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의 장원, 한라산 산철쭉 길을 걷다
죽기 전에 꼭 걸어봐야 할 아름다운 우리 산길이 있다. 그 길이 바로 한라산 윗세오름과 방아오름까지 산철쭉 군락지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두고 굳이 돈 들여 다른 나라를 찾아 무엇 하겠는가? 거기에 천상의 화원이 있는데 말이다.
반도 이남의 제일 높은 한라산은 워낙 체적이 커서 산에 들어가면 산길을 타는지 평원을 걷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이러한 한라산 산정의 드넓은 평원엔 초여름이면 짙붉은 산철쭉이 피어나 말 그대로 산상의 꽃밭이 된다. 나는 이 길을 우리나라 제일의 트레킹 코스로 추천하고 싶다.
 안개비를 맞고 오르던 우리는 하늘의 도움으로 윗세오름에 도달하자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산철쭉은 봄의 대미를 장식하는 꽃이다. 산과 들을 수놓았던 꽃들이 하나 둘씩 사그라지면 마지막으로 산철쭉이 화려하게 산등을 채운다. 산철쭉은 아름다움이 아닌 화려함이며, 고움이 아니라 현란함이며, 은근함이 아니라 눈부심이며, 독무가 아니라 군무이고, 형형색색이 아닌 단색의 연출이다. 요새 말로 순혈주의인 꽃이다.
한라산 산철쭉은 시기가 늦어 잎과 꽃이 함께 피어나 내륙보다 더 화려하다. 꽃잎 가장자리가 발색하듯 옅지 않고 꽃 전체가 온통 붉다. 그런 진홍의 꽃무리들이 짙은 초록의 새잎과 보색대비가 강하고 절묘하게 어우러져 눈부심이 더하다.
 한라산 산철쭉은 내륙의 어느산 보다 더 붉다 |
 사진작가들에게 가장 구미가 돋는 촬영장이 된다. |
지난해에는 봄이 길고 날이 따뜻하여 일찍 서둘었지만 10일 정도 일러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얻어 오지 못했던 게 영 마음에 걸렸었다. 금년 봄은 오히려 늦추위로 봄볕이 노루꼬리만큼도 못되어 꽃들이 제대로 피어나지 못한 채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그러던 차에 지난 가을, 15년 만에 돈내코 코스를 개방하여 한라산 제일의 철쭉 화원을 볼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이번엔 기어이 담아 오겠노라며 비가 오는 데도 산을 좋아한 몇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제주도행 배에 올랐다.
제주도를 찾는 길은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선실 창밖의 빗줄기를 내다보며 큰비가 와서 오를 수 없거나 꽃잎이 물에 젖어 색이 발했거나 쳐져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물먹은 꽃잎의 초라함을 익히 알고 있어서이다.
첫날 1번 올레길을 걸었던 우리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이른 햇살을 받기 위해 시간을 재촉하여 영실 쪽을 택했다. 큰비는 개었지만 아직도 안개비가 내리고 있어 비옷까지 준비해야 했다. 칙칙한 숲을 벗어나 암벽위에 서니 안개가 스멀스멀 벗겨지기 시작하며 영실기암이 검은 자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저 아래 산자락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르고 있었다.
 앤개가 벗겨지는 영실기암 |
 철쭉을 보자고, 산철쭉을 보자고 저렇게 오른다 |
구상나무 숲을 벗어나 선작지왓 입구에 다다르니 검을 바위와 노란 마른풀 사이에서 산철쭉이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여기서부터 드넓은 선작지왓과 웅장한 한라산 남벽을 바라보며 윗세오름까지 유유자적하며 걷을 수 있다. 산행이 아니라 트래킹 하듯 말이다. 광대무변의 산정에 피어있는 산철쭉의 잔치는 가히 천상의 화원이라 할만하다. 이런 산철쭉의 장원은 한라산 남벽이 바로 보이는 방아오름 일원과 평궤대피소까지 무려 2km나 이어진다.
 광대 무변한 산상의 화원 |
 이곳에 서면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어든다 |
윗세오름을 지나 한라산 남벽에 다다르자 푸른 숲 너머로 검고 날카로운 암벽이 안개를 걷어내며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어제 내린 비로 실날같은 물줄기가 암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직 암벽을 돌자 하얀 구름사이로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이 열렸다.
구릉을 돌자 남벽의 방아오름 능선엔 산철쭉이 눈부신 햇빛 아래 융단처럼 펼쳐져 있었다. 부드러운 능선마다 온통 붉은 수채화 물감을 칠한 듯 곱다. 짙붉은 산철쭉을 보는 순간 꽃 바다에 빠져 몽환적 분위기를 젖어들었다.
남벽 통제소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자리를 떴다. 붉은 산철쭉 사이로 난 길이 구릉을 넘어 길게 벋어있다. 눈부신 햇빛이라서 산철쭉의 진홍 빛깔이 더고운 능선 너머 아름다운 서귀포가 아물거렸다. 작은 섬이 그림 같이 떠 있는 바다 위엔 하얀 구름이 옅게 깔려 있었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
 붉은 구릉 너머로 서귀포가 아련히 보인다 |
한라산 산철쭉의 향연은 6월 말까지는 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산지대라 밤낮의 기온차가 심해 그렇게 쉽게 시들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고산의 추위를 이겨낸 꽃이어서 어느 산보다 더 붉다.
산철쭉은 '사랑의 즐거움' 또는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아니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이곳 천상의 꽃밭을 거닐어 보기 바란다. 남자라면 사랑하는 사람을 수로부인으로 여겨 꽃 한 송이 꺾어들고 헌화가를 불러 봄도 좋지 않겠는가?
광대무변의 산철쭉 장원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음과 무모함만 앞세우며 보이는 것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사진기만 탓하는 무능이 한탄스럽기만 하다. 입체가 사라진 평면으로 밖에 나타낼 수 없어 생생한 현장감이 사라진 사진을 보며 아쉽지만 내년을 다시 기약해 본다.
2010. 6. 13. Forman |