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0.
2006.03.08 이제 교도소에서 공보의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이 2주 정도 남았다. 남은 시간 동안 그나마 지켜온 자신에 대한 긴장을 잃지 않기 바라며 정리 글을 쓴다.
1.
교도소에서 의사로 일한다는 건 복잡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의사란 사회 밑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편안한 위치에서 관찰하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무언가를 베풀고 있다는 환상까지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묘한 자리였다. 어떤 이들은 자기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어려운 조건에서 살아가지만, 나와 같이 어떤 식으로든 혜택을 입은 몇몇은 주어진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돕는 것이 된다.
언제였던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으며 참 글이란 게 무책임하구나, 글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고아로 자라난 사형수와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젊은 여성의 자기고백과 사랑 그리고 화해를 다루고 있는 그 책은. 삶의 극단에 몰린 사람들이 보여주는 교도소에서의 극적인 화해. 소설을 위해 재구성된 현실이랄까.
교도소는 그렇지 않다. 죄를 지은 사람도 그렇지 않다. 1년이란 시간이, 하루 5분 정도의 시간이 충분치는 않았겠지만, 나는 살인범들이나 강도, 성폭력범에게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 것들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악독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교도소에서도 그 ‘악독함’으로 인해 더 많은 것들을 누리기도 했다. 전과 8범, 9범이 넘어가는 재소자들은 교도소 시스템과 교도관들의 약점을 잘 알고 또 잘 이용했다.
그들과 마찰이 생길 때면, 4년 전 기억이 났다. 국가인권위원회 소속으로 교도소를 찾아갔었다. 그 때 목포와 진주 교도소를 조사하며 느꼈던 먹먹함은 오랜 시간 가슴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누구였던가. 지나가는 우리를 붙잡고 감방 창살에 매달려 뭐라 뭐라 소리를 쳤었다. ‘이렇게 왔다 가는 게, 무슨 인권위원회냐고.’ 교도관들이 제지를 했었다. 2.5평방에 5명이 들어가 있었던가. 외부사람이 왔다고 정자세를 한 채로 줄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 앞 복도를 걸어가면서 흘깃흘깃 뺑기통이며 치약, 칫솔들을 보는데 그리 민망했다. 언젠가 교도소 사람들의 건강 문제도 고민되어야 할 텐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먹먹함. 그것이 논산에서 훈련을 마치고 나온 초보의사를 교도소로 이끌었던 힘이었을까.
2.
많은 걸 배웠다. 감기약과 변비약을 처방하는 방법도, Cefa 계열 항생제를 주사로 투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레르기 반응 검사를 먼저 해야 한다는 것도, 마약 환자들이 대부분 C형 간염에 걸린다는 사실까지, 의과대학에서는 배웠을지언정 환자를 만나는 초보의사에게는 새로운 것이었다. 한쪽 귀가 안 들린다고 찾아온 재소자의 귀를 otoscope으로 보고 나서 ‘고막이 터진 것 같냐’는 간호사님의 질문에 아무 말 못하고 머뭇거리던 그 순간을 난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비인후과 실습을 돌지 않았던 게 그토록 후회스러울 줄이야.
내게는 첫 사회생활이었다. 때로는 군대조직만큼 권위적인 교도관 조직을 처음 알았고, 어디서든 튀는 것을 싫어하는 공무원 조직을 알아가면서 그 분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워나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 나이어린 의사라고 무시하듯 말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고 공보의라는 신분으로 인해 싸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참아서도 안 되는 순간들 역시 걱정거리였다. 의무과 직원 분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아이들 교육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의무과 창문을 열고 화분을 밖에 내놓으며 무럭무럭 자라라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년교도소 간호사님 모습이 참 보기 좋았었고, 구치지소 간호사님이 재소자들을 대하는 것을 보며 매번 감탄하곤 했었다.
3.
병역 거부로 들어온 여호와의 증인 아이들을 만났고, 사람을 대할 때면 항상 말 꼬리가 올라가며 협박하듯 말하는 조직에 속한 아이들을 만나기도 했다. 손등에 문신을 새기겠다며 건전지에 들어있는 납을 묻혀서 볼펜으로 긁다가 벌겋게 잔뜩 부은 녀석들, 성기를 키우겠다며 스테로이드 연고를 잔뜩 넣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된 아이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엄살을 지독하게 떨며 매일매일 죽을 것처럼 뒹굴어서 외부병원에 나가서 검사를 받게 하면 아무 이상이 없는 한 녀석에게, 알면서도 매번 속았다. 지나가다 한 번씩 들릴 듯 말 듯 쌍시옷 들어가는 욕을 하는 아이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만나면 어이. 공보의 아저씨. 수고해요. 하고 공차는 녀석들.
