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두 트럭에는 고 국장이 타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무릎에 펼쳐놓은 공항 배치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현재 747기는 이 지점, 국제 2청사 10번홀 북서 100미터 지
점에 비상 대기 중이야. 저격 1팀은 먼저 1번 활주로 북측 D구
역으로 진입, 배치 중인 저격 은거물에 잠입한다. 그리고 저격
2팀은 이 지점‥‥‥‥
빠르게 고 국장의 지시가 내려지고 그때마다 o.p 특공 팀장
들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상황에 대한 모든 명령은 내가 직접 지시한다. 보고 발생
전 사격은 절대 용납치 않는다. 상대는 박무영과 이방희라는
걸 명심해야 돼."
그때,고 국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나‥‥‥ 박무영이오.」
대뜸 흘러나온 목소리에 고 국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
다.
「국장,당신이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건 이미 짐작하
고 있소. 당신 입장에선 우리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
들겠지. 그렇다고 되지도 않을 방법을 사용할 생각은 아예 하
지 마시오.」
"내게 경고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소."
「이미 시내 아홉 군데에 CTX를 배치해 왔다는 걸 명심하시
오.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당신의 결정에 따라좌우된다는
걸 잊지 말란 말이오. 그럼.」
일방적으로 전화가 끊어지고, 고 국장이 핸드폰을 차 시트
에 내던졌다.
"제기랄,부처 손바닥에서 뛰노는 손오공 신세로군."
또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고 국장이 잠시 망설이다가 핸드
폰을 집어들었다.
"네, 고 국장이오."
이번에는 박무영이 아닌 유중원이었다.
"어디야?"
고 국장의 목소리가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지금 잠실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
"잠실은 왜?"
「애초부터 그들이 노린 건 남북 축구였어요.」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경기를 취소시켜야 합니다. 그들은 지금 잠실 메인 스타디
움으로 가고 있어요.」
"어떤 근거로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지금이라도 경기를 무산시키고 관중들을 대피시켜야 합니
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나! 경기를 무산시키라고!"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자칫하면 메인 스타디움이 날
아갑니다. 」
"그들은 지금 시내 곳곳에 CTX를 설치해 놓고 천만 달러를
요구하고 있어!"
「그들의 위장술에 걸려든 겁니다. 」
"개들이 왜 메인 스타디움을 공격해! 경기장엔 북측 지도자
와 당 서열 30위 내 핵심 인사들이 대거 참석할 텐데.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이유가 없잖아!"
「CTX가 경기장에서 터진다고 상상해 보시죠!」
"헛소리 말고 당장 센터로 돌아가!"
"경기장은 자네가 염려하지 않아도 물 한 방울 반입 못 하
게 철통 경비를 서고 있어!"
「상대 나름이죠.」
"내 말 들어! 오늘 자네 신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이건 명령이야.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
「파트너가 죽으면서 내 손에 축구경기 티켓을 쥐어주더군
요. 이유는 충분한 편이죠.」
"아무튼 김포 공항 건이 저들의 유인책일지라도 우리 입장
에선 무시할 수 없어. 백화점 옥상이 날아갔잖아 그쪽 일은
그쪽 담당에게 맡겨두라구. 오늘 박무영과 이방희를 못 잡으
면 앞으로 시내 곳곳에서 줄줄이 엄청난 사고가 이어질 거야.
자낸 명령대로 o.p에서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 일이 이
렇게 된 건 순전히·
"이만 끊겠네."
「국장님, 국장님!」
고 국장이 핸드폰을 끄며 오프를 눌렀다.
"이제부턴 박무영이든 유중원이든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겠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다시 한 번 숙지해! ‥‥‥저들은
목적한 공항 구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인질극을 벌일 가능성
이 높아. 그러나 단 2, 3초면 모든 일이 말끔히 끝나는 거야.
공항 입구부터 철저히 그들을 감시하라구."
"인질에 대한 대처방안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게
저격팀을 맡고 있는 비쩍 마른 사내가 고 국장의 눈치를 살
피며 은근하게 입술을 떼었다.
"소용없어. 그걸 무슨 수로 막겠어. 공항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밖으로 몰아낸다 해도 그들은 다른 곳에서 인질을 구
해올 거야."
"그러나 요원들에게 인질을 자원하라는 건‥‥‥‥
"그래야지,어쩌겠어. 일반 승객을 희생시킬 순 없잖아. 인
질을 무리없이 맞바꿀 궁리나 해보라구. 쓰잘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고."
