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85)
못된 놈 갑석이
소매치기로 설치던 갑석이
십여년 만에 돌아오더니…
열한살 갑석이는 허구한 날 코를 훔쳐 옷소매가 반들거린다. 갑석이는 풍기장터 소매치기다. 손가락 한마디만 한 예리한 칼을 옷소매에 감추고 장날이면 장꾼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마님들 치마 속으로, 노인네들 두루마기 속으로 갑석이의 날렵한 손이 들락날락거린다. 저잣거리를 배회하는 또래 아이들과 싸움이 붙으면 갑석이를 당해낼 아이가 없다. 왈패들도 갑석이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소매치기 칼로 팔도 찌르고 허벅지도 찔러버린다.
심마니 총각이 약재상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나오더니 주막으로 들어가 너비아니에 청주를 시켰다.
“산삼밭을 봤나 보네?”
주모가 개다리소반에 석쇠에서 방금 구워낸 너비아니 접시를 놓자 심마니 총각이 주모 엉덩이를 툭 쳤다. 그때 갑석이 녀석이 슬며시 주막으로 들어와 배시시 웃으며 심마니 총각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새까만 손가락으로 너비아니를 뜯어 입에 넣자,
“이 자식아! 당장 꺼지지 못해!”
심마니가 도끼눈을 치뜨며 으르렁거렸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갑석이 녀석, 남이 들을세라 심마니 귀에 대고 가만히 속삭이니 그의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주모, 여기 너비아니 한근 더!”
심마니가 소리치자 갑석이가 손을 저으며 주문을 취소시켰다. 심마니와 갑석이 한참 동안 조용조용 속삭이더니 갑석이가 무쭐한(묵직한) 돈주머니를 받아 주막을 나갔다. 심마니가 장뇌삼을 산삼이라 속여 약재상에게 팔아 거금을 챙긴 것을 갑석이 알아채고 협박해서 받은 돈의 반을 빼앗아 간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순라군에게 푼돈을 찔러주고 밤중에 과붓집에서 나오는 오입쟁이들을 협박해 돈을 뜯고 장날엔 야바위판을 꿰뚫어 바람잡이로부터 돈을 뜯어낸다. 오 첨지네 혼례예물을 도둑질해서 장물아비한테 팔려다 포졸한테 쫓기는 신세가 된 갑석이는 홀연히 풍기 땅에서 사라졌다. 어려서부터 못된 짓만 골라서 하던 갑석이 잠적하고 나니 뭇사람들은 풍기가 조용해졌다 하고 허구한 날 관아에 불려 다니던 홀어머니도 내심 걱정이 되지만 한편 편하게 되었다.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도 갑석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홀어머니는 그제야 걱정이 돼 단양장에도 가보고 영주장도 헤맸다. 한해가 지나고 두해가 지나도 갑석이는 풍기 땅에 나타나지 않고 갑석이를 봤다는 사람도 없었다. 홀어머니를 빼놓고 갑석이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몇해가 흘렀나, 갑석이 훤칠한 청년이 되어 풍기에 나타났다. 강산도 변한다는 십여년 만에 돌아왔는데 번쩍이는 비단 치파오(청나라 복장)를 입고 나타나 처음에는 동네 사람들이 누군지 몰라봤다. 그날 밤 동구 밖 주막집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람들은 갑석이가 청나라를 오가며 장사할 적에 쓴맛 단맛을 본 청산유수 입담에 넋을 잃었다.
이튿날 갑석이는 심마니를 찾았다. 심마니는 여전히 소백산 자락 외진 곳에서 장뇌삼을 기르고 있었다. 고리짝에 이끼를 깔고 10년근 장뇌삼을 켜켜이 놓았다. 갑석이가 데리고 온 사동이 고리짝을 메고 풍기를 떠났다. 갑석이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청나라로 가서 당나귀 한필을 타고 북경까지 갔다. 동인당이 난리가 났다. 조선에서 온 고려인삼만 해도 불로장수 약재로 떠들썩한데 산삼이, 그것도 수삼으로 왔으니 부자들이 돈 보따리를 싸 들고 몰려들었다.
갑석이는 돈을 왕창 벌었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컴컴한 골목으로 빨려 들어가 홍등이 불 밝힌 단골 유곽으로 들어갔다.
주안상이 거하게 들어왔다. 우두머리 기생이 죽엽 청주 한잔을 따르며 말했다.
“오늘 처음 들어온 여자를 올리겠습니다.”
갑석이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온 여자를 보니 이럴 수가! 우리 조선 여자였다. 병자호란으로 잡혀 왔을 때가 열세살이라 잔심부름을 하며 2년을 보내다 나이가 열다섯이 되자 유곽에 팔려 온 게 바로 오늘이다. 이름이 설주라 했는데 아직 귓불에 솜털이 가시지 않았다.
즐거워야 할 술자리가 침울해졌다. 설주가 계속 눈물만 쏟았다. 갑석이는 자작 술에 취해 자신도 괜히 눈물이 나려 했다. 보료(담요)에 눕다시피 파묻혀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다 갑석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행수기생이 뚱뚱한 유곽 주인과 함께 들어왔다. 갑석이가 입을 열었다.
“이건 동인당에서 발행한 돈표요.”
이튿날 갑석이는 설주를 데리고 조선 땅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청나라 땅에도 아지랑이가 봄바람에 아른거렸다.
첫댓글 갑자기 소나기가내려서 시원합니다.
오늘도 재밋게 잘보고갑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만 갑석이와 설주의 해피앤딩이 좀 아쉽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