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하면 유성용, 이순신 장군의 이름이 익숙하지만, 실제로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은 바로 장수도 무사도 아닌 중인 출신의 역관 홍순언(洪純彦 1530~1598)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의 역사를 바로 잡는 큰 공을 세우기도 했는데, 그 일이 가능하게 된 계기가 참 재미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그가 바꿔놓은 조선 역사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조선시대 중국과 일본 등과의 외교통상의 관계를 수록한 책이다. 조선 외교의 기본 방침 이였던 사대교린과 관련된 외교사례와 더불어 일선에서 활약했던 역관들의 행적이 기록되어져 있다. 그 중에 홍순언의 일화가 소개되어있다.
선조 7년(1574년) 사신단과 함께 홍순언은 통주(通州)에 도착했다. 조선을 출발한지 두 달 만이었다. 통주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고 거리를 걷던 그의 발걸음은 어느 기생집으로 향했다. 그와 조선의 역사에 기록될 운명적인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홍순언과 한 여인의 예상치 못한 인연이었다. 기생집을 찾은 홍순언의 눈에 한 여인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 여인은 소복을 입고 있었다. 상복을 입고 나타난 그녀에게 연유를 묻자 그녀는 부모가 역병에 걸려 죽었는데 장례를 치를 돈이 없어 마지못해 이곳에 나왔다고 했다. 그 말에 홍순언은 300금이라는 큰돈을 준다. 은혜를 입은 기생은 홍순언의 이름을 묻지만, 홍순언은 "홍"이라는 성씨만 알려준 채 그대로 나왔다. 귀국 후 홍순언은 공금 빚을 갚지 못해 여러 해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곤경에 처한 여인을 구해준 의로운 남자 홍순언에 대한 기록은 역사서뿐만 아니라 소설집도 상당했다. 그런데 통문관지에는 역관인 홍순언의 얘기를 왜 이렇게 자세하게 적어놨을까?
태조 3년(1394년) 조정이 발칵 뒤집힌다. 태조 이성계가 믿기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명나라에서 조선왕실의 가계에 대해 잘못 기록한 사건이었다. 600여 년 전 조선조정을 뒤흔들었던 문제의 발단은 대명회전(大明會典) 정덕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명회전은 명나라의 법전으로 당대의 법령과 제도를 집대성해 놓은 책이다. 이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 되어진 것이다. 이인임은 고려말 이성계와 권력을 다투던 정적 이였다. 조선은 정통성을 중요시 했기에 이성계가 자신의 정적 이였던 사람의 아들로 기록된 것은 당시 절대 참을 수 없는 일이였다. 그리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내용을 올바로 고치려고 했다.
조선은 그 후 200여년에 걸쳐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지만, 대명회전의 기록은 고쳐지지 않았다. 명나라에서는 분명한 잘못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에서 계속 매달리는 외교현황을 보면서 정치적인 협상카드로 쓰기위해 조선의 청을 계속해서 거절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결되지 않고 있던 종계변무(宗系辨誣: 잘못 기록된 왕실의 가계를 시정하기 위해 명나라에 주청한 일)를 선조 17년(1584년) 홍순언이 다시 맡게 되었다. 홍순언은 이미 10년 전 종계변무로 북경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도 여러 이유를 대며 조선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런데 홍순언 일행이 북경의 관문인 조양문에 도착했을 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명나라 예부시랑(외무부차관) 석성(1538~1599)이 홍순언을 마중 나온 것이다. 예부시랑이 조선 역관을 맞이하러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다. 전례에 없는 아주 파격적인 접대였다. 거기다, 예부시랑 아내는 홍순언에게 절까지 올렸다. 예부시랑의 아내는 통주에서 만났던 그 여인이었다. 홍순언 덕에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몸까지 지키게 된 은혜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석성 예부시랑은 홍순언이 북경에 온 이유를 듣게 되고 두 달 후 드디어 대명회전은 조선의 요구대로 바뀌었다. 수정본인 대명회전 만력본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당시 조선조정은 역관 홍순언에게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홍순언이 돌아왔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보면 당시 선조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알 수 있다. 외교적인 자신감과 백성들에게 왕실의 떳떳함을 보일 수 있었기에 큰 의미가 있었고 경사였다. 선조 23년(1590년) 임금은 종계변무를 성공시킨 신료들에게 광국공신(光國功臣)의 칭호를 내리는데 19명의 광국공신중 역관은 홍순언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우림위장으로 임명했다. 우림위장이란 임금을 경호하는 군대사령관으로 종2품에 해당된다. 이는 역관으론 오를 수 없는 관직이었다. 또 선조는 당릉군(唐陵君)이라는 군호를 하사하게 되는데, 군호를 받게 된다는 것은 왕실과 핏줄이 같다는 뜻으로 신하로써는 최고의 명예였다.
홍순언의 활약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 상륙 하루 만에 동래성이 점령되고 20일 뒤에 한양까지 함락되었다. 선조가 치욕스런 피난길에 올라야할 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선으로썬 명의 도움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명 조정은 조선의 파병을 주저했다. 조선파병을 주장한 사람은 오직 병부상서(국방부장관) 석성 한 사람 뿐이었다. 명이 조선을 돕는데 주저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나라는 왜를 주목하면서 조선도 함께 의심하고 있었다. 조선이 왜와 함께 명나라를 공격하려한다는 소문이 요동에 널리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보름 만에 선조가 평양까지 피난을 오자 명나라 조정의 의심은 더해갔다. 임금이 피난을 가장하여 왜군의 길잡이가 되어 북상한다는 거였다. 명은 사람을 보내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 명의 파병을 기다리는 선조로써는 암담한 일이였다.
사태가 다급해지자 석성은 다른 고위사신이 아닌 역관 홍순언을 급히 부른다. 명이 조선을 믿게 하려면 조선에서 움직임을 보여야 했다. 석성의 말대로 급히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청했고, 결국 명에서 원군을 파병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파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종계변무의 성공에서 보듯 홍순언의 힘이 많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순언은 경비를 털어 무기재료를 구입한다. 명에서 반입이 금지된 물건 이였지만, 석성의 허락이 있었다. 활을 만드는 물소뿔과 화약의 재료가 되는 염초를 구할 수가 있었다. 홍순언의 활약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선으로 돌아 온 홍순언은 명나라장군 이여송의 통역관이 되어 전장을 따라 다닌다.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면서 전세는 반전됐다. 이후 7년간의 전쟁이 계속됐고 명은 총 21만명의 군사와 882만의 은화를 지원했다. 마침내 1598년 9월 왜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홍순언은 왜란이 끝나는 그 해에 자신의 임무를 다 한 듯 세상을 떠난다. 파병을 주장한 명나라 석성은 막대한 군비소모에 책임을 물어 투옥됐다가 결국 옥사하고 만다. 석성의 후손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조선에 귀화했다. 자신 때문에 가족들이 위험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그의 아들 석담(石潭)을 수양군(首陽君)에 봉하고 토지를 하사했으며,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로 삼았다. 석성의 아들 석담이 해주 석씨의 시조이며, 자손들은 고위 관리를 역임하고 가문을 빛냈다. 현재의 집성촌은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와 산청군 영서면 일원이다.
홍순언과 한 여인의 짧은 만남이 200여 년을 끌어온 외교적 난제를 해결했고, 임란이라는 국가위기 상황에서 명군의 파병을 끌어냈으니 사람의 인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석성과 그 부인의 후손이 이 땅에서 홍순언의 후손과 함께 살고 있으니 홍순언과 그 여인의 인연은 아직도 끝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