌 여성들만 흥미로울까? 정말로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진리가 새삼 더 느껴진다. 아름답다, 예쁘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색색깔의 골무만 해도 그렇다. 옛 여인들의 미적 감각들이여! 남편을 기다리며 밥상을 덮어놓았던 상보, 조각보 등은 또 어떤가? 구운몽이 자수된 병풍을 구하여 10년 동안 공을 들였다고 한다. 아, 이런 분이 진정한 문화인이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회화와 도자기 등을 수집하여 우리에게 물려준 간송 전형필 선생의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터. 해외전시회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기업인으로 한 점, 한 점 구하여 소장하고 ‘자수박물관’을 만들고, 전재산일 수 있는 귀한 물건들을 아낌없이 서울시에 기증한 부부는 우리의 영원한 귀감일진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가? 자문해 본다.
2박3일 동안 걸어다니며, 실제로 들어가본 기념관 등이 10여곳 되지만, 간략하게나마 언급하지 않으면 안되는 곳들이 있다.
# 경교장京橋莊: 강북삼성병원 본관에 자리잡은 경교장은 백범 김구선생의 일생만큼 기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방 직후 귀국한 임시정부 청사이자 요인들의 숙소로 사용된 공간인데도, 백범 서거 후 중국대사관 사택으로, 한국전쟁때 미군부대 주둔, 월남대사관으로, 68년 고려병원이 개원, 경교장은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질 뻔했다. 천만다행히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2005년 국가사적으로 승격되었고, 삼성병원이 영구 무상임대, 시설을 모두 옮김으로써 2010년 복원되고, 2013년부터 내부 공개를 하고 있다. 바로 그곳에 우리의 아픈 역사의 현장이 있는데도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조차 그 사실을 모르고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이 태반일 터. 임시정부의 각종 자료, 특히 김구선생이 암살 당시 입었던 피 묻은 혈의血衣를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안두희는 누구의 지시로 백범선생을 암살했는가? 역사의 미스테리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인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법통法統조차 무시하는 자, 그 누구인가?
# 전태일全泰壹기념관: 박종철, 이한열도 있지만, 전태일만큼 ‘아름다운 청년’이 이 땅에 또 얼마나 있을까? 청계천로옆 5층짜리 건물 외벽엔 전태일의 유서를 온통 형상화해 놓았다. 1948년생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너무나 열악한 노동환경에 항의하여 노동조합을 만들려 싸우다, 22세 나이에 분신을 했다. 전태일 열사의 일자무식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죽는 순간까지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노동자의 어머니>로 옹골차게 싸웠다. 그 아들에 그 어머니, 그들은 진정코 ‘아름다운 모자母子’였다. “하루 8시간 노동,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청계천피복노조는 전태일의 죽음과 맞바꾸었지만, 진정 그가 그리던 세상은 21세기에도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 창덕궁&창경궁&종묘: 일제는 창경궁에 사꾸라(벚꽃)를 몽땅 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했으며, 창경원으로 이름을 격하시켰다. 게다가 종묘와 연결고리를 끊었다. 하여, 최근에야 율곡터널을 개설함으로써 그 맥을 이었다. 문정전 앞마당에서 뒤주에 일주일간 갇혀 죽은 사도세자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영조는 왜 그렇게 총애했던 아들을 죽였을까? 모를 일이 어디 한두 가지랴. 정조는 '모태母胎효자'였다. 지금의 서울대 자리(연건동)에 아버지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을 짓고 쪽문인 선인문宣仁門을 통해 한 달에 한번 아버지를 참배하며 호곡했다. 정조는 수원의 아버지 릉을 참배한 후 어머니(혜경궁 홍씨) 회갑잔치를 7박8일 동안 해드린 하늘이 낸 효자였다. 화성의 원행園行이 그것으로, 지금도 융건릉이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 etc: 노무현시민센터 방문(바보 대통령 ‘노무현정신’을 되뇌며 커피타임), 서촌마을 딜큐사(3.1운동을 세계에 가장 먼저 타전한 외국기자의 집), 친일파로 알려진 홍난파 생가, 윤동주 언덕 등 걷기. 광화문에서 청계천3가까지 천변 걷기 등등등등.
# 뚜벅이여행의 백미는 맛집 기행: 이탈리아레스토랑 시금치파스타, ‘평가옥’(세종문화회관 뒤 로얄빌딩내)의 어복쟁반(대자 74000원), 인사동 흑두부전문점 ‘오수별채’의 민어구이, 인도음식전문점 ‘강가’의 란과 세트커리(서울파이낸셜센터),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추어탕집 ‘남도식당’(정동극장 골목), 맛도 없고 특징도 없는 ‘서머셋’호텔의 조식 2회,
역시 대한민국 ‘문화文化의 수도首都’는 서울, 서울일 수 밖에 없음을 새삼 알게 된 처형 “서울에서 살아봤으면 좋겠다” 한 마디. 이렇게 알찬 서울의 속살을 터트게한 데는 플래너planner의 숨은 공로가 있게 마련. 둘째처남 부부의 동선動線을 확인하는 등 리허설도 있었으리라. 이 자리를 빌어 감사. 한편 불참한 한 처남부부의 사정을 쿨하게 인정하는 ‘쿨한 배려’도 미덕 중의 하나인 듯. 소생도 개인 사정으로 두 끼를 불참. 죄송. 6남매의 우애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뚜벅이여행을 하면서 나눈 수다가 얼마이겠는가. 부모님을 회상하며 그 은공을 갚을 길 없음에 한숨도 쉬었으리. 올 가을 모임은 ‘예향藝鄕의 수도’ 전주에서.
첫댓글 누가 코스를 잡았는지 기회가 닿으면 들러보고 싶네....
여기서 긴 얘기를 하기는 뭐하고.... 개인적으로 에드워드 호퍼와 훗날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 그림이 가끔 헷갈린다.
2차대전 후 세계 패권을 잡게 된 미국의 지도층은 유럽에 비해 일천한 역사, 문화 예술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예술의 중심지를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기기 위해 당시 CIA까지 나서서 작업(예술가 지원 등) 했다고 한다.
한국의 기득권들은 예술적,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콤플렉스 조차 못 느끼지만....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