일순 좌중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것을 눈치챈 고
국장이 악다물었던 입술을 떼었다.
"자네들의 심정은 잘 알아. 그러나 우리에겐 뾰족한 방법이
없어. 칼자루는 저쪽에서 쥐고 있다구. 우선은 자원자를 찾아
보도록 해. 자원자가 없으면 내가 직접 들어갈 테니까."
좌중이 침묵에 휩싸였다.
운전석과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100미터 전방 공항입니다.
"알았어! 자,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번 일에 수십만, 아니 수
백만의 목숨이 달렸다는 걸 명심해."
"넷, 알겠습니다!"
팀장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곧 남북 축구경기가 열릴 예정인 메인 스타디움은 사람들
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축, 한민족 월드컵 축구>
<2002 월드컵! 민족이 하나로!> 등 스타디움 안팎에는 수많은
프랜카드,그리고 나란히 게양된 태극기와 인공기의 물결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미 관중은 반이 넘게 들어찬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도 각 게이트 연결 통로 계단 들을 이용하여 꼬
리에 꼬리를 문 수많은 관중들의 발길이 속속 이어지고 있었
다.
여느 날과 다른 이유로 스타디움의 경비는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1층과 2층 게이트에는 전자 검색대가 설치되었고,
그곳을 통과한 사람들은 또다시 날카로운 눈빛을 번득이며 입
구 양편에 서 있는 군경합동 경비대원들에 의해 몸수색과 소
지품 검사를 받아야 했다. 스타디움 내부에서는 특수 장비와
군견을 앞세운 폭발물 검색반이 곳곳을 쉽쓸며 다녔고, 관중
석 사이를 돌아다니는 2인 1조의 경비대원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미 스타디움 내부로 들어온 사람들은 운동장의 들뜬 분
위기에 동화되어 금방 불만이 사그라들었지만 그렇지 않고 길
게 열을 지은 채 입장 중인 사람들은 더딘 발걸음에 불만을
터뜨려놓기 일쑤였다. 사람들의 볼멘소리는 가방 속의 책과
수첩, 화장품 케이스 따위의 소지품 검사를 거치면서 더욱 높
아졌고, 미리 챙겨온 생수와 커피 따위의 각종 음료의 반입을
거절당했을 땐 여지없이 터져나왔다.
"아니, 이것 보세요. 술도 아니고 캔커피가 왜 안 된단 말입
니까?"
A-9 게이트를 들어서던 한 사내가 목줄을 뻗댔다. 사내는
다소 광적인 축구팬인 듯 얼굴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그려져
있었다.
"경기장 방침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아무리 남북한 주요 요인들이 참석한다지만 이거 너무한
처사 아닙니까. 대통령이 이러라고 시켰습니까."
"드시겠다면 여기서 드시고요, 아무튼 안으로의 반입은 절
대 안 됩니다. "
"지금은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으라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경기장 규칙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들
어봐요. 지금도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잖습니까."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오늘은 생수를 비롯한 커피,술
등 각종 음료의 경기장 반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협조와
양해를 부탁 드립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경기장 내 매점
이나 관중석 곳곳에 생수가 준비되어 있으니 필요하신 분은 이를 이
용해 주십시오. 다른 음료수가 필요하신 분은 매점에서 기존 가격의
상 분의 일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으니 번거롭더라도 매점을 이용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이 음료수 값은 버리는 거 아닙니까. 여기서 환불해
주세요."
사내가 어이없는 요구를 경비대원에게 해왔다.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제발 이해를‥‥‥‥
경비대원들과 입장객들 사이에 가끔 이런 실랑이가 벌어졌
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해하고 넘어가 주는 편이었다. 그
러나사내는 심사가 꼬이는 다른 일이 있었는지 영 마뜩찮은
얼굴이었다.
"죄송합니다. 어서 들어 가세요. 뒷사람이 기다리거든요."
사내는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곱지 않은 시선으로
경비대원을 훑었다.
"죄송합니다. "
경비대원이 다시 한 번 사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곧이어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사내 한 명이 경비대원에
게 걸어왔다. 사내는 양복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앞전의 사내
처럼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있었다.
"빨리 끝냅시다. 나 저 사람 친구요."
사내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경비대원의 시선이 돌려졌
다. 검색대 근처에서 앞전의 사내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어서 가쇼."
