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21
3월6일[사순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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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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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gVOPcXrgVc (이영준 모이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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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지점은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수도자로서 수십 년 세월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해왔는데, 이 정도 연륜이라면, 이제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만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탁월한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손톱만한 일에 걸려 넘어지고, 분노하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때로 공동체 구성원들과 사사건건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원인분석을 해나가면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의 과오로 인해 내게 다가온 상처, 대화 부족과 상호이해 부족으로 인한 고통, 최근 내 불편한 심기로 인한 부딪힘, 난데없이 다가온 십자가…….
그럴 때마다 생각하셔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웃들과의 의견충돌이나 마찰, 그로 인한 상처를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치다 보면 결국 남는 것은 또 다른 상처요 또 다른 고통입니다.
이웃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지고, 삐거덕거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열 일 제쳐 놓고 이제 하느님께로, 영적 생활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보는 것입니다. 판단이나 단죄, 그로 인한 영적 고통의 길을 그만 접고 하느님께로 돌아서라는 표지로 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돌아서고 나서 계속되어야 할 영적 작업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보다는 침묵, 판단보다는 묵상, 단죄보다는 용서의 길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어렵지만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려운 작업이 남아있습니다. 거기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영적으로 재무장한 다음, 내적 평화를 되찾은 다음, 다시 한번 이웃들에게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공동체 생활의 리듬, 사이클을 요약해보니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들과의 관계 안에서 입은 상처와 고통☞하느님께로 돌아가라는 표시로 인식☞침묵 가운데 영적 생활 ☞내적 평화의 획득☞다시 그 형제들에게로 돌아감.
이웃들과 내가 만나는 장소는 참으로 중요한 장소입니다. 그곳은 주님을 알아보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활동하시는 장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장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이웃들의 요구와 상황에 무관심하고 공동체에 대한 내 사랑이 결핍되고 있다면 결코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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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vmB5-F_a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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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할까?>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노래를 불렀던 가수 윤복희 씨의 삶을 간단히 살펴봅니다. 윤복희 씨는 극단을 운영하던 아버지 덕분으로 어렸을 때부터 무대에 익숙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의 내용 때문인지 아버지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아이들의 생계를 위해 극단을 쫓아 떠돌게 되며 윤복희 씨 형제들은 고아처럼 길거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잠을 잘 곳과 먹을 것을 걱정하며 살던 중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 윤복희 씨는 어린 나이에 삶의 이유를 잃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출소하였으나 생을 마감하여 그야말로 혼자 삶을 극복해 나가야 했습니다. 이제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는 말의 가사가 더 크게 다가옵니다.
워낙 천재적인 무대 기질이 있었던 터라 열여덟 살부터 미8군 무대에 섰고 때마침 세계적 톱스타 왓 어 원더풀 월드를 부른 루이암스트롱이 방한하였습니다. 루이암스트롱은 한국에 자신보다 왓 어 원더풀 월드를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윤복희 씨를 찾았고 윤복희 씨의 노래를 듣고는 깜짝 놀라 함께 공연하러 다니기로 합니다. 이렇게 윤복희 씨는 소속사에서 집을 세 채씩이나 사 줄 정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 사랑도 찾아옵니다. 서울대 출신이자 독일계 혼혈 가수인 유주용 씨와 결혼합니다. 유주용 씨는 자신보다 윤복희 씨의 능력이 뛰어나다면 일을 그만두고 매니저를 자처합니다. 이때부터 그들의 사이는 벌어집니다. 유주용 씨가 윤복희 씨와 당대 최고 가수 남진 씨의 사이를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싸움을 벌이던 끝에 윤복희 씨는 자신을 믿지 못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그 소문이 맞는다고 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혼 후 정말로 남진 씨와 결혼합니다. 나중에 윤복희 씨는 그 결혼이 유주용 씨에게 질투를 유발하기 위함이었기에 남진 씨에게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거나 윤복희 씨는 자기 남편이자 부모의 역할까지 해 주기를 바랐던 유주용 씨도 자기를 부모처럼 책임지지 못하는 것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윤복희 씨는 일흔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무대에서 혼절하는 때도 있지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나가고 있고 치매만 걸리지 않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전히 혼자이기에 치매가 걸리면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여전히 “내가 만약 외로울 때면 누가 날 위로해주지?”라고 누군가를 찾고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소망은 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바라는 게 틀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받으려면 먼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윤복희 씨는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여전히 부모와 같은 사람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무언가 해 줄 사람을.