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진 요셉 신부
창세기 9,1-13 마르코 8,27-33
오늘 복음도 변함없이 우리를 믿음의 여정으로 이끕니다. 이를 위하여 복음서는 매우 강한 대비의
구조를 두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깨닫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하느님의 계획에 반대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시며 사람들 손에 죽임당하실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노아가 모든 것이 파괴된 땅에서 이제 막 드러난 마른땅과 마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서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는 약속과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계약을 맺으시며 사람의 피가 땅에 흘러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며 하느님 말씀 안에서
모든 순간을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가 말하는 고통받는
주님의 종과 아벨의 피와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구덩이에 버려진 요셉과 구약의 많은 예언자처럼
하느님의 계획 안에서 살아간 의인들의 죽음을 보셨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히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 빛을 받아 옳게 시작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만 어느 순간
인간적인 생각과 마음의 충동에 따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려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만 찾지 말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삶을 살아갑시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 5,7).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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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창세기 9,1-13 마르코 8,27-33
우리는 무엇에 대한 답을 찾을 때 다른 사람이나 다른 정보에 많이 의존합니다.
특히 오늘날엔 정보의 바다인 인터넷 덕분에 구글이나 네이버에 물어보면 그럴싸한 답들이
즐비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자신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묵상하고 발품을
팔아서 답을 찾는 노력은 쓰잘데없는 시간낭비로 생각되고, 쉽게 남이 찾아놓은 답중에
가장 맘에 드는 것을 정답으로 삼아버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들이 이야기하는 답은 비슷한 답일 수는 있어도 정답은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마르 8,27) 물으시고,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8,29)고 물으십니다.
사람들의 대답은 비슷해 보이지만 정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너희가 생각하는 답'을 찾아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그 답을 찾았고 예수님은 그게 정답이라고 확인시켜 줍니다.
그렇습니다. 남이 이야기하는 답은 참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깨달은 사람이 하느님은 이런 분이고,
영성이란 이런 것이고, 깨달음은 이런 것이라 해도 그건 정답이 아닙니다.
내가 깨닫고 체득한 답만이 정답입니다. 오늘 그 답을 찾는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베드로가 찾은 답은 사실 깊은 성찰을 통해 나온 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운좋게도
정답을 맞추기는 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맞지요! 그렇지만 답만 알 뿐, 아직 예수님을 정확히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죠. "맞어.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야.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선 사람의 아들은
먼저 고난과 배척을 받고 죽어야 한다고! 이 말 알아듣겠니?"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비로소 하느님의 그리스도가 된다! 기막힌 교환 아닌가요?
사실 베드로는 못알아 듣지요. 그래서 된통 혼나지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마르 8,33)고.
예수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러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고 그토록 가르쳤건만 아직도 못알아 들은 게죠.
죽어야 산다! 사람의 아들이 죽어야 비로소 하느님의 기름부은 자가 된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 비밀을 우리는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싶지요?
그렇다면 죽으라네요. 오늘은 한번 죽어 보실래요? 에고(ego)를 죽이고, 욕심과 탐욕을 죽이고,
질투와 시기를 죽이고, 세상 달콤함에서 죽어 보세요. 사랑하니까, 사랑 때문에 죽으십시오.
그러면 벗님 또한 하느님 영으로 도유되어 참 생명과 부활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겁니다.
죽지 못해 삽니까? 아뇨! 살기 위해 죽으십시오. 팍팍 썩으십시오. 그제야 부활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깨우치지 않을까요? 그제야 참 생명을 싹틔워내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조금씩 메시아의 운명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회가 되면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마르 8,31)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반드시 ... 하셔야 한다."는 말씀은
그저 단순한 의무나 당위성 이상의 비장한 결단이 담겨 있습니다.
마르코는 덧붙여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2)고 합니다.
말은 입밖으로 내는 순간 더 강력한 구속력을 갖게 마련이고, 공적으로 공포될 때는 배 이상의
무게가 얹힐 겁니다.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 당신이 몸소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이
어찌 수월한 과정이겠습니까만, 예수님께서는 방금 말씀하신 당신의 수난 예고를 더 명백히 하십니다.
그건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에게도 그렇게 하시면서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의 도를 넘은 반박에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마르 8,33)을 들어 꾸짖으십니다.
사실 삶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을 구별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수난 직전에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로 고뇌하실 겁니다.
그리고 결국 "하느님의 일(뜻)"에 순명하실 것입니다.
독서는 홍수 이야기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새와 물고기를 비롯한 모든 짐승이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창세 9,2)고 하실 때, 인류 첫 조상의 범죄가 떠오릅니다.
겁 없이 인간에게 하느님을 대적할 범죄의 올가미를 놓은 뱀과 그에게 맥없이 넘어진 인간.
하느님의 이 새로운 질서 이후에 다시는 짐승의 꾐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하는 인간은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유독 강조하고 있는 "피에 대한 책임"(창세 9,4)에서는 카인의 살인이 떠오릅니다.
당신이 손수 빚은 사람이 타인, 그것도 혈육의 피를 부른 비극을 겪으시면서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런 것을 싫어한다'고, '혹 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책임을 물을 것이니
절대 그러지 말라'고 축복의 자리에서 미리 못을 박으시는 듯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계약을 세우십니다. 여기에도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와 그 자손들과 계약을 세우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너희와 함께 있는 모든 생물과"(창세 9,10)도 계약을 세우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게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요구조차 한 적이 없는 짐승들에게까지 그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 주시는 겁니다.
악하고 부족한 인간 때문에 다른 피조물들이 파멸되는 일은 이제 다시는 없을 겁니다.
인간의 범죄와 타락을 겪으시고 고심 끝에 나온 하느님의 뜻이니 꼭 그래야 합니다.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 품으셔도 될 결심을 굳이 인간과,
모든 피조물과 공유하고 계약을 세우시는 이유는 뭘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처럼,
이 역시 인간이나 피조물에게 전달하는 것을 넘어 당신 스스로에게 명백히 하시는
다짐이 아닐까 헤아려 봅니다.
하느님의 후회와 회심으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제 주제로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계약의 대상이 됩니다. 이 계약은 나중에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으로
이어져 나갈 것입니다.
벗님 여러분, 그 계약 덕분에 우리도 서약을 통해 이 계약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으니
어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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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구 루치오 신부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창세기 9,1-13 마르코 8,27-33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 당신은 천千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입니다. 당신의 그 다양한
모습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 앞에서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마르6,2-6) 당신의 말씀과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당신을 먹고 마시기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형편없는 인간(마태11,19)이라고 판단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헤로데는 당신을 세례자 요한의 현신現身이라 생각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마르6,14-16) 한편, 베드로는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10,41)
당신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당신을 어떤 분이라고 판단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그의 운명도 결정됩니다.
당신을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 판단한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당신을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한량閑良이라 판단한 사람들은 당신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했습니다. 당신을 세례자 요한의 현신現身이라 판단한 헤로데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떨어야 했습니다.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판단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당신을 섬기며 당신이 걸었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저희는 베드로처럼 당신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이지만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입니다. 섬기고 봉사하고 자신을 내어줌으로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하루도 저희가 그리스도인답게 섬기고 봉사하는 날이 되게 하소서.
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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