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경덕 베드로 신부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집회서 2,1-11 마르코 .9,30-37
찬미예수님,
우리 신자 분들은 혹시 어린 시절 하느님께 어떠한 기도를 청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저는 순간순간 많은 기도를 했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기도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도를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셨나요? 저는 하느님께 기도를 하면 참으로
재미있는 방법으로 기도를 들어주시곤 했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오락실에 가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아서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툴툴 거리면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지요.
‘하느님, 오락실이 정말 가고 싶은데, 돈이 없어요...’라고.
순간 머릿 속에서 집안 곳곳에 숨겨져 있던 동전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침대 밑에 들어갔던 오백 원짜리, 장롱 속에 굴러들어갔던 백 원짜리 등등,
참으로 많은 돈들이 제 주위에 흩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고,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오백 원짜리 동전을 열심히 찾았고, 장롱 속에 30 센치 자를 집어넣고 열심히 휘저어서
겨우 동전을 찾아서 기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시자,
경악을 금치 못하고, 혼을 내주셨습니다. 침대 밑의 먼지와 장롱 밑의 먼지를 다 끄집어내서
온 집안에 먼지가 굴러다닌다고~
신나게 어머님께 꾸중을 들었고, 하느님께 있는 대로 불평을 토로했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실 거면 곱게 들어주시지, 결국 돈을 찾긴 했지만, 있던 것마저 빼앗기고,
어머님께 배부르도록 욕을 먹게 하셨으니, 당신은 성격이 참 안좋다고~
훗날 시간이 지나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을 때, 그것은
우리의 청원이 때때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함을 알게 해주시려고
하느님이 살짝 비틀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다는 것. 그것은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잡아주실 때,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서도 두렵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뒤에서
아버지의 음성을 듣게 되지요. ‘우리 아들 자전거 혼자서도 잘 타는데’라고.
그 순간 저는 두려움과 걱정스러움 속에 넘어지고 말았지요. 하지만, 한번 두 번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점점 자신감이 붙지요. 어느 순간 아버지의 도움 없이 자전거를 타게 됩니다.
그러나 교만은 나를 위험으로 이끌 듯, 가끔은 건방진 자세로 자전거를 타다가 다치곤 하면,
그제서야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신자여러분, 우리는 마음 속으로 어떠한 청원을 품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신자 분들의 청원이 이뤄졌습니까? 아니면 아직까지도 과정입니까?
행여 어려움이 있다고 하신다면 과정이라고 생각하시고,
또다시 일어서려는 마음 잊지 않길 희망해봅니다.
몇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잘 탈 수 있는 자전거처럼,
우리의 기도도 끊임없이 올바르게 하느님의 대전에 닿을 수 있도록 올곧게 기도하는 마음
잊지 않고 잃지 않길 희망합니다.
“주님께 올리는 기도 분향같게 하옵소서.” 아멘
인천교구 민경덕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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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집회서 2,1-11 마르코 .9,30-37
오늘 제1독서는 아름다운 집회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우리 가운데 누가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오십 배 백 배로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 삶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집회서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여기서 ‘시련’은 우리에게 좋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가장 값진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면서 집회서는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며,
금이 불로 단련되듯이 주님께 맞갖은 이들도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그때마다 “그분을 믿어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하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그리고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관련하여 좀 더 명확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시련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혼란이나 망설임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주님을 따르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반부 이후에는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은지를 놓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습니다.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오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이 당신 곁을 떠나 있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시련 가운데서도 당신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기는 길은 신앙의 참기쁨을 얻는 길이지만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올바로 걷고 있다는 분명한
표징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에도 언제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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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현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집회서 2,1-11 마르코 .9,30-37
모든 것이 뚜렷하고 명백한 예수님에 비해 제자들은 인간적인 욕심과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서로 다툽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하면 전혀 싸울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조금만
더 이해할 수 있다면 세상에 드러나는 지위의 고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내가 더 큰 사람일 거야.’라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안일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은 명백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원하는 ‘사랑’을 실천하기보다 서로 자기가 옳다면서 ‘다툼’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자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뜻을 먼저 헤아리는 것, 그것이 신앙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과 안일한 마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꼴찌가 되라고 합니다.
사실 꼴찌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세상의 일에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버릴 때 가능합니다. 눈에 ‘나’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일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마산교구 박철현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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