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부모처럼 자녀를 탄생시키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일입니다. 독립시키는 일입니다. 하지만 충분한 사랑을 받아야 할 때 받지 못하니 그 빈 곳만 바라보며 계속 누군가 나를 위로해줄 사람만 찾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명확해야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행복을 바랐습니다. 행복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여자나 돈, 명예 등이 행복의 조건이라 생각했습니다. 나중에는 ‘사랑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더 지나니 사랑받으려면 사랑해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제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사랑 받기 위해 사제가 되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꿈은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외롭지 않고 싶다”로 해야 합니다. 누가 나를 외롭지 않게 해 줄 것인지 찾는 것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원하는 것은 “~ 하고 싶다”가 되어야 합니다. “~ 하고 싶다”라고 원해야 그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실 분은 하느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만약 “누가?”나 “무엇?”을 찾는다면 하느님이 배제되고 그러면 줄 것이 없어져서 얻을 것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순수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수하게 원하는 것이 결정되었다면 이제 그것을 남에게 해 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해 주려면 부족한 게 없어야 합니다. 먼저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게 해 주시는 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은 다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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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흑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술자리에서 간혹 흑기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술이 좀 과했거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부득이 하게 술을 마셔야 할 때에 대신 술을 마셔주는 우정(?)을 보여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술 상무’라는 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래처와 회식이 있을 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술도 곧잘 마시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직원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지만 친구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LA에 신문 홍보를 오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저를 맞이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 주시는 흑기사입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와 주시고, 제가 있는 동안 차량 봉사를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편안한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아침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부부들도 기꺼이 시간을 내 주곤 합니다. 제게도 흑기사가 되어 주시지만 LA에 오시는 다른 신부님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LA로 가는 발걸음은 늘 가볍고 편합니다.
주변을 보면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 성당의 본당 신부님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나그네 사제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남미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 유럽에서 공부하는 신부님들은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는 다람쥐처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사제관에서 머물다가 소임지로 돌아가곤 합니다. 때로 귀찮을 수도 있지만 신부님은 기꺼이 사제들을 위한 사랑방을 마련해 주십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작년에 손님 신부님들이 왔었습니다. 시카고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메릴랜드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한국에서 은퇴하신 신부님이 머물다 가셨습니다. 기꺼이 흑기사를 하지는 못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머물다 가라고 했던 것처럼 저도 신부님들이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젊으신 신부님들은 알아서 뉴욕을 다니기에 차량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흑기사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지상 최대의 흑기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5000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흑기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어야 했던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흑기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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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36-38: 남을 용서하여라.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36절). 자비는 훌륭한 덕으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며 경건한 사람들에게 최고로 어울리는 덕이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거룩한 이에게나 악인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시다.(마태 5,45 참조) 이 자비는 하느님의 속성임을 항상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한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37절)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허물을 돌아보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의무건만, 남의 일에 참견하느라 바쁘다. 남을 심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단죄하면, 단죄받는 것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른 이의 허물을 찾거나 들추는 대신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다.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시편 130,3)라고 고백한 시편 저자는 그래서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인간의 나약함을 내세우며 다시 용서의 탄원을 드린다. “우리가 티끌임을 기억하소서.”(시편 103,14) 그러니 심판하지 말아야 한다. 심판하는 그대로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태 7,2 참조) 우리는 하느님을 세상에 보여 주고 정의와 용서와 은총으로 심판해야 한다.