검색대를 통과한 두 사내가 나란히 경기장 안으로 걸어들
어갔다. 비록 얼굴에 페인팅을 했지만 두 사내는 박용상과 배
원석이었다.
D-2게이트를 향해 검정 선글라스와 바바리 코트,빨간색
가발을 머리에 두른 여자가 들어섰다. 여자는 조금의 머뭇거
림없이 전자 검색대를 통과했다.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여자는 곧장 소지품 검사를 위해 여자 경비대원 앞으로 걸
어갔다.
"소지품을 꺼내 놓으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정말입니까?"
"그래요."
미심쩍어 하며 여자 경비대원이 여자의 몸을 수색했다. 여
자의 말처럼 몸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여자 대원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여자를 쏘아보았다.
"전화번호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죠. 필요한 건 남자가 다
사주니까."
대원이 피식 웃으며 턱짓으로 통과하라는 손짓을 했다. 대
원은 여자를 그렇고 그런 여자로 판단한 것이다.
여자가 게이트를 통과하고 그 뒤로 중년의 사내가 전자 검
색대를 통과했다. 무사 통과. 소지품 검사에서도 중년 사내는
아무것도 문제될 게 없었다. 그 역시 주머니에선 아무것도 나
오지 않았으니까.
"나 저 여자 오빠요. 난 저 여자만 쫓아다니면 아무 걱정
없어 ."
중년 사내가 서둘러 여자를 쫓아갔다. 두 남녀가 곧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 여동생의 그 오빠로군, 누군가 뱉어놓는 말에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대원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들 옆 벽에는 두 남녀의 몽타주가 수평으로 붙어져 있었다.
간첩 지명수배자 박무영과 이방희였다.
시선을 정면에 묶어둔 박무영이 옆의 이명 현에게 짧게 끊
으며 말했다.
"철재 난간, 세로 버팀봉, 열아홉 번째."
이명현의 눈앞으로 이제 철재 난간이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열여덟, 열아홉.
이명현이 발걸음을 우뚝 멈추고 주위를 쓰윽 살펴본 뒤 재
빠른 솜씨로 버팀봉 하나를 뜯어냈다. 그 속에서 미끄러져 나
오는 총기의 부속품들.
"안현철이 숨겨왔지. 이틀 후에 죽었지만."
말없이 이명현의 얼굴을 일별한 뒤 박무영이 미련없이 발
길을 돌렸다.
‥‥‥‥잠깐만요."
이명현이 박무영을 불러세웠다. 그녀의 손 안에는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 인식표가 들려져 있었다.
"이거‥‥‥‥
"더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에요."
"이유는?"
이명현의 침묵에 박무영이 말없이 인식표를 건네받아 바지
주머니 속으로 찔러 넣었다.
두 사람이 헤어지고, 게이트를 통과해 관중석에 앉은 박무
영이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는 v.i.P석을 쓰윽 바라보았다.
이미 이방희는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대신에 어디선가 나
타난 박용상과 배원석이 박무영의 뒤로, 왼편으로는 이원두가
각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준비는?"
"H-7게이트 연결 통로에 덧붙은 화장실이 적당합니다. 일
반인은 드물고, 주로 이곳 경비대원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
이원두가 빠르게 보고했다.
"먼저 박용상과 배원석이 옷을 갈아입는다. 정확히 십 분
후에 이원두와 내가 간다. "
박용상과 배원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2인1조로 움직이고 있
는 경비대원들의 뒤를 태연하게 쫓아갔다.
두 사람이 모습을 감춘 후 이원두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
다.
"이방희는‥‥‥?"
"어딘가에 있겠지."
"오긴 온 겁니까?"
"나를 안 믿나."
"아, 아닙니다. "
"이방희는 배신하지 않는다. "
"안현철과 수가 당했습니다. 모두 이방희의 실수였습니다. "
"판단은 내가 한다. 책임문책 역시 내가 결정한다. "
"유중원은?"
"파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고 국장이란 자와 함께 움직이지
않은 건 분명합니다. "
"어쩌면 이곳에 나타날 수도 있겠군"
"그 말은 이방희가 그에게‥‥‥‥
"함부로 판단하지 마라. 이번 일에 우리는 목숨을 걸었다.
이방희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수족관 일은?"
"이방희하고는 상관없다.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야. 그동안
너무 오랫동안 한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는 게 실수라면 실수
였겠지."