구치지소에서 만난 환자들은 대개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 화가 나면 곧바로 들이대는 소년교도소 아이들과는 달리, 그들 중 영악한 한 둘은 웃으면서 친절한 태도로 사람을 협박하기도 했다. 전에 있던 교도소에서 꼭 이상하게 밤 12시 30분만 되면 배가 죽을 것처럼 아프더라구요. 어쩔 수 없이 의사 선생님이 일주일 내내 밤에 들어오셨지요. 그러고 나니 선생님이 저를 정말 사랑하셨어요. 라며 웃으며 말하는 사람. 이렇게 나오시면 죄송하지만 교도소장님 면담을 신청할 수밖에 없다고, 당장 죽식을 안주면 오늘부터 단식을 들어가겠다던 사람까지.
그래도 소년 교도소보다는 구치지소에서의 생활이 더 좋았다. 구치지소 환자들은 성인이어서 설명을 하면 일단 받아들이고 또 처방한 약을 시간에 맞추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 이틀 간격으로 증상이 바뀌고 때로는 의무과에 와서 자기가 무엇이 아픈지 생각해내는 소년교도소 아이들과 달리리 지속적으로 고혈압, 당뇨병을 치료하며 병을 지켜볼 수 있는 것도 괜찮은 일이었다. 마약이나 사기범과 의사-환자 관계를 맺기 참 어렵다는 것도 구치지소에서 알게 된 것이었다.
대부분의 재소자들을 만나는 일은 즐거웠다. 혈압이 높으니 커피를 안 드셨으면 좋겠다고 하니 정말 커피를 완전히 끊어 1주일 만에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온 분이 있었다. 어렵지 않았냐고 감방 안에서 먹을 게 별로 없는데 어떻게 커피를 끊었냐고 하자, 앞으로도 끊을 수 있다고 큰소리로 초등학생처럼 말하던 재소자였다. 그동안 치료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출소하기 전날 의무과를 찾아온 재소자들 몇몇이 기억난다. 소년 교도소에서 간병일 도왔던 한 아이는 출소 후 의무과에 전화를 해 내 전화번호를 알아내 밥을 사달라고 찾아왔었다. 지금도 가끔씩 연락이 온다. 얼마 전에는 여자친구랑 바닷가로 놀러가려고 하는데, 어디가 좋냐고 전화가 왔다. 이놈아. 선생님이 그런 걸 어떻게 아냐. 네가 더 잘 알지. 아! 그렇습니까.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4.
목차에 써 놓은 몇몇 글들은 2005년 4월부터 2006년 3월까지 교도소에서 의사 생활을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2005년 4월부터 12월까지는 소년 교도소(만 19살에서 23살)에서, 2005년 12월부터 2006년 3월까지는 구치지소에서 일을 했었다. 많은 것들과 부딪치며 주변에 고민을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 홀로 글을 써서 생각을 정리했었다. 벌써 1년이 됐구나.
2006.03.08
천안구치지소 진료실에서
김 승 섭
white-mount@hanmail.net
2006.03.08. 들어가며
2005.04.25. 동료에게 물려서 온 아이
2005.04.30. 영화 <십자가를 진 아이들>
2005.05.01. 선입견과 싸워야 한다.
2005.05.02 교도소에 신입재소자가 오면
2006.05.06 발목보호대를 어떻게 해야 하나
2005.05.07. 응급호출
2005.05. 성추행, 행동장애 그리고 정신병
2005.05. 아. 매너리즘
2005.05.24 미군범죄자를 진료하면서
2006.06.02. 화가 난다.
2006.06.16. 여호와의 증인
2006.06. 저들을 미워하지 않게 하소서.
2005.06.29. 사회로 나가는 K와의 대화
2006.08.18. 어려운 시간이 계속된다.
2005. 소년 교도소 단상.
2005.10. 초보 의사, 교도소에 가다.
2005.12.29. 구치지소 파견 3주째
2006.02.17. 세상에는 정말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2006.02.21. 그들과의 티타임
2006.02.23. 내가 살아가는 자리를 넘어선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2006.03.06. 도대체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하는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