이것은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37절) 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일단 올바로 심판한 사람은 은총에 따라 용서해야 한다. 그러면 정의에 따라 심판받을 때, 은총으로 용서받을 자격을 지니게 될 것이다. 정의에 따르지 않고 자기를 위해 보복하려고 심판하지 말라는 뜻이다. 자신을 위해 앙갚음하는 심판은 안 된다는 것이다. 심판하기보다는 훈계하거나 충고하라는 뜻이다. “용서하여라.”(37절) “주어라.”(38절) 용서하고 베푸는 것, 이것은 기도를 싣고 하느님께로 날아가는 두 날개라고 한다. 그러므로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주고, 가난한 이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선을 베풀고, 용서하며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자선을 받고 용서받으며 너그러운 대접을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의 곳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죄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모든 것을 충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아낌없이 후하게 갚아주신다고 하신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38절) 라고 하셨다. 용서는 단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내 안에 미움과 분노가 있으면 바로 나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고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좀 더 자비롭게 용서를 베풀며 하느님과 함께 여정을 계속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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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구약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2). 하느님을 따라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종교 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그들은 속된 것과 부정한 것을 피하면서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하였고, 하느님 말씀 곧 계명과 율법을 철저하게 따르면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에게 거룩함은 하느님의 가장 큰 특성이었기에, 하느님의 백성도 그러해야 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에서 이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아버지로, 그리고 그분의 거룩함은 완전함으로 표현됩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같은 형식의 표현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으로 듣습니다. 구약 성경의 거룩함과 마태오 복음의 완전함은 이제 ‘자비’로 드러납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입니다. 이제 구약의 백성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를 닮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심판받지 않으려고 심판하지 않거나, 단죄받지 않으려고 단죄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용서받으려고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경험으로 이미 심판받지 않았고 단죄받지 않았으며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의 행동보다 앞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그분의 자비를 본받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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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아버지가 자식들보다 다른 이들에게 한없이 자비롭다면 그 자녀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쩌면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자식들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더 너그럽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어려움보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잘못은 그대로 넘어간 일이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은 어떤 일이든 용서해 주기 때문입니다. 자식인 내가 가져야 할 몫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 나의 몫이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지만, 나에게만은 정말 매정한 아버지입니다. 자식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식이 부모가 되고, 자녀를 낳아 사랑하는 법을 조금씩 알아 간다면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충분히 너그러웠고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많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넘치도록 많은 것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아쉬워하였습니다. 그 자녀들도 아버지처럼 살아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이 때로는 우리를 실망스럽게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도와 청은 잘 들어주시는 것 같은데 내 기도와 청에는 묵묵부답이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은총과 복을 넉넉히 주시지만, 나에게만은 고통과 아픔만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 용서받은 일들을, 하느님께 넘치도록 받은 것들을, 그리고 내가 얼마나 나약하고 옹졸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비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받은 사랑과 용서를 되새기고, 그분께 감사해야 합니다. 먼저 감사함을 찾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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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다 원수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덧붙이며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고 가르치셨습니다. 원수마저 사랑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닮은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제1독서의 다니엘 예언자가 이야기하듯이 당신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며, 당신의 뜻을 어기는 원수를 용서하시고 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루카 복음 사가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복음 6장 36절)라고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다른 식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니엘 예언자는 동포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느님 앞에서 자비와 용서를 청합니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함을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하심에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이들을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도,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권고하십니다. 물론, 이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에는 하느님 도움을 청하는 기도가 늘 필요합니다.
어떻게 본다면,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용서를 시작하는 용기 있는 첫걸음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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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복음 6장 36절)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뒤의 둘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1. 곧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는 것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2.<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먼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서 10장 21절)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죄인임을 알아야 하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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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복음 6장 36절)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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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그대 하느님>
루카 6,36-38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나 그대 하느님>
나를 보며
내 앞에 선
그대를 봅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 앞에 선
나를 봅니다
나를 보며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 안에 계신
하느님을 느낍니다
나를 보며
나와 그대 사이에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와 나 사이에
하느님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느끼며
그대 앞에 선
나를 봅니다
하느님을 느끼며
내 앞에 선
그대를 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참으로 나요
그대는 참으로 그대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비로소 그대요
그대는 비로소 나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하느님처럼
우리는 서로 자비요
우리는 서로 용서요
우리는 서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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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 “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 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칭찬을 받는 것은, 자기 역할에 관계 없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난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비난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난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 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악의 세력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선한 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되고 악의 세력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렇다고 선한 이라도 그를 우상처럼 섬기지는 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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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못 찾았을 때가 있었지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행방불명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원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사건에 대해 복음에서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이해의 순간은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깨닫습니다. “맞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면서 그 순간이 은총이었고 감사할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하나같이 우리가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바쁜 신학교 생활에 자기 일하기도 벅찼으니까요. 그때 말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친구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저 자신이 성장했었는지를 말입니다.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용서하고 주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과 단죄를 반복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의 손해가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서두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너무 급한 서두름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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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같은 됫박으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은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 것입니까? 무자비한 사람만 심판하고 단죄합니까?
