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창세기 6,5-8; 7,1-5.10 마르코 8,14-21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행을 가거나, 신문 홍보를 다니면서 자주 ‘짐’을 싸게 됩니다. 꼭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세면도구, 속옷, 책, 노트북, 필기구, 바람막이, 사제복을 주로 가지고 다닙니다.
지난번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저는 깜빡했는데 신부님 한분은 본인의 제의를 가져왔습니다.
성지에서 제의를 빌려 입었지만 본인만의 제의를 가지고 온 신부님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키가 작은 편이라서 공동 제의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 뒤로는 저도 여행을 갈 때나, 성지순례를
가면 저의 제의를 꼭 가지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번에 엘파소에 갔을 때도 저의 제의를 가져갔기에 저에게 맞는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 할 수
있었습니다.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서울대교구에서 좋은 사제를 보냈으니 신부님을 잘 도와주세요.”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제에게는 사제복과 제의가 구원의 방주라는 생각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의로운 ‘노아’에게 구원의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방주는 물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곳은 말이나 소가
여물을 먹던 ‘구유’였습니다. 부유한 집의 안방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살던 화려한 궁궐도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이렇게 누추하고, 겸손한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실 때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여러분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정도면
아무리 부족해도, 아무리 모자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구유와 방주는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주는 항공모함처럼 큰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수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여객선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겸손한 마음을 지니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간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연민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처럼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한다면
이미 구원의 방주를 얻은 것입니다.
주변을 보면 다른 방주를 구원의 방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공과 명예 그리고 권력입니다.
비록 화려해 보이지만, 비록 부러워 보이지만 그것들은 결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를 포함해서 많은 신앙인들이 쉽게 가라앉는 방주를 어렵게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구원의 방주를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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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순 바오로 신부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창세기 6,5-8; 7,1-5.10 마르코 8,14-21
창세기 홍수 이야기의 도입 부분에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는 것과,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인류의 첫 번째 범죄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사건이었고,
둘째는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사건이었습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이제 인간의 죄악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기에 ‘악이 세상에 많아졌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하여 악이 세상에 들어오고,
악은 점점 많아지고, 참 좋았던 세상이 악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를 1장부터 읽어 온 독자라면 참 좋은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세상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의 확장성이 독서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자신도 이러한 죄의 확장성을 이미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죄는 단 한 번, 딱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한 번의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한 또 다른 거짓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다시 다른 거짓말을 하도록 만듭니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죄악이 가진 위험성과 무서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성가들은 ‘죄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요.
‘죄의 뿌리’를 뽑는 것은, 아예 첫걸음을 내딛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작은 합리화는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후회하시어 마음 아파하시게 만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참 좋았다.”(창세기 1장 31절)라고 말씀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서 후회하시고 마음 아파하시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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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구 루치오 신부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창세기 6,5-8; 7,1-5.10 마르코 8,14-21
하늘과 땅
스승 예수님, 우둔한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십시오.
저희들의 관심사는 언제나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이고 저급합니다.
무엇을 먹을 것인지, 무엇을 마시며 입을 것인지, 어디에 몸을 뉘일 것인지 따위가
저희들의 관심사입니다.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사는 동안 늘 그럴 것입니다.
저희들을 불쌍히 굽어보시어 본능적이고 일차적인 문제에 매몰되어
땅만 뒤지며 살지 않도록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고 이끌어 주십시오.
인간의 인간다움은 무엇을 얼마나 지녔는지, 얼마나 호의호식好衣好食하면서
향락을 누릴 수 있는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비록 높은 학식과 지위로 자신을 과시誇示하고 값비싼 명품 옷가지와 장신구로 제 몸을 치장하고
있다하더라도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인간다움을 상실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은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 향해 곧추서는 존재입니다.
땅은 인간이 하늘을 향해 오를 수 있는 발판입니다.
인간이 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하늘을 향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하늘과 땅은 맞닿아있고 하늘을 바라보며 땅에 충실한 사람이 하늘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 맞닿아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하늘은 너무나 멀고 또 먼 훗날의 현실이라
생각하면서 눈앞의 땅에 집착하면 하늘을 잃게 됩니다.
하늘 없이 땅은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땅에 충실하지 않으면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天地는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저희들이 하늘만을 고집하거나 땅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의 성령을 보내 주십시오.
慾望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라 하늘을 외면하지 않도록 지켜주십시오.
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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