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88)
한턱 송사
유산받을 생각에 들뜬 오처사
섣불리 한턱 쏘다 빚 지는데…
저잣거리 구석의 올챙이들, 짚신 장수 신 서방, 엿장수 여 생원, 좌판 관상쟁이 오 처사 이렇게 세 사람은 시장 끝머리에 쪼그려 앉아 장사하다가 하루해가 저물 때면 툭툭 털고 일어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선술집으로 들어간다. 평생 가야 안주로 두부 한모 시키는 일 없이 공짜 짠지로 탁배기 몇 호리병에 알딸딸해진 세 사람은 술값을 정확하게 삼등분해서 주모 손에 찔러주고 가버린다.
어느 날 저녁, 관상쟁이 오 처사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내가 한턱 쏠 터이다!”
“워메, 시방 오 처사 뱉은 말씀이 진담이요?”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오 처사의 역정에 신 서방과 여 생원이 자라 모가지처럼 쏙 들어갔다. 어스름이 내리는 저잣거리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오 처사가 갓을 매만져 고쳐 쓰고 어깨를 뻐기며 앞장서고 신 서방과 여 생원이 호위무사처럼 한걸음 물러서서 좌우에서 뒤따랐다.
삼총사가 들어간 곳은 주막이다. 선술집과 주막은 급이 다르다.
“어머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저잣거리 세 거두께서 우리 집엘 다 들르시고.”
“어흠어흠, 여기 청주 한병에 너비아니 두어근 구워 주시오.”
오 처사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나저나 신 서방과 여 생원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다.
몇순배 술잔이 돌고 나서 오 처사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석달을 병석에 누웠던 장인어른이 오늘내일하는 중에 아들딸들 모아놓고 유언을 했는데 글쎄, 맏딸인 우리 마누라에게…. 어흠!”
신 서방과 여 생원은 꼴깍 침을 삼켰다.
“문전옥답 두마지기를 준다지 뭔가.”
문제는 입으로만 받고 논문서는 보지도 못했는데 오 처사가 촐싹대며 물김치부터 마신 것이다.
그날 밤 꼭지가 돈 오 처사를 나머지 두 인간이 부추겨 2차, 3차까지 가고 나니 외상값이 무려 백칠십칠냥이나 나왔다. 더구나 큰 낭패는 오 처사의 장인이 안 죽고 발딱 일어나버린 것이다. 장터 구석으로 주막집 주모가 외상값 받으러 오더니 용봉탕 집 주인이 오고 기생집 집사도 찾아왔다. ‘우리 장인이 죽거든 갚겠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처지라 끙끙 앓던 오 처사가 신 서방과 여 생원에게 통사정했지만 두 사람은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결국 주막은 관아에 오 처사를 고발했다.
“내 사또질 삼십년에 이런 송사는 처음이네!”
동헌 마루에 앉아 있는 사또가 한숨을 토했다. 드넓은 관아 마당은 발 디딜 틈이 없다. 희한한 송사를 구경하러 이 골짝 저 골짝에서 고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온 것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이렷다?”
“네.”
오 처사의 목소리는 모깃소리다. 사또가 끌끌 혀를 찼다.
“오 처사의 장인은 앞으로 나오거라.”
멀찌감치 구경꾼들 속에 숨어서 송사를 구경하던 송 참봉이 화들짝 놀라 걸어 나왔다. 오 처사는 제 발이 저려 숨이 넘어갈 것만 같다.
“모든 잘못의 근원은 송 참봉 당신 때문이야. 빨리 죽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터인데 왜 벌떡 일어났는고?”
“우하하하하하!”
동헌 마당이 뒤집어졌다.
“그때 그 유언은 아직도 유효한가?”
“무효가 되었습니다.”
“와하하하하!”
또 한번 관아를 들었다 놓았다.
사또가 물었다.
“용봉탕 집 주인은 듣거라. 용봉탕 삼인분짜리에 안동소주 한병을 마셨는데 마흔닷냥이면 바가지 아니냐? 서른냥으로 낮춰라.”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춘매관 주인은 계산서를 대폭 낮춰 예순냥으로 하라!”
“네.”
대신 나온 행수기생이 가느다랗게 대답했다.
“판결을 내리겠노라. 옹총망총 오 처사의 한턱이란 첫번째집 주막의 너비아니로 충분하다. 스물아홉냥은 오 처사 몫.”
구경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의 용봉탕과 춘매옥 외상값 구십냥은 셋이서 서른냥씩 나눠서 갚아라.”
“짝짝짜르르!”
사또의 명판결에 박수 소리가 길게 길게 이어졌다.
첫댓글 명판결 같습니다 ^^
재밋게 잘보고갑니다 ~~
ㅎㅎㅎㅎㅎ
명판결은 내렸지만
외상값을 과연
갚았는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