그런 거라면 심판이란 무엇이고 단죄란 무엇입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묵인해주는 것입니까? 자비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 검사나 판사는 없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심판과 무자비한 심판이 있을 뿐이며 그래서 주님도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심판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볼 때 올바른 심판을 해야 하는데 검사나 판사들이 독재자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또는 그들의 편에 서 있어서 잘못된 심판을 많이 하였고 그래서 참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죄를 지었는데도 죄가 없다고 판결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 자비롭지 않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단죄하지 않음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며 살게 하는 것이기에 죄인에게도 자비롭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인에게의 자비는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자비이고 그래서 죄인에게는 심판도 단죄도 다 자비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단죄가 전부이면 그것도 무자비입니다. 단죄를 하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무자비하다는 겁니다.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돼!’하고 죽여 버리고 말면 그것은 사랑은 없고 단죄만 있는 것이기에 무자비한 겁니다.
미움과 분노의 단죄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누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할 때 단죄할 거리를 찾거나 없는 죄도 만들어 단죄하고는 그를 어떤 식이로든 파괴하거나 심지어 죽여 버리려 들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심판하고 단죄하는 그 무자비한 마음이 남한테만 그러할까요? 양식이 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휘두르는 같은 칼로 자신을 먼저 베고 찌르는 법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남에게 퍼주는 그 됫박으로 그대로 받게 된다는 말씀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죄의식이 없고 남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남을 단죄하면 단죄받고, 찌르는 칼로 찔리는 법이지요.
같은 식으로 용서하면 용서받고 사랑하면 사랑받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면 많은 사랑을 받겠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공평하심이고 정의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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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의 여정, 자비의 학교>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소망이 담긴 자비하신 아버지의 아드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결론하여 성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는데 결국 자비로운 사람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되어가는 “자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자비의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회개와 더불어 아버지의 자비를 배워가는 자비의 학교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자 자비(慈悲)란 글자를 보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사랑할’ 자(慈) ‘가엾이 여길’ 비(悲)입니다. 남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자애롭고 가엾이, 측은히, 불쌍히 여기는 연민(compassion)의 마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 불교식으로 말해 부처님을 닮아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자대비의 너그럽고 큰 사랑은 비단 사람뿐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중생에게 미칩니다. 생태위기, 기후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는 작금의 시대, 불가의 대자대비한 사랑의 실천이 절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수도원 본관의 숙소와 더불어 또 하나의 숙소 명칭도 새삼 적절함을 깨닫습니다. 당시 수도형제들의 생각을 공모했는데 본관의 숙소 “자비의 집”은 제가 제안했으며, 또 하나 “형제의 집”은 다른 수도형제가 제안했습니다. 결론하여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형제들이 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어제 주일은 새벽 5시부터 불암사의 선재동자란 말에서 유래한 선재善財라는 희고 껑충한 순한 개가 하루종일 수도원 ‘자비의 집’ 주변에서 서성이며 수도원 개들과 밥도 먹고 놀다가 저녁 7시쯤 떠났습니다. 이제 수도형제들의 사랑을 받는 선재가 되었습니다. 수사님들이 쓰다듬어 줘도 가만히 있고, 저녁무렵에는 혼자 외로이 피곤한지 쉬고 있다가 불암사로 떠났습니다.
순간 ‘아, 개도 외로워서 수도원을 찾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외로워 시간나는 대로 수도원의 착한 개들과 수도형제들을 찾는 선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델라 자서전을 읽으며 27년 수감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벌은 빛도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서 혼자 지낼 때 였다는 것입니다. 이때처럼 사람이 그리웠던 때도 없었다 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함께 하는 형제들은 물론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에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제가 요즘 심취하여 계속 읽고 있는 책들은 위인들의 평전입니다. 만델라 자서전에 이어, 조선시대 세종대왕 평전, 이이(율곡) 평전, 허균 평전, 우계 성혼 평전을 읽었고 지금은 정조대왕 평전을 읽는 중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순간 평전에 대한 깨달음의 진리는 사랑이, 자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시비를 가리는 일은 참으로 분명했던, 당쟁으로 인한 무자비한 살육의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됐던 선비들의 당쟁사인 조선역사였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뚜렷한 선악의 이분법적 분류요 상대방은 평화공존의 동료들이 아니라 없애버려야 할 대상으로 원수와 같이 여겼습니다.
흡사 좌우로 분열되어 극단으로 대립되어 원수같이 지내는 작금의 정치현실도 연상되었습니다. 이념에 중독되어 광신, 맹신의 지경에 이르면 신앙도 무력해지는 느낌입니다. 자비로우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 교회의 현실이었던지 장구한 교회 역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참으로 절박한 주님의 호소요 간청입니다. 새삼 자비 역시 평생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의식적 자비의 선택에 자비의 훈련, 자비한 삶의 습관화입니다. 바로 이를 위한 우선적 조건이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가 한 셋트입니다. 이런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자비 역시 훈련입니다.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자비의 훈련에 참 좋은 시편 136장 1-26절까지 소리내어 한 번 기도로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조선선비들에게는 이런 인격적인 자비하신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 아예 존재할 수 없었으니 자기 수양에 절대적인 구체적 기도와 회개가 부재할 수 뿐이 없었기에 그처럼 원수라 생각되는 상대방의 적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잔인한 보복이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빛”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의 기도와 회개가 그 모범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기도할 때 회개와 겸손이요 지혜요, 자비와 용서의 회복입니다. 다니엘 기도의 구체적 내용을 인용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는 겸손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마침 수도형제가 보내준 메시지가 심신의 관리에 유익하다 싶어 그 내용을 나눕니다.
1.성격은 얼굴에 나타난다.
2.생활은 체형에 나타단다.
3.본심은 행동에 나타난다.
4.미의식은 손톱에 나타난다.
5.청결감은 머리에 나타난다.
6.배려는 먹는 방법에 나타난다.
7.마음의 힘은 목소리에 나타난다.
8.스트레스는 피부에 나타단다.
9.차분하지 못함은 다리에 나타난다.
10.인간성은 약자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대부분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추스리기위해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저절로가 아닌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구체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회개는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표현됩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명시하지 않음으로 남은 물론 자시도 용서하라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심판할 분은, 단죄할 분은 하느님뿐인데 어찌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이나 단죄는 무조건 보류하고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결코 심판이나 단죄로 결론내어 닫아버리지 말고 늘 보류한채 활짝 열어두라는 것입니다. 사실 착각이나 오해로,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잘못 판단할 위험은 얼마나 많은지요!
앞의 둘은 “하지 마라”는 부정적 금령이요, 뒤에 둘은 “하라”는 긍정적 명령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용서하는데, 나누고 도와주는 선행이나 물질적 나눔인 자선에 지치지말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용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한번 자비의 성덕 점수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기본 점수 2점에다 4항목 각자 2점 만점으로 하여 10점만점으로 계산해 보세요.
저의 경우 기본점수 2점에 3개 항목 도합 6점, 4째 항목 1.5점, 도합 9.5점이니 너무 후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정말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비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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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다시 부활하자!>
오늘 복음(루카6,36-38)은 '자비에 대한 말씀과 남을 심판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고, 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하는 근거는 이것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명령이고, 예수님 친히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자비와 용서의 절대적 전제는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 안에서 보면, '잘못했으니, 죄를 지었으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는 이들의 간절한 청을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다 받아주셨습니다. 돌아오는 이들, 회개하는 이들에게는 조건 없는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15,21)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18,13)
"주님,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당신의 계명과 법규에서 벗어났습니다.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다니9,5.7)
우리가 먼저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그래서 먼저 자비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은 너를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를 용서하고, 너에게 잘 베풉니다.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인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을 더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돌아가려고 회개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고해성사에 대한 부담, 판공성사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나아갑시다!
그래서 다시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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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9CXD3edB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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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남을 심판하지 마라."(루카 6, 37)
서로가
서로에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를 향한
심판입니다.
되돌아갈 수 없는
심판의 길입니다.
심판은 심판끼리
모이고 자비는
자비를
불러들입니다.
심판의 속을
들춰보면
거기에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를
잘 가르쳐 주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닮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오고 가는 것이
심판이 아니라
용서이길
기도드립니다.
더 아파하시는
주님을 만나는
사순입니다.
언젠가 우리도
가야할 용서의
길을 먼저
걸어가십니다.
되돌려드릴 수 없는
끝없는 용서의
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용서를 구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심판은
환불이 되지만
용서는
환불이 되지
않습니다.
용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심판과 단죄의
되질이 아닌
용서와 자비로
되질하는
사순의 오늘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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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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