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84)
복순이
과거 볼 남편 내조하던 복순이
약초 캐다 심마니를 보는데…
친정도 부모 살아계실 때 친정이지 올케가 곳간 열쇠를 허리춤에 차고 있으면 이웃보다 나을 게 없다. 올케는 “장롱 사느라 곳간에서 쌀가마를 들어냈더니 텅 비었어”라며 좁쌀 반 자루를 툇마루에 던져놓고, “잘 가” 이 한마디뿐이다.
복순이가 터졌다. “야 이년아, 땟거리가 없어 초근목피(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어가던 거지년을 친구랍시고 우리 집안에 들여놓았더니 나한테 하는 짓이 겨우 이거냐!”
복순이는 좁쌀 자루를 올케년에게 던지고 친정집을 나와버렸다. 그게 친정과 담을 쌓은 마지막 날이다.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신랑이 과거에만 붙어봐라.’
복순이는 울지 않았다. 잔칫집에 가서 밤늦도록 허드렛일을 하고 남은 음식을 싸와 공부하는 남편에게 상을 차려주고, 장날이면 주막집에 불려 가 눈코 뜰 새 없이 일하고 술 손님들이 남긴 너비아니(소불고기), 닭 창자를 가져와 남편에게 상을 차려줬다.
봄이 왔다. 복순이는 바지를 입고 망태기 메고 산에 올랐다. 더덕을 캐고 하수오·참나물을 뜯고 재수가 뻗친 날은 산삼도 봤다. 약재상에 어린 삼을 팔아서 산 씨암탉에 약재를 넣고 푹 고아 먹여 남편 몸보신을 시켰다. 어느 날 눈앞에 백하수오를 봤는데 손발이 닿지 않았다.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워 큰 숨을 쉬고 절벽에 매달려 풀도 잡고 나뭇가지도 잡으며 게걸음을 하다가 발이 미끄러져 움켜잡았던 풀이 뿌리째 뽑혔다.
“으아악.”
비명은 메아리쳐 골짜기를 울리고 복순이는 몸이 허공에 뜨는가 싶더니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렸다가 복순이는 또 한번 기절할 뻔했다. 관솔불에 괴물 형상이 비쳤다.
“누, 누구요?” 복순이가 물었다.
“나는 이 집 주인 심마니요. 절벽에서 떨어져 기절한 낭자를 업고 왔소”라고 괴물 형상이 답했다.
복순이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일어나 벽에 기대 앉았다. 심마니도 벽을 등지고 앉아 침묵만 흘렀다. 한참 후 심마니는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털어놨다. 불타는 아궁이로 넘어져 화상을 입고 얼굴 반쪽이 번들거리는 괴물이 돼 장가도 못 간 노총각이 됐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살아온 이야기로 꼬박 밤을 새우고 동창이 밝자 복순이는 제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니 이게 웬일인가! 과거 보러 한양 갔던 신랑이 어사화를 꽂은 사모관대에 백마를 타고 집 마당에 들어섰다. 동네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데 복순이는 감격에 북받쳐 마당에 퍼질러 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꿈인지 생신지 볼을 꼬집었다. 급제한 신랑이 어사화 사모를 벗어 복순이한테 씌우고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켰다. 사또도 오고 육방관속 유림들도 모여 삼일간 잔치를 벌였다.
복순이는 급제한 신랑을 따라 말로만 듣던 한양을 갈 생각에 가슴이 부풀어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복순이는 분과 동백기름을 사다 바르며 한양에 가지고 갈 고리짝에 짐을 쌌다. 그런데 한양에 간 신랑에게선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허구한 날 삽짝(사립문) 밖에서 급제한 신랑이 보낼 하인들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게 일이 됐다.
석달이 지났을 때, 복순이는 남정네 복장을 사 입고 단봇짐을 멘 뒤 초립을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날이 저물면 주막에서 자고 동이 트면 걸었다. 보름 만에 한양에 다다라 궁궐 앞에서 신랑을 기다렸다. 퇴청하는 문이 하나가 아니란 걸 수문장에게서 듣고 이레 만에 경복궁 영추문을 나서는 신랑을 보게 됐지만 달려가서 얼싸안지 않았다. 미행했다.
신랑이 서촌 골목을 돌아 돌아 어느 아담한 기와집 대문을 두드리자 한 여인이 대문을 열며 반기는 것이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머물던 통의동 주막집으로 돌아가 생전 처음으로 너비아니 안주에 청주 한 호리병을 마시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복순아 너의 팔자는 이렇다. 운명의 강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보자.”
복순이는 보름여 만에 집에 도착해 하루를 푹 자고 산으로 올라갔다. 세칸 너와집에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릴 때 화상을 입은 심마니 총각이 갑자기 나타난 복순이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둘은 함께 감자밥으로 식사했다. 밥을 먹고 나서 복순이가 말했다.
“나 이 집에서 살래요. 당신과 가시버시가 돼서.”
한참 답이 없던 심마니는 삼경이 돼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관솔불 아래 개다리소반에 찬물 한그릇 떠놓고 복순이와 심마니 총각이 맞절을 했다.
첫댓글 출세를 했으면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겠지요
그러나 이 신랑놈 너무했다
그러게 고생고생해서 사내놈 출세시키는 그런 바보짖은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할짖이 못된다
몹쓸 놈
배은망덕한 넘은 끝이 안좋을겁니다ㆍ
결말이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