"그래도 이제까지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장길이란 자가 덮쳤습니다. "
"이장길은 o.p에서 유중원과 맞먹는 실력자야. 이방희의 수
족관에 도청기를 달아놓을 정도로‥‥‥ 이장길은 어떻게 됐
나?"
"확실하게 확인은 안 됐지만 주변 상황으로 봐서 죽은 것
같습니다. "
"이방희가 자꾸 걸립니다. 유중원과의 관계를 너무 오랫동
안 용인해준 것 같습니다. "
"가자. 시간 됐다. "
박무영을 뒤따라 이원두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
람이 사라진 후 잔뜩 멋을 부린 양복 정장차림의 사내가 금방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어성식이었다.
"이번 기회에 공항에서 뭔가 보여줘야 하는 건데. 젠장, 이
게 뭐야? 신참하고 경기장 보초나 서고 있으니."
그의 눈길이 머무는 곳에 키만 머쓱하니 큰 사내 하나가 연
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하여튼 저 녀석 재수없어. 신참 딱지를 떼고 처음으로 출동
했는데 이 선배님이 죽었으니‥‥‥‥
그때 스피커를 타고 장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약 삼십 분 후인 2시부터 본 경기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경
기장 질서유지와 안전을 위해 관중 여러분께서는 가급적 불필요한
자리 이동을 삼가해 주시고‥‥
장내방송이 끝나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어느
새 관중석은 빈자리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로 인
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도 수많은 게이트를 통해 입
장객들이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다. 벌써 곳곳에서 북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경기장의 분위기를 한껏 돋
우려는 생각인지 스타디움 상공으로 전투 곡예비행단의 묘기
가 속출되고 있었다.
"야, 신帶"
지금쯤 공항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다가 불현듯
어성식이 신참을 불렀다.
"네, 어 선배님!"
신참이 달려와 어성식 앞에 부동자세로 섰다.
"너 키가 몇이야."
"2미터에서 십 센티 모자람니다. "
"어쭈, 누가 키자랑을 하랬어. 너, 나 키 작다고 얕보는 거
지? 그래?"
"아, 아닙니다. "
"그런데 2미터는 왜 나와. 너 누구 야코 죽일 일 있어.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공항에 못 갔는지 알아! 엉!"
"죄, 죄송합니다. "
"순전히 너 교육시키느라고 그러는 거 아냐. 난 임마 이 선
배님의 복수를 해야 한단 말이야.너 때문에 내 꼴이 이게 뭐
야!"
"죄송합니다. "
"짜식이 건방을 떨고 그래. 내가 너만할 땐 온 동네 어항
청소를 나 혼자 다했어. 너 세상 좋아진 줄 알아."
"넷, 어 선배님."
어성식과 신참의 하는 행동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킥
킥거리며 웃었다. 한데도 어성식은 사람들의 시선 따윈 아랑
곳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는 작정하고 신참을 골려주
려는 속셈인지 신참의 비위를 더욱더 긁었다.
와아!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농악대와 남북 국기를 선두로 남북 축구 대표팀이 함께 운동
장으로 입장하고 있었다. 관중들의 손에 들린 태극기와 인공
기가 춤을 추었고, 공중으로 뿌려진 색색의 종이 꽃가루와 오
색 풍선이 아름답게 흩날렸다. 삼군 합동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리는 가운데 관중석에서도 북과 꽹과리의 요란한 소리가 신
명을 돋웠다. 한마디로 경기장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지금 막 전주 농악대를 필두로 남북 단일팀 수B조가 입장하고 있습
니다. 전열의 이광희, 박선호,고재현 선수,그 뒤로 북한 최고 공격수
정인철 선수, 김상호 선수‥‥
특공 복장의 사내 두 명이 화장실로 들어섰다. 이야기로 보
아 두 사람은 상급자의 흉을 보고 있었다. 소변기에 달라붙어
서도 두 사람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고, 연신 낄낄거리는
소리가 화장실 안을 울렸다. 그때 소리도 없이 두 사내가 그들
의 등뒤로 바짝 다가섰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아?"
"얘기해 봐. 어떻게 됐는데?"
"이게 개구리 배지 특공의 배라고 할 수 있어. 그러면서 감
찰관님이 배불뚝이의 배를 지휘봉으로 쿡쿡 찌르는 거야. 하
하, 그때 그 배불뚝이의 표정을 봤어야 하는 건데, 이건 걸작
이었다니까. 근데 더 놀라운 건 배불뚝이의 배가 지휘봉에 밀
려 쑥 들어간 거야. 깜짝 놀란 감찰관님이 배불뚝이의 배를
들여다보는데‥‥‥ 하하, 거기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배꼽을
잡았다니까. 하하, 우습지?"
"아니 ."
전혀 낮선 목소리에 이야기를 늘어놓던 특공의 고개가 옆
으로 돌려졌다.
옆의 동료가 바닥에 고꾸라지고 있었다. 그의 목에는 독침
이 꽃혀 있었고,그 옆에는 보란듯이 특공 복장의 낯선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배원석이었다.
"다, 당신 뭐야!"
당황한 특공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인민군 특수 8군단 특수요원 박용상."
대답은 엉뚱하게도 특공의 바로 뒤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특공경의 목을 누군가의 팔이 감싸쥐며 우두둑 목뼈가 부러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특공은 비명 한번 질러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죽은 특공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박
용상이 이미 숨을 거둔 특공을 잠시 동안 내려다보았다.
"서둘러 "
배원석이 재촉했다.
두 명의 특공의 시신은 화장실 맨 안쪽, 청소도구를 보관하
는 창고에 처넣어졌다. 때를 맞춰 박무영과 이원두가 안으로
들어섰다. 박용상이 말없이 벗겨낸 옷을 박무영에게 내밀었
다.
무리진 워커발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복잡하게 얽힌
지하복도를 익숙한 발놀림으로 걸어가는 그들은 모두 특공복
장에 손에는 B's 자동소총이 들려져 있었다. 그들의 발길이 멈
춘 곳은 중앙 변전 통제실 앞이었다.
그들은 조금의 머뭇거림없이 통제실 앞 경비실을 노크했다.
"무슨 일이죠?"
"지금부터 우리가 이곳을 접수한다. "
"그런 명령 못 받았는데요."
"명령은 내가 한다. "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 사내가 경비요원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경비요원은 의아한 표정 그대로 앞으
로 고꾸라졌다. 경비요원의 머리에서는 금방 시뻘건 핏물이
새어나왔다.
"안으로 끌고 들어가."
맨 앞 사내의 명령에 뒤에 서 있던 사내 두 명이 경비요원의
한 팔을 각기 잡아 통제실 쪽으로 끌었다.
사내 둘이 중앙 변전 통제실의 문을 워커발로 박차고 들어
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통제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
으로 쏠렸다.
"무슨‥‥‥ 일이시죠?"
입구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사내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
어나며 앞에 우뚝 선 사내를 쳐다보았다.
"볼일이 있어서."
특공경복장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별안간 총성이 터
졌다. 통제실 안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타탕! 타타탕!
상황은 단 몇 초 만에 끝났다. 한 명을 제외하고 통제실 직
원 모두가 무리들의 총알세례에 목숨을 잃었다. 혼자 남은 남
자 직원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몸을 떨어댔다. 그는
두꺼운 검정테 안경을 코에 걸치고 있었다.
사내 한 명이 남자 직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오랜만이야."
직원은?사내의 얼굴을 쳐다보곤 까무러치게 놀라 뒷걸음질
을 쳤다.
"다, 당신은‥‥‥ 며칠 전,통제실 앞을 얼정거리던‥‥‥‥
"그래 나야. 우리가 며칠 만에 보는 거지?"
"며, 며칠 안 되었죠."
"그때는 안경을 안 썼던 것 같은데 그새 패션이 바뀌었군.
그래 맞은 데는 어때?"
사내가 안경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척하다가 불쑥 안
경을 벗겨냈다. 사내의 눈두덩 이에 시퍼런 멍자국이 나 있었
다.
"이런! 아직도 그대로잖아."
"이, 이제 거의 나았어요."
"며칠 전 내가 누구냐고 물었던 것 같은데?"
"말해주지. 나, 배원석이야. 인민군 특수 8군단 소속이지. 됐
나?"
안경이 사색이 된 얼굴로 배원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오늘은 쓰잘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해.
알았지?"
‥‥‥‥"네."
"좋아. 중앙 통제 시스템 컴퓨터 앞에 앉아."
안경이 순순히 모니터 앞에 앉았다.
중앙 통제 시스템 상단에 설치된 여러 대의 모니터를 박무
영과 대원들이 유심히 쳐다보았다.
"소리 켜."
배원석이 안경에게 명령했다.
안경의 손이 버튼을 누르자 관중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장
내 아나운서의 멘트